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내려 아무리 애써봐도 번쩍이던 색색의 불빛과 쿵쿵 울리던 저음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가 무거워 다시 침대로 가서 눕고 싶었지만 입에 남은 구토의 흔적을 헹궈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나는 세면대 앞에 서서 칫솔을 집으려다가 멈칫했다. 혹시 이러다 증거가 훼손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무엇에 대한 증거란 말인가? 자꾸만 떠오르는 질문을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마음속에 울리는 날카로운 목소리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제대로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었다. 흐르는 물에 불길한 생각을 씻어내고 싶었다. 떨리는 손을 흐르는 물에 가져다 대자 말라붙어 있던 피가 씻겨나가며 물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붉게 변한 물이 소용돌이치며 배수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손톱 밑에 뭔가가 있다. 흙인가? 아니면 피? 나는 무의식적으로 칫솔을 집어 들고 손톱이 깨끗해질 때까지 닦아냈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더럽게 느껴졌다. 깨끗해지고 싶었다.
--- p.18
나는 내가 지금 벤의 얼굴도, 내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힘들게 설명했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약물을 먹이고 나쁜 짓을 한 걸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수치심이 밀려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머릿속에서는 더 어둡게 뒤틀린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동생에게 이런 얘기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예전 그 사건 이후 주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던 눈빛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 안에 담겨 있던 동정심, 또는 혐오. 벤에게서 그런 눈빛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 pp.30-31
순간 철컥하며 문고리가 돌아갔다. 현관문의 잠금장치는 안쪽에서 열쇠로 열고 잠그는 형태였다. 나는 현관문 안쪽 열쇠 구멍에 꽂혀 있는 열쇠로 손을 뻗었다. 잠시 숨죽이고 있던 나는 열쇠를 돌려 문을 여는 대신 현관 옆 작은 창문의 블라인드를 휙 걷었다. 누군가 창에 얼굴을 댄 채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혼비백산해서 뒤로 넘어지듯 물러났다. 창밖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았다. 크리시의 얼굴은 아니었다. 아무리 얼굴을 못 알아본다지만 그건 알 수 있었다. 일단은 남자인 것 같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창밖의 인물은 인부들이 즐겨 쓰는 비니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고, 모자 밖으로 나온 긴 머리카락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서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친 것은 몇 초였지만, 영원처럼 느껴졌다.
--- pp.68-69
“앨리슨, 자네가 겪고 있는 것은 부분적 기억상실이야. 그날 밤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기억 자체는 뇌에 남아 있는 거지. 그 기억을 찾아내는 게 관건이야.”
“제가 기억해낼 수 있을까요?”
“아마도. 하지만 그 시점이 오늘이 될지, 다음 주가 될지, 아니면 내년이 될지는 알 수 없어. 최악의 경우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지. 인간은 견딜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 그 기억을 지워버리기도 하거든. 아니면 평소에 늘 하던 평범한 행동을 함으로써 사건 자체를 지우려 하기도 하지.”
--- pp.137-138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이 남자가 누구인지, 원하는 게 대체 뭔지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알아내겠다.
동영상 속의 장면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누군지 알아내겠다. 남자를 죽이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 p.170
주변의 소음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그 소리를 인지한 것은 버스 정류장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부터였다. 내 발걸음에 정확히 맞춰 걷고 있는 발소리. 나는 자리에 서서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주변을 살폈다. 온통 어두운 옷을 입은 사람들 천지였다. 왜 모두 겨울이면 어두운 옷을 입을까? 검은색 코트, 검은색 구두, 검은색 운동화. 검은 운동화를 신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발걸음 소리를 울리며 나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신발들은 모두 비슷해 보였다. 그중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누가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자 사람들의 얼굴이 다시 바뀌었다. 몸이 다시 떨렸다.
--- p.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