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할리우드 영화에서 나올 법한) 비유를 들어 보자. 당신이 당신의 어떤 부분 ― 가령 피부색이나 코의 모양, 당신이 믿는 종교 따위 등등 ― 을 열정적으로 싫어해 당신을 죽이고자 하는 광신도들에게 쫓기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이 온통 당신에게만 관심을 집중해 쫓아오는 상황에서, 당신이 도망치며 약간의 돈을 뿌리자, 그들은 각자 땅에 떨어진 지폐들을 진지하게 주워 모으기 시작한다. 도망치면서 당신은 그 깡패들이 이처럼 선량한 자기 이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일반화에 능숙한 이론가는 이 사례를 폭력적인 정념이 부의 추구라는 해롭지 않은 이익의 추구로 인해 억눌리는 보편적 현상의 한 사례 ― 그것도 적나라한 사례 ― 에 지나지 않는다고 언급할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초기 옹호자들은 자본주의의 이 같은 점에 갈채를 보내고 있었는데, 이 통찰력 넘치는 소책자는 바로 이 점을 주제로 삼고 있다.
_아마르티아 센의 서문 중에서
자본주의가 막 출현했을 무렵, 몽테스키외와 제임스 스튜어트 경을 비롯한 당대의 주요 사상가들은 온화한 상업이 사람들의 길들여지지 않은 야만적 정념을 길들여, 사회를 온화하게 만들 것으로 기대했다. 이해 타산적인 상업의 정신은 정직함과 신중함, 분별력 등에 기반해 있기에, 사람들도 이런 습성을 내면화해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은 심리적·도덕적 성향을 가질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이로부터, 온화한 상업의 확대는 전제정을 막고, 온화한 정치와 합리적 국정 운영으로 이어지리라는 기대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렇게 자본주의가 막 등장할 무렵, 그 옹호자들은 상업의 이런 측면에 기대어, 자본주의의 출현을 반기고 정당화할 수 있었다. 곧 경제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야만적 정념을 길들인다니? 몽테스키외 이후, 자본주의의 역사와 현실을 생생히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의 시각에서 볼 때, 이는 매우 허황된 예측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기적 사익 추구에만 매몰된 일차원적 인간들. 무분별한 환경과 자원의 남용. 물질적 이해관계를 추구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정치가와 국가들.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욱 악화되어 가기만 하는 부의 재분배 문제 등등.
하지만, 좀 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날에도 경제 발전이 정치와 사회의 발전을 이끌고 안정을 낳는다는 견해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전후, 현대자본주의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케인즈는 물론이고, 현대 민주주의론의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놓은 조지프 슘페터 역시 (이 책의 저자인 허시먼이 이런 대가들 역시 과거의 논쟁들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고 한탄했듯이) 이 같은 견해를 펼쳤고 옹호했다. 좀 더 최근인 1970년대와 1980년대 각광을 받았던 주요 민주화 이론들 역시 경제 발전이 정치적 발전과 민주주의를 가져온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21세기인 현재에도 이런 구호가 여전히 유행하고 있다. “문제는 경제야, 이 멍충이들아!” 자본주의를 옹호했던 초기의 예측과 기대는 깨졌지만, 불사조처럼 또 다시 등장하는 기대와 처방들.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일까?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앨버트 O. 허시먼의 『정념과 이해관계』는 17~18세기에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상가들 사이의 치열하면서도 눈부신 논쟁들을 되짚어 가며, 왜 오늘 우리는 자본주의가 막 등장했을 무렵, 상업의 확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이 논쟁에 주목해야 하는지, 그간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고, 그랬기에 우리가 반복해서 범하는 착각은 무엇이었는지를 차분하게 독자들에게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