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 정삼덕 님
거제 출신 정삼덕 선장은 15살에 거제에서 영도로 나와 10년간 ‘해외송출인력’으로 미국 수송선을 탔으며, 이후 동삼동에서 선장이 되어 30여 년을 살고 있는 바다 사나이다. 그가 외항선원으로 보낸 10년은 개인적인 차원의 성과에서 그치지 않았다. 산업화 시대, 외화수입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평가받는 월남 파병 병사나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처럼 정삼덕 씨 또한 그들과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해외인력송출로 외국 선박을 탔던 모든 선원들 또한 그러하다.
“거제는 고향이고 제2의 고향은 영도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 고향 거제 능포보다는 영도 동삼동이 내가 남자로서 내 이름 석 자를 알릴 수 있게 해준 곳이에요. 부유하게 산다는 것보다는 자식한테, 넘한테 피해 안 주고 밥 먹고 사니까. 영도 동삼동은 도심 속의 어촌이지만 아직도 시골 맛이 납니다.” --- p.33
해녀 김숙희 님
제주 서귀포 출신의 해녀 김숙희(가명)는 제주에서 영도로 출가(出家)한 해녀로, 영도 동삼동 바다를 터전으로 지금도 물질을 하고 있다. 당시 제주에서 바다를 건너 육지로 온다는 건 수시로 침몰하는 배 소식과 더불어 극한의 두려움에 자신을 맡겨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고된 일이지만 정직한 노동으로 제 몫을 해왔다는 뿌듯함과 성취감은 해녀인 김숙희 씨는 물론 영도의 깡깡이 아지매, 자갈치 아지매, 재첩국 아지매 등 그 모두가 매일 아침 몸을 일으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어머님 말씀을 듣고 집에 가 남영호에 대해 찾아보고 마음이 서늘해졌다. 남영호가 침몰한 1970년은 그녀가 제주에서 영도로 출가한 해와 같은 해였다. 그녀가 언급한 덕남호 또한 5년 뒤 침몰했다. 그때 제주에서 바다를 건넌다는 건, 극한의 두려움에 잠시 자신을 맡겨야만 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새삼 알 수 있었다.
--- p.39
우리 때는 임신해서 8개월까지도 작업을 했어요. 그때는 워낙 사는 게 곤란하고 못 사니까. 애기 낳고 나면 키우려고 얼마 안 있다가 또 물에 나가고, 공부시켜야 하니까 또 나가고. 없어서 남한테 뭐라도 빌리면 갚아야 되잖아요. 내 몸 골병들어도 바다 갔다 오면 돈 버니까. 그렇게 다 자식들 키우고 살았지. 부모로서 자식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첫 번째. 정직한 노동으로 가정에서, 일터에서 제 몫을 해내고 있다는 뿌듯함과 성취감이 그녀들을 매일 아침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그건 아마 영도 깡깡이 아지매도, 자갈치 아지매도, 재첩국 아지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p.50~51
피난민 서선자 님
1952년 1월 4일 흥남 철수 때 흥남부두에서 수송선을 타고 거제로 온 함남 함흥 출신의 서선자 씨는 한국전쟁이라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겪은 인물이다. 그녀는 전쟁에 떠밀려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에서 경상남도 거제로, 부산 서구 남부민동으로, 잠시 대전으로, 마침내 부산 영도구 청학동으로 옮아가며 살기 위한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부유하듯 떠돌게 된 그녀의 삶은 자의가 아니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흥남 철수’. 남하하기 위해 흥남부두에 모인 30만 명의 인파 중 미군 수송선인 LST를 탄 피난민은 9만 1천여 명이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열한 살 서선자와 그녀의 어머니, 여동생이 있었다.
이제 이북동네에 남은 동향 사람은 서선자 어머님을 포함해 예닐곱 명 정도다. 그들 모두 이제 ‘밤새 안녕’을 묻는 나이다. 예전에는 동향 사람에게서 느끼던 유대감을, 그녀는 이제 청학동 주민 모두에게서 느끼고 있다. 저마다 고향도 다르고 살아온 과정도 다르지만, 청학동 해돋이마을에서 힘든 시기를 함께 겪으며 다져 온 동료애 덕분이다. “그때는 먹고 살라고 여기 왔으니까 그저 살았지만, 이제는 마을이 많이 좋아졌어. 다시 보니 물 좋지 산 좋지 사람 좋지 친구 좋지 동생 좋지, 다 좋지 뭐야. 내가 힘이 없어가지고 아야 아야 하니까 그게 아쉽지. 영도는 인정이 있는 곳이야.”
--- p.72~73
해돋이마을 이옥자 님
제조업, 그중에서도 신발산업의 메카였던 부산의 근현대사와 지금의 해돋이마을이 있게 한 장본인인 경남 거창 출신의 이옥자 씨도 있다. 그녀가 마을에서 한 일 중 가장 특별한 일은 ‘수용소마을’로 불리던 동네 이름을 ‘해돋이마을’로 바꾼 것이다. 마을에 대한 애정과 통찰, 다음 세대를 위한 그녀의 마음에서 비롯한 결과였다.
처녀 때는 이 동네가 돼지 키우는 곳인 줄 알았어. ‘한일제관’이라고 깡통 만드는 공장에 다니던 친구들이 거기서 자취를 해서 놀러 간 적이 있는데 집을 돌로 막 재갖고 지붕 하나만 얹어놓는 거야. 가마니를 탁 열고 들어가면 쪼깨난 부엌하고 신발 벗는 데가 있고 그 안이 방이었어. 방 한 칸에서 너 댓이 자고 부엌에는 사과 궤짝 하나 놓여있고. 궤짝 밑에 밥그릇이 몇 개 있고 밥숟가락이 몇 개 없으니까 아버지가 다 먹으면 엄마가 먹고 그랬지. 남편 때문에 집을 날려서 막상 갈 데가 없으니 이 동네가 먼저 팍 생각이 난 거야.
