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움’이라는 건, 외부의 것을 더하고 쌓는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부드러움은 나무토막 안에 감추어져 있다. 거친 나무토막을 오래 대패질하면 크기는 점점 작아지지만, 더 부드러워진다. 양적 성장의 갈망, 세상이 인정해주는 성취의 추구, 타인에게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욕구 따위만 추구하다 보면 나무토막 안에 숨겨진 나의 부드러움을 만나기 어려워진다. 부드러워지기 위해선, 마음속의 가시와 내게 붙어 있던 거스름을 밀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지금보다 작아 보이게 되는 건 감수해야 한다. 어떤 대패질과 사포질도 나무토막을 더 크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뺄셈의 부드러움에 대하여」중에서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덜 수줍고, 때론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도 하며, 상황에 따라 성향을 거슬러 외향적인 척도 한다. 조심스럽고, 공손하고, 내향적인 사람들을 여전히 좋아하지만, 그 시절 나와 비슷했던 많은 이가 나처럼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변했으리라고 지레짐작한다. 사람들을 볼 때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그 사람의 좋은 면을 기대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보이는 면으로 판단해 버린다. 사람들의 숨겨진 부분을 보는 일엔 시간이 걸리고, 내 안에 그 시간을 기다릴 여유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크게 기대하지 않으면 크게 실망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볼 때 그들 안에 잠재된 기쁨을 기대하는 대신, 담담해져 버렸다. 사람이 원래 그렇고 그런 거지, 하면서.
---「변해버린 나를 발견한다는 것」중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난 오로지 ‘나’를 위해서 헛걸음도 감수했을 수많은 발걸음을 생각했다. 누군가를 위한 헛걸음은, 그 ‘헛’의 지수가 높을수록 그 사람에 대한 더 높은 수준의 사랑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우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게 아무런 이득이 없고, 심지어 시간 낭비일지도 모르는 일을 기꺼이 한다. 거기엔 합리성이라든지, 효용이나 효율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행동의 동기가 전혀 다르다. 내게 헛일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 사람의 마음 하나만을 위해 기꺼이 동참하는 일. 그 바보 같은 일이 누군가를 향한 가장 순수한 마음에 가깝다는 건 참 아이러니하다.
---「헛일을 함께해주는 이」중에서
내게 헌책방을 운영하는 외삼촌이 있고, 그 헌책방엔 언제라도 내가 기거할 수 있는 방이 있고, 그 방엔 곰팡이 냄새가 떠돌고, 또 누워서 손만 뻗으면 책탑을 쓰다듬을 수 있었다면! 잠이 오지 않으면 상처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뽑아 읽으면서 나의 통증을 우주로 쏘아 올리며, 인간의 보편적 고뇌와 근원적인 아픔 따위를 더듬어볼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내가 지금보다는 균열이 적은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그 균열들을 보수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조금 아낄 수 있지 않았을까.
---「헌책방을 운영하는 외삼촌이 있다면」중에서
예전엔 정원에게 나를 투영하곤 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내 처지가 ‘다림’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흠모하던 상대가 갑자기 죽지 않아도, 모든 사람은 다림이 겪었던 과정을 천천히 경험한다. 설레는 초록으로 가득 찬 정원을 걷다가 문득 내가 서 있는 곳의 색이 달라졌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설렘과 미숙함이 삶을 꽉 채우고 있던 날은 지나버렸고, 그런 날은 다시 오지 않으며, 이제 추억 속에만 존재한다는 걸 알아버린다. 내 젊은 날의 사랑 이야기들은 채 피지 못한 꽃봉오리로 겨울 한설에 얼어버렸다는 걸 깨닫고는, 다림이 그랬던 것처럼 한숨 쉬며 애꿎은 추억에 돌을 던지는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어쩌면, 황량한 겨울 풍경 속에서 여름의 풍요로웠던 기억을 반추하며 쓸쓸히 서 있는 사람, 미숙하고 설레는 연애와 사랑은 이제 삶에서 죽어버린 걸 깨닫게 되는 나 같은 사람을 빗댄 준엄한 메타포가 아닐지.
---「8월에 부는 바람 속에서」중에서
어린 날엔 ‘내 아픔 아시는 당신’을 찾아다녔던 것 같다. 그가 친구든, 연인이든 말이다. 나와 친한 친구나 사귀었던 사람 중에는 남부럽지 않을 ‘아픔’이 하나쯤 있는 사람이 많았다. 뭐, 그렇다고 해서 내 친구들은 죄다 상처투성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본능적으로 아픔이 있는 친구와 더 깊은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고나 할까. 아픔을 나눈다는 건 곧 비밀을 나누는 것이다. 비밀을 나눈 친구는 그들 둘레에 단단하고 아늑한 막 하나를 더 가지게 된다. 연약한 사람들,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 기대는 광경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강한 이유를 보여준다. 나 강하다고 선전하는 인간, 젠체하는 인간은 잠시 부러움을 살 순 있어도 아름답게 느껴지진 않는다. 약해빠져서 서로 기대도록 만들어진 게 인간의 본질에 가깝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장님이 앉은뱅이를 업고 가는’ 그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고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상처가 안도감으로 변하는 순간」중에서
난 아직도 실없고, 심심하고, 외롭고, 어색하고, 무안하고, 조마조마할 때 웃고 싶은데. 나도 그런 순간에 둘러싸여 있다는 걸 들키고 싶은데. 나이 먹은 나는 그런 순간들을 들키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 철벽 수비 전술만 경기 내내 구사하는 축구팀처럼 답답하고 재미없는 일상이 이어진다. 허술하게 보이면 사람들이 쉽게 다가오리라고 의미를 부여했던 청년기는 어디로 가고, 쉽게 보이는 순간 인생이 피곤해진다, 는 근본 없는 철학이 내 삶을 잠식하고 있다. 웃는 법을 완전히 잊기 전에, 입꼬리 주변 근육들을 부지런히 문질러야겠다. 잃어버린 ‘실없음’을 다시 주워 들고, 가려왔던 허술함을 만방에 공표해야지. 아, 생각만 해도 설레고… 피곤하다.
---「웃는 게 쉬웠는데」중에서
중고 서점을 드나들며 행복해하는 사람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 걸까. 굳이 새것이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은 헐렁한 사람. 어쩌면 (생전 읽지 않을지도 모르는) 중고책을 사면서 돈을 아꼈다고 착각하고, 책을 책장에 꽂으면서 나의 인문학적·지적 역량에 양분을 공급했다고 착각하고, 시간이 빌 때 언제든 갈 곳이 있다고 ‘착한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래, 착한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을 쥐어짜거나 약물을 복용하지 않고도 행복을 누릴 줄 아니까.
---「두 남자의 어느 저녁」중에서
내가 사랑하는 소설,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09)에는 우리 모두 가슴에 새겨야 할 문장이 나온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글쓰기를 사랑하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태도가 여기 있다. 난 컨베이어 벨트 옆에서 무심한 얼굴로 능숙하게 나사를 돌리는 제조공처럼 글을 쓰길 원한다. 내 기분과 상관없이, 소에 쟁기를 연결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논으로 나가는 농부처럼 쓰길 원한다. 뭔가 느낌이 오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틈만 나면 앉아서 글을 쓰는 사람. 그냥 단순노동하듯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사람은 글쓰기 행위에 어떤 기분이나 감정도 개입되지 않는다. 다만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백지를 향해 전진할 뿐이다. 백지에 한 고랑, 한 고랑 쟁기질을 하는 것이다.
---「극한 글쓰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