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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지나쳐 가고 우리는 어른이 되고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그 문장이 나를 데려간 곳 - 『노르웨이의 숲』 안됐다면 안됐고 우스꽝스럽다면 우스운 이방인 생활 - 『이윽고 슬픈 외국어』 한밤중에 내게로 오는 자전거 소리 - 「한밤중의 기적에 대하여, 혹은 이야기의 효용에 대하여」 팬심은 무엇을 어디까지 참게 하는가 - 『기사단장 죽이기』 파스타를 만들고 재즈를 듣는 남자들 -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반환점에서 기다리는 것은 - 「풀사이드」 앙코르와트를 무너뜨리고 인도의 숲을 태우는 멋지고 기념비적인 사랑 - 『스푸트니크의 연인』 직업으로서의 번역가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 - 『1973년의 핀볼』 난 이런 글이라면 얼마든지 쓸 수 있거든 - 『무라카미 라디오』 1, 2, 3 소울 브라더, 소울 시스터 -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작가에게 바라는 것 - 『양을 쫓는 모험』 에필로그 - 아무튼 뭐라도 써야 한다면 |
저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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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를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
도서1팀 김유리 (asalighter@yes24.com)
봄날의 곰, 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당신도 하루키를 언젠가 읽었던 독자였겠습니다. “하루키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하루키의 문장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라고 생각했던 나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에세이를 만난 순간, 그때의 감정들이 다시 샘솟았죠.
하루키는 문학 애독자라면 어느 페이지는 꼭지가 접혀 있을 작가 중 하나입니다. 에세이 13꼭지 중 여러 편이 나의 어떤 부분과 겹치거나 혹은 속마음을 들킨 것 같다면, 이 책을 잘 고르신 것 같아요. 저 또한 그랬으니깐요.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나도 그런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던 감성과 잊고 싶었던 청춘의 장면들을 상기하게 만드는 하루키. 하루키를 몰라도 자연스럽게 그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 수 있는 책, 『아무튼, 하루키』입니다. |
내밀한 소통이 그리워지는 날이면 홀로 침대 위에서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다. 운명처럼 일본 대학의 수업 교재도 바로 그 소설이었던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수업에서는 한 장(章)씩 진도를 나갔고, 나의 원서 읽는 속도는 거북이처럼 느렸기 때문에 내게는 언제나 읽어야 할 문장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 「그 문장이 나를 데려간 곳」 중에서 이십대 때 읽은 이 책을 최근 다시 읽어보니 예전에는 가볍게 흘려보낸 이 대목에서 10여 년 전 내가 맛본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실감’이 되살아났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의 무능력한 외국인’으로서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스스로를 세련된 교양인쯤으로 끝까지 착각했을 수도 있다. 한데 나에게서 모국어와 모국의 문화를 제거했더니,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남의 집 현관에서 신발도 제대로 정리 못 할 정도로 순발력 떨어지고 예상치 못한 배려에 곧잘 당황하는 어설픈 인간이었다. 그로써 좋았다. 덕분에 여태껏 몰랐던 자신을 알게 된 셈이니까. --- 「안됐다면 안됐고 우스꽝스럽다면 우스운 이방인 생활」 중에서 우리가 사귄 것은 고작 1년이었지만 헤어지는 데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 애는 나에게 즐겁고 따뜻한 기억을 많이 안겨줬으나 그것은 오랫동안 생생한 통증도 함께 일으켰다. 안타까움과 슬픔, 후회와 자기 연민 같은, 나의 내부를 망가트리는 것들. --- 「한밤중에 내게로 오는 자전거 소리」 중에서 하루키는 “편파적인 사랑이야말로 내가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가장 편파적으로 사랑하는 것들 중 하나”라고 했고, 어쩌면 나 역시 하루키를 편파적으로 사랑해서 그의 신간이라면 무조건 구매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하루키가 이름만으로 책을 파는 작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과거 일본 문학에 열광했던 독자들이 이제는 더 이상 요시모토 바나나나 무라카미 류, 에쿠니 가오리를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게는 가끔 쓸쓸하게 느껴진다. 같은 쓸쓸함을 하루키에게서만은 느끼고 싶지 않다는 것이 오랜 팬으로서의 내 솔직한 심정이다. --- 「팬심은 무엇을 어디까지 참게 하는가」 중에서 누군가 도입부가 가장 멋진 하루키의 소설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스푸트니크의 연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광활한 평원을 가로지르며 돌진하는 회오리바람 같은 사랑, 앙코르와트를 무자비하게 무너뜨리고 한 무리의 호랑이들과 함께 인도의 숲을 태워버릴 정도로 멋지고 기념비적인 사랑이라니. 