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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아침달 시집-013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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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인 「1995년 여름」 수록 시집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11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116쪽 | 165g | 125*190*8mm
ISBN13 9791189467166
ISBN10 118946716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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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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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애인이 장마를 삼켜서 어지러웠다

숲속에서 망가진 나무를 되감을 때마다
세상엔 일기예보가 너무 많고
내가 만든 날씨는 봄을 웃게 할 수도, 떨어뜨릴 수도 없어서
시들겠다는 비근함을 믿고 싶어졌다

마른 손목과 외로운 눈동자도 썩 어울렸다
거룩한 꽃을 오래 밟다가 잠들면 바람이 다 자살할 때까지 망가져 내리는 유성우

내일 밤 현실에 따뜻한 천사를 보면서
그곳이 천국이라 생각할 텐데
지금은 이대로 사라지면 어쩌지 걱정하는 내가 있고
어제 들은 음악과 며칠 전 봤던 영화에서도
사라지면 안 되는 것들만 사라져서

네가 웃을 때마다 누군가와 손잡고 걷는 꿈들을 꿨다
우리는 슬픈 것이 닮았고, 피가 달라서 더 슬프다
죄를 안고 함께 목 놓아 울어줄 수 없어서 아름다운 적막을 산다
온종일 기도하다가 손목 그림자를 따라 죽어가면

그 여름에서 수평선이 기다리고 있을까

비극은 자주 부풀던 뼈마디보다 가벼워졌다
--- p.16

소음 속에서 귀를 막으면 파도 소리가 들리나요
손가락을 죄다 자른다면 더는 편지를 적지 않아도 되나요 모든 편지에는
그립고 슬프다는 말을 적어야 하나요

밤하늘도 저렇게 많은 알약을 삼켰다고 하지 않았나요
박하잎을 씹으면 두 눈이 시큰거려요 발끝에서 바다가 죽어가요
어젯밤 꿈은 전부 증발해버렸는데
어지러워요
나는 어지러운 사람이에요

무엇을 말해야 하나요 무엇을 듣고 싶나요
귀를 막으면 알 수 있나요 귀를 막고 눈이 멀면
손끝이 예민해지나요 무엇을 만져야 하나요
무엇이었나요 어둠 속에서
내가 더듬거렸던 것은

끝, 눈물, 다음에 계속

물밀 듯이 밀려오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눈앞을 가리는 건 꼭 눈물이어야 하나요
볼 수 없다면 눈먼 사람이 되는 게 나을까요

독서를 하다가도 문득 견딜 수 없어져서
책을 펼친 채로 덮어두면 날갯짓 소리가 들려요
영화는 어떤가요 재생하면 할수록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사랑을 나누고
나는 여러 인물에게 감정을 대입해요 오래 살았다는 망상을 하곤 해요
결국 머릿속은 엉망진창이 되는 건가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는데도
우는 사람이 왜 이리도 많은 걸까요

그러나 편지를 쓰는 동안 몇 개의 계절이 지나갔다 나는 누구의 선생도 되지 못할 것이며 사실 네가 나에게 가르쳤던 장르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위세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여름은 길고 길어서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고 그게 나의 장르라고 추측했다 나무가 햇빛을 조각내는 동안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편지를 적는 것 적어놓고 보내지 않는 것
스스로 읽어보는 것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기 위해
가끔은 저항하기 위해
행간의 공백을 들여다보는 것
멍하니 죽기를 기다리는 것 우리 중 하나는
조각날 거라 기대하는 것

끝과 눈물과 다음이 계속된다면

우리 서로 끌어안을까요
겹쳐질 수 있나요 두 개의 심장이 가까워지면
무엇을 들을 수 있나요 어둠 속에서
내가 너의 얼굴을 더듬거렸다고 믿었던,
그 순간에
너는 무엇을 듣고 있었나요

여름이 지나가요
온 동네를 뛰어다니다 머리를 붙잡고 뒹굴어요
현악기가 머릿속을 가득 메워요

잠이 와요
꿈속에선 손 닿는 것마다 시들어가요 온몸에 피부병이 도지고
붉은 반점마다 꽃을 그리려는 사람이 있어요
길 잃은 모든 동물들은 미치기 시작해요 자신의 앞발을 뜯어 먹고
꼬리를 잘라 거리에 던져두어요
거리의 사람들이 나를 쳐다봐요
꿈이라는 걸 알아챈 듯이

