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급작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이제껏 그녀는 자발적으로 혼자였다. 혼자 하는 여행을 선호했고 혼자 사는 삶을 즐겨왔다. 그런데 별안간 혼자라는 사실이 지긋지긋했다. 그녀는 무례한 외판원처럼 함부로 쳐들어온 그 감정을 어쩌지 못해 사진을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마을에 가다가 돌아온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혼자 간 곳이 가장 아름다울 수는 없었을 테니까. --- 「가장 아름다운 마을까지 세 시간」중에서
그러니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내일 죽는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죽기 전까지 매 순간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이 부질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 살아 있는데도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게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중에서
농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남자는 희수가 결혼 안 할 거라고 대답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자신도 이미 결혼했으면서 그녀의 결혼에 전전긍긍하는 꼴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지만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오래전에 그는 상상한 적이 있었다. 그의 결혼식에 아직 결혼하지 않은 그녀가 오는 것. 그리고 그녀의 결혼식에 아직 결혼하지 않은 그가 가는 것. 그때는 양쪽 상황 모두를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가 정말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함이었다. 그저 상상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중에서
마지막날 밤 그는 물었다. “우리 사 년 뒤 오늘 여기 다시 올까?” “왜 사 년이야? 오 년도 아니고 십 년도 아니고.” 그가 벽에 걸린 달력을 가리켰다. 아, 하고 나는 입을 벌렸다. 2월 29일이었다. 사 년에 한 번씩 윤년에만 찾아오는, 평년에는 2월 28일 밤과 3월 1일 새벽 사이에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는. 오늘이 그날이었나. 등줄기가 서늘했다.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특별하고 유일하며 절대적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 「2월 29일」중에서
주인공은 이제 겨우 서른 살이었다. 서른이면 이미 겪은 것보다 앞으로 겪어야 할 것이 많은 나이였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고 그래서 궁금한 것도 많고 자연히 알아야 할 것도 많을 때였다. 딱히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살기에는 늦은 나이가 아니지만 마땅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죽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물론 그런 일에 적당한 나이가 따로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단순하게 생각해도, 살리기로 했다가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 다시 죽일 수는 있어도 일단 죽이고 나면 나중에 다시 살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 「질문들」중에서
그와 걸을 때마다 나는 늘 만보기를 차고 있었어. 일부러 리셋 버튼을 누르지 않아서 걸음 수가 날마다 누적되었어. 내가 아미를 처음 만났을 때 만보기의 숫자는 10000.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99999. 만보기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 숫자였지. 그 이상을 기록하려면 리셋 버튼을 누르고 다시 0부터 시작해야 했어. 하지만 난 어쩐지 그게 아미와 나만의 추억이고 역사이고 정표인 것 같아서 그와 헤어진 후에도 리셋을 하지 않았어. 그런데 말이야. 그 만보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