--- p.87
“우리 마을 도로명이 일본식으로 돼 있다고 국토부에서 바꿀 적에 통별로 이름을 지어오라 했어. 우리 마을이 옛날부터 ‘수용소’라 불렸지. 애들이 학교 가면 맨날 “니들 수용소 사나?” 그랬다는 거야. 어느 날 새벽에 물을 배급하고 산책로에 딱 앉아 있는데 해가 오륙도에서 싸악 올라오더라고. 우리 동네가 영도에서 최고 높으니까 해가 제일 먼저 보이니까 ‘해돋이’라고 지으면 어떨까 했어. 영도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동네. 해돋이마을이라는 이름을 동을 통해 서울로 보냈는데 통과됐어.”
--- p.90
산복도로 버스기사 양영기 님
전남 영암 출신의 양영기 씨는 산복도로 6번 버스 기사로, 영도 사람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일상과 만나고 있다. 봉산마을에서 출발해 흰여울마을 입구를 지나 중구 공동어시장을 거쳐 서구 괴정동까지. 그리고 다시 영도로. 그는 10년을 한결같이 6번 버스와 함께했고, 하루 중 상당 시간을 1평 남짓 운전석에 앉아 거리를 누빈다. 그리고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영도 사람의 일상을 만나고 있었다.
1평 남짓 운전석에 앉아, 달라진 공기로 영도를 느낀다는 양영기 씨. 아직도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어디서든 자신의 고향이 전라도라고 말하지만 다시 고향에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한다. 영도는 양영기 씨에게 가장으로서, 자신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곳이기 때문이다.
“영도, 괜찮죠. 집이 작다 보니께 큰 데로 이사 가자 하죠. 그래도 어디로 갈지 얘기할 때 영도는 안 벗어나요. 영도는 저 같은 서민들 살기에는 최고로 나은 것 같은데. 크게 차이나는 저기가 없으니까, 자신감 갖고 살 수 있는 거죠.”
--- p.114~115
영도경찰서 30년, 박동진 님
전남 보성군 벌교 출신 박동진 씨는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형사로 영도 거리를 누비며 영도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몸소 체험하였다. 그가 스무 살부터 줄곧 살아온 곳, 30여 년 경찰 생활 중 가장 오래 있었던 곳은 영도이다. 강력계에서, 외사계에서, 민원실에서, 많은 피해자와 피의자를 만나온 그였다.
영도는 배타고 거친 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폭력사건, 그걸 강절도 사건이라고 하는데 그게 많았고, 살인사건도 많았고요. 술 먹고 순간적으로 저지르는 범죄도 많았죠. 배 타가지고 수천만 원 모아가지고 술집 여자한테 다 줘 불고, 그래서 마 뛰 내리고 자살한 놈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일 갖고 사람을 칼로 찌르는 경우도 있고. 열심히 일해가지고 자기 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은 나쁘지 않은데 다소 감정적인 그런 게 있는 곳이었어요.
--- p.124
그는 부산에 이례적으로 함박눈이 내리던 날, 형사 동료들과 영도다리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 인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더니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다 “좋은 선후배였는데 먼저 가버렸다”고 말하는 그의 눈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 p. 128
부식가게 양영자 님
강원 홍천 출신으로 대평동에 조그만 부식 가게를 열어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양영자 씨 부부는 점포를 집과 일터 삼아 쉬지 않고 일해왔다. 그녀는 가게에서 부식을 팔고, 남편은 수리조선소에서 깡깡이질이나 그라인더, 철거작업을 했다.
우리가 부식 가게만 했으면 되도 않았을 거예요. 우리 영감은 배 꼭대기에 올라가서 추우나 더우나 일하고. 매번 눈에 티가 들어가서 빼고. 나도 고생했지만 우리 영감도 고생을 많이 했지.
--- p. 142
옛날 장사할 때는 동네에 꼼딱꼼딱 새댁들도 많았고 애들도 조랑조랑하니 많이 살았어. 대평초등학교 운동회 한다, 소풍 간다는 소식이 들어오잖아. 그러면 김밥을 싸야 하니까 단무지를 아침에 한 통을 받으면 다 팔려서 한 통 더 받고, 김밥에 들어가는 오뎅도 아침에 받는데 오후에 또 부르고 그랬지.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저 위에 아파트 몇 번 지었다 아니에요. 그때 싹 나가고 없어요. 이제 노인만 남았지.
--- p.142
깡깡이마을 대표 기술자 이진희 님
대평동 대표 기술자인 경북 안동 출신의 이진희 사장 또한 영도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연 인물이다. 영도 대평동에는 놀라운 솜씨를 가진 기술자들이 많다. 대평동 공장 열 군데만 모아놓으면 잠수함도 만들 수 있을 거란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중에서도 솜씨 좋고 성실하기로 소문난 이가 바로 이진희 사장이다. 그의 공장은 ‘대평동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열고, 가장 나중에 닫는 곳’으로 유명하다.
예전에는 기술을 배우려면 일본 언어가 많았습니다. 그걸 배워서 익힌, 손재주도 좋았던 선배들과 동료들, 정말 존경합니다. 수리일은 하고 나면 쾌감도 있고 승리감도 있습니다. 지금은 동네에 기술자가 줄어서 그게 진짜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제 대평동이 저에겐 고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동네에 감사해요. 시골에서 와 여기서 성공했고 꿈을 다 이뤘거든요.
--- p.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