음악이 꺼져도 춤을 추는 이가 있을까요 있다면
그는 무엇이 그렇게도 그립고 슬픈 걸까요
끝이 나고 눈물을 흘려도 정말
다음은 계속되는 걸까요

어지러워요
끝내 너는 어지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나요
벌써 그렇게 많은 계절이 지났나요
--- p.60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우는 너에게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게 계속 일할 의지 계속 살아갈 의지가 없다는 게 슬펐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먹고살 궁리 같은 건 흘려보냈다

어떤 사랑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는 늦은 밤이고 아픈 등을 주무르면 거기 말고 하며 뒤척이는 늦은 밤이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 것은 고작 설거지 따위였다 그사이 곰팡이가 슬었고 주말 동안 개수대에 쌓인 컵과 그릇 등을 씻어 정리했다

멀쩡해 보여도 이 집에는 곰팡이가 떠다녔다 넓은 집에 살면 베란다에 화분도 여러 개 놓고 고양이도 강아지도 키우고 싶다고 그러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하고 몇 년은 성실히 일해야 하고 씀씀이를 줄이고 저축도 해야 하는데 우리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키스를 하다가도 우리는 이런 생각에 빠졌다 그만할까 새벽이면 윗집에서 세탁기 소리가 났다 온종일 일하니까 빨래할 시간도 없었을 거야 출근할 때 양말이 없으면 곤란하잖아 원통이 빠르게 회전하고 물 흐르고 심장이 조용히 뛰었다

암벽을 오르던 사람도 중간에 맥이 풀어지면 잠깐 쉬기도 한대 붙어만 있으면 괜찮아 우리에겐 구멍이 하나쯤 있고 그 구멍 속으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다 보면 빛도 가느다란 선처럼 보일 테고 마침내 아무것도 없이 어두워질 거라고

우리는 가만히 누워 손과 발이 따뜻해지길 기다렸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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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근거지로 모이고 흩어지는 시편들

슬픔은 기본적으로 과거를 향한 감정인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어떤 것들을 향한 마음인데, 엉뚱하게도 슬픔을 터전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시인들이 있다. 미래를 지향한다고 선언하는 시인 셋이 있다. ‘뿔’이라는 이름으로 뭉치고 다져진 동인들. 최지인, 양안다, 최백규. 이 세 시인의 면면은 제각기 다르고 그들이 지향하는 시의 세계도 겹쳐지는 것만큼이나 다른 지점이 많이 보이는데, 유독 ‘뿔’이라는 이름 아래서는 한 목소리로 미래를 말한다. 세 시인 모두 슬픔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시의 당사자들인데, 왜 이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말하는 것일까? 미래를 지향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들의 시에서 미래는 장밋빛 전망을 담은 미래와는 거리가 멀다. 전망 같은 것은 사치품처럼 느껴지는 곳. 전망이 안 보이니 건설적인 계획도 환영처럼 존재하는 곳에 ‘뿔’의 시가 있다. 희망도 기대도 발붙이기 힘든 곳에서 미래를 말하는 시. 그것이 뿔의 시라면 거기에 담긴 미래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미래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생겨날 수 없는 미래는 눈앞에서 환영으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무리 없이 통하고 또 섞인다. 창작동인 뿔을 구성하는 세 시인의 세계도 바로 이 지점에서 통하고 섞인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는 기원이 있고 생겨날 수 없는 미래에는 끝내 소멸이 있다. 말하자면 기원과 소멸이 맞물리는 곳에서 뿔의 시는 탄생한다. 저마다 들려주는 목소리가 다를 뿐 과거와 미래, 기원과 소멸이 맞물리는 곳에서 이들의 시는 다시 하나의 정서로 통한다. 바로 슬픔이다. “우리는 슬픈 것이 닮았고, 피가 달라서 더 슬프다.”처럼 슬픔을 근거지로 모이고 흩어지는 시편들이 하나처럼 또 여럿처럼 빛나고 있는 시집. “찰나의 밝은 것들”로 빛나는 시는, 그것이 찰나라서 또 슬픈 것이리라.
- 김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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