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이고 독서가 가져다주는 위안은 과연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T.S. 엘리엇의 표현을 빌려 답하고자 합니다. “언어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것은 언어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다”라고. 영상이나 그림 혹은 음악처럼 직접적이고 강렬하지는 않아도, 언어의 매력은, 그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실재하는 가치임에 틀림없습니다.
언어는 사상思想을 담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니체는 “가장 위대한 사상의 출현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라고 말했는데, ‘행위의 역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유思惟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사유의 역사가 곧 철학입니다. 이 글은 철학에 관한 글입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공자, 묵자, 노자, 맹자, 순자를 읽으면서 감명 받았던 진솔하고 인상적인 언어들을 함축적으로 요약해서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머리말」중에서
소크라테스의 생은 비극을 대변한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생각했던 비극적 낙관론자(tragic optimist)의 전형을 가장 헬라스적인 인물이었던 소크라테스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비극을 인식하는 인간만이 비극에 대항하는 특권을 부여 받는다. 소크라테스는 비극을 비극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죽어가면서도 희망을 꿈꾼다.
--- p.7
책을 읽는 목적은, 우선은 자신의 식견識見과 안목을 높이는 데 있고, 궁극적으로는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쿨cool해지는 데 있다. ‘쿨해진다’는 건 냉정해진다기보다는 냉철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세상을 등지는 게 아니라 세상과의 충분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걸 뜻한다. 그것은, T.S. 엘리엇이 말하는 비非개인성과 비非개성성을 성취하는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아타락시아(마음의 평정)에 이르는 것이며, 보다 심오하게는 불교에서 말하는 니르바나(열반涅槃)에 도달하는 걸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 모두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같은 목표를 향한 같은 도정道程에서 얻어지는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맥락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독서는 일종의 구도求道 행위이다.
--- p.33
공자에 따르면, 나이는 세월이 주는 게 아니라 세상이 주는 것이다. 젊은이는 자기 자신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지만, 나이 먹은 사람은 세상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말하는 나이 삼십에 이립而立, 혹은 나이 사십에 불혹不惑 또한 세월이 아니라 세상이 주는 나이인 것이다.
--- p.35
노자老子는 “정靜이 열熱을 이긴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노자가 한 말이 인간의 행위 자체를 부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노자는 정승열靜勝熱이라 했지, 정승동靜勝動이라 하지 않았다. 노자에 따르면, 정靜이란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열熱이란 무엇인가? 근본에서 벗어나 ‘붕 뜬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 p.37
“악한 사람은 결과만을 탐낸다”고 세네카는 말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결과만큼이나 과정을 중시한다. 동기動機의 명분도 따져 봐야 하고, 상대방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양심良心이라는 정서情緖가 대두된다. 독서와 사색이 누구에게나 양심을 심어 준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양심에 따라 자신을 설득하는’ 능력만큼은 얼마든지 키워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아우렐리우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라는 인형人形의 줄을 잡아 당기는 누군가가 우리 마음속에 숨어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 그것은 설득의 힘이고 생명이며, 말하자면 바로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그 무엇이다.”
--- p.157
개성이라 일컬어지는 ‘존재의 가능성’을 밝혀내는 일은 단순한 이해理解의 문제를 넘어서는 생존生存에 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개성을 나타낸 이후에 인생은 운명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예수와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삶은 확연히 달랐다. ‘차이의 구별’이 사라질 때, 아마도 우리는 최악의 현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만일 어느 한 순간부터 우리 모두에게 베토벤 교향곡 9번이 에어로빅 배음背音과 같은 음音으로 들려오게 된다면, 종말은 이미 우리 곁에 다가온 거나 다름없다. 종말은 거창하고 요란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종말은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우리를 잠식해온다.
--- p.165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고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그런 인물들이 있다. 그들의 존재는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고 단언한다.’ 훼손될 가능성이 있는 가치는 진정한 의미의 가치가 아니다. 죽음마저도 결코 그들의 모범模範을 손상시키지 못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을 남겨 두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남겨 두고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공자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인물들이 추구했던 것은 영생永生이 아니라 불멸不滅이었다. 영원히 사는 삶이 아니라,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삶을 꿈꾼 것이다. 그들은 유령幽靈이 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역사歷史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 p.175
앙드레 말로의 말처럼, “가난하면 적敵을 선택할 여지가 없다.” 오히려 환경이라는 적에게 지배당하는 처지에 놓일 뿐이다. 우선은 가난에 지배당하고, 결국에는 운명에 지배당하게 된다. 그것이 무능이든, 무지無知이든, 혹은 관념적인 것이든, 아니면 세속적인 것이든, 우리의 적을 우리 스스로가 선택해서 이겨 낸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적을 선택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마음의 여유일 것이다.
--- p.184
“에로티시즘은 사랑이 아니며, 다른 성性에 대한 익명의 폭로에 불과하다.” 에로티시즘은 체면에 손상을 준다. 하지만 그뿐이다. 어차피 인간은 모욕을 먹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클레오파트라와 양귀비가 역사적인 인물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여성의 피하지방이 남성의 지성知性을 그토록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철들기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쇼펜하우어는 늙음을 찬양했다. 늙음은 에로티시즘이라는 강력한 심연을 외면하던가,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다.
--- p.189
세월은 인간에게 일종의 ‘고백’을 요구한다. 늙음이란 스스로를 노출하는 것이며, 보다 심각하게는 스스로를 폭로하는 것이다. 40대는 30대보다, 그리고 30대는 20대보다 자기 자신을 더 많이 노출하게 되는데, 살아온 세월이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나라한 ‘자기 노출’은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자기 폭로’는 인간성을 부정否定하는 것이다. 예컨대 살인범이나 강간범 등은 여과 없이 자신을 폭로함으로써 주위를 긴장시키는 극단적인 경우이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탐욕도 함께 커가고, ‘때가 되면’ 자신의 추한 모습을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 p.189
최고로 현실적인 불사不死의 논리가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런 것임에 틀림없다 ? “어떤 인간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끊임없이 번영繁榮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대의 정신 속에서, 그리고 후대의 일상日常 속에서.” 이순신이 그런 존재였다. 그는 타협을 거부했기에 불멸의 특권을 부여받았다. 앙드레 말로의 말처럼, 살아남은 모든 문화는 타협된 과거들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에 타협을 불허했던 부분들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 p.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