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개천에서 난 용이 등장하기에 사람들은 시스템이 건강하다고 착각하고, 체계는 더 공고화된다. 기득권층은 옆자리에 얼굴마담 자리 하나를 마련해두고, 수많은 사람에게 말한다. “당신들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어.”
모두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다. 우리는 리더가(비록 부패했을지라도) 능력이 있어서 그 자리에 올랐다고 믿는다. 때문에 소수자라도 능력만 있으면, 노력만 하면, 언젠가는 사회가 알아봐 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체제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 권력자의 눈에 들기 위해 모두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을 쌓는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느끼는 불안과 피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가해자인 남성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합리적인 척 군다고 해보라. 얼마나 재수가 없겠는가. 가끔은 들어주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 분노에 찬 여성들의 말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고 말꼬리를 잡으며 비난하지는 말자. 그게 가해자가 취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다(그런 의미에서 재수 없게 떠든 걸 사과드린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누가 화장실을 차지할지 각자의 정의관을 내세워 치고받고 싸우는 게 아니라, 화장실을 부수고 칸을 늘리는 것이다. 정의를 외치는 사회는 정의롭지 않다. 정의를 외쳐서는 기존 가치를 바꾸지 못한다. 경쟁 체제만이 강화될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의가 아니라 정의를 외칠 필요가 없는 사회다.
냉정하게 말해 혁명은 낡은 권력 집단을 몰아내고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렇다면 시민들은 혁명의 본질을 몰랐을까? 자신들의 열망이 기득권에 의해 변질될지 몰랐을까?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지금 이 순간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판 모르는 이들과 연대한 그 순간만은, 참이 거짓을 이기고 진실이 승리한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도, 설혹 결과가 나쁘더라도, 그 순간만은 역사의 주인이 된다. 그 순간은 찰나지만 영원하다. 아무리 혁명이 단순한 권력의 교체라 해도 혁명을 겪을수록 세상이 조금씩이나마 좋아지는 이유는 이 영원한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경험한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무엇을 위해 일생을 전쟁에 바쳤을까? 그가 바란 건 무엇이었을까? 그는 어린 시절 신화 속에 등장하는 영웅의 삶에 심취해 있었다.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은 지금 기준으로는 결코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늘 강한 적과 싸우기 위해 모험을 떠나고, 자신보다 강한 상대 앞에서 장렬하게 죽음을 맞았다. 알렉산더가 바란 건 넓은 영토가 아니었다. 그는 강한 적을 쓰러뜨리고, 계속 더 강한 적을 찾고, 언젠가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쓰러질 계획이었다.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영원히 기억되는 영웅이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 들었던 신화 속 주인공처럼. 우리는 알렉산더를 불굴의 영웅이자,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사람이라고 배운다. 그런데 그는 정말 인생을 개척한 사람일까? 어쩌면 단순한 역할 놀이에 심취했던 어린아이는 아닐까?
조선업의 침체는 한 개인이 어쩔 수 없는 문제다. 대학을 가지 않는 학생에 대한 편견은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 불행 속에서도 사람이 살아간다. 바뀔 수 없는 큰 불행 속에도 행복이 있고, 인생이 있다. 불행을 겪었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앞으로도 불행하다 단정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이 영화의 선생님처럼 삶의 행복을 가르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개인차는 있지만(매우 크지만), 삶은 누구나 힘들다. 하지만 힘든 삶에 꼭 큰 의의나 큰 위로가 필요한 건 아니다.
나는 비종교인이긴 하지만 무신론자는 아니다. 세상 만물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신이라고 표현했지만, 꼭 신이라기보다는 ‘함부로 해선 안 될 어떤 것’이 있다고 믿는다. 세상 만물은 각자의 우주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모든 존재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미물이라도 파괴하면 하나의 우주가 파괴된다고 믿는다. 나도 당연히 하나의 우주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나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이 생각에 과학적인 증거는 없다. 있을 거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람. 이 믿음에는 우열이 없다. 권력이 없다.
그리스의 700여 개 공직 중 600여 자리가 제비뽑기로 선발됐다. 임기는 1년이었고, 한번 공직을 맡은 사람은 다시는 공직에 오를 수 없었다. 아테네는 현대 국가보다 인구가 많지 않아서 서른 살 이상 남성 중 절반은 죽기 전에 한 번씩은 관직을 맡았다. 모든 시민이 참여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 아닌 일은 추첨에 뽑힌 공직자들이 알아서 처리했다. 그들은 시민의 관리를 받았으며, 능력이 모자라거나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파면당하기도 했다.
후보 전원이 부유하고, 자녀 전원이 평균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선거가 민주적이고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제도라면, 이는 상당히 불균형해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 부유층을 20퍼센트라고 본다면, 후보 5명 중 1명, 많아야 2명 정도만이 부유해야 이치에 맞다. 그런데도 과연 이들이 우리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선거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측면에서는 얼핏 공평해 보인다. 누구든 출마할 수 있고, 누구든 투표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선거는 늘 상류층이 독점했다. 이 정도 성적표를 받아들었다면, 선거제도 자체가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까지 선거는 민주적인 결과를 낳지 않았다.
추첨으로 뽑힌 이들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료를 검토한 뒤, 신중하게 결정을 내릴 것이다. 단순히 대중의 뜻을 반영하겠다는 의도라면 여론조사로도 충분하다. 추첨으로 대표자를 뽑아 많은 월급을 주면서 국회의원으로 일하게 하는 방식은 단순히 여론을 쫓아가는 것과 다르다. 마키아벨리가 말했듯이, 그들에게 군주가 받을 만한 충분한 조언을 제공하면 그들은 군주보다 나은 선택을 할 것이다.
법을 만드는 일의 핵심은 전문지식이 아니라 시민의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국민의 입장에서’, ‘서민의 입장에서’ 같은 표현을 많이 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국민과 서민이 차고 넘치는데, 왜 우리는 기득권자들을 앉혀다 놓고 서민 코스프레를 강요하는 걸까? 물론 그 사람이 정의롭고 훌륭한 사람이라 진심으로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는 서민이 아니고, 서민만큼 서민을 이해할 수도 없다. 상류층은 상류층을 대변하면 그만이다. 왜 버스비도 모르는 사람에게 국밥을 먹이려고 하는가.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