이런 사랑에 대해 이 책을 읽을 당시 청소년이었던 내가 어떻게 환상을 품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 「앙코르와트를 무너뜨리고 인도의 숲을 태우는 멋지고 기념비적인 사랑」 중에서 집에 도착해보니 디는 자신의 털 색깔과 비슷한 갈색 박스에 담겨, 생전에 좋아했던 쿠션 위에서 얌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병원에서 씻겨줬는지 향긋한 샴푸 냄새가 풍겼고 털은 전에 없이 부드러웠다. 비듬도 없었다. 조르바는 인간들의 대성통곡에 겁에 질린 나머지 밥솥 뒤에 숨어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는 작별 인사를 나누지 않으면 조르바가 집에서 계속 디를 찾을 거라고 했단다. 남편과 나는 반려동물 장례식장으로 떠나기 전에 조르바를 억지로 끌고 나와야 했다. 조르바는 차갑게 식은 형제를 쳐다보려고도, 냄새를 맡으려고도 하지 않고 날카롭게 울었다. ---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 중에서 얼마 전 하루키의 수필집 『장수 고양이의 비밀』을 공공장소에서 읽다가 어느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소리 를 내어 웃고 말았다. ‘오이처럼 서늘한 얼굴’이라는 비유가 나왔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표정을 지으면 오이처럼 서늘한 얼굴이 되는 걸까. 오이를 닮아서 별명도 큐컴버배치인 영국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한껏 서늘한 표정으로 오이를 와작와작 씹어 먹는 장면을 상상해버렸다. --- 「난 이런 글이라면 얼마든지 쓸 수 있거든」 중에서 여담이지만 하루키와 미즈마루의 일화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기차 식당 칸에서 비프커틀릿을 먹는 로멜 장군’의 삽화에 관한 이야기다. 하루키는 어떤 삽화든 척척 그려내는 미즈마루가 한 번이라도 고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기차 식당 칸에서 비프커틀릿을 먹는 로멜 장군’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으나 미즈마루는 손쉽게 그려버렸다. 이에 하루키는 설령 ‘수염을 깎는 카를 마르크스를 따스한 눈길로 지켜보는 엥겔스’ 같은 난도 높은 주제를 던져도 미즈마루에게는 누워서 떡 먹기일 거라며, 그렇다면 아예 단순한 주제로 골탕을 먹여보자 하고 두부에 관한 글을 세 편 연속 썼지만 미즈마루는 이 역시 아무렇지 않게 쓱쓱 그려버렸다. --- 「소울 브라더, 소울 시스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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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무튼 시리즈를 기획할 때부터 제철소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었습니다. 이 시리즈에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로 (살아 있는) 인간이 등장한다면, 첫 테이프는 하루키가 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하루키는 취향 강한, 호불호가 분명하게 나뉘는 몇 안 되는 작가니까요. ‘이 구역의 하루키스트는 나’라고 얘기할 수 있을 만한 후보군을 추려 집필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하루키의 임자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아직 하루키 책을 한 번도 번역한 적 없는’ 이지수 번역가에게 그 미션이 돌아갔습니다. (우여곡절이 뭔지 궁금하시다고요? 『아무튼, 하루키』의 에필로그 ‘아무튼 뭐라도 써야 한다면’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만...) 2 그에게 초고를 받은 날, ‘드디어 하루키가 임자를 만났구나!’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어떤 대상을 오랫동안 좋아해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담담하지만 단단한 태도와 목소리가 글 곳곳에서 묻어났습니다. 앉은자리에서 400매 분량의 원고를 다 읽은 뒤 바로 책장에 꽂혀 있는 하루키의 산문집 한 권을 꺼내 읽었습니다. 하루키를 다시 읽고 싶게 만들었으니, 일단은 성공입니다. 3 세계적인 작가답게 ‘하루키’를 소재로 한 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습니다. 특히 그의 글 속에 등장하는 음악(주로 재즈)이나 음식(주로 맥주), 동물(주로 고양이), 취미(주로 달리기와 여행) 같은 하나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루키 읽기’를 시도한 것들이 많죠. 이지수 작가는 그런 익숙한 방식 대신 자기만의 고유한 기억으로부터 하루키를 데려옵니다. 하루키 읽기가 아닌 하루키라는 프리즘으로 ‘나’를 읽어내는 것. 이 책의 가장 빛나는 지점입니다. 4 중학생 시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하루키 월드에 처음 발을 들인 그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순간에 맞닥뜨린 하루키의 문장들을 지금 여기로 다시 불러들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하루키를 원서로 읽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결국 번역가가 된 저자가 하루키의 문장과 관계했던 내밀한 이야기인 동시에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는 『1973년의 핀볼』 속 문장처럼 ‘하루키’라는 입구로 들어가 마침내 ‘나’라는 출구로 빠져나오는 어느 하루키스트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아무튼, 외국어』를 쓴 조지영 작가는 자신의 책에서 하루키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렇게 ‘언제 적’ 하루키는 ‘그래도’ 하루키가 된다.” 『아무튼, 하루키』는 ‘언제 적’ 하루키가 ‘그래도’, ‘여전히’, ‘아무튼’ 하루키인 까닭을 다정하고 사려 깊은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네가 좋아”라는 두 마디를 정성껏 늘여서 해주는 『노르웨이의 숲』 속 와타나베처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