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포기의 배추나 몇 뿌리의 무가 주는 영양 이상의 영양가를 이 한 송이 꽃에서 찾을 줄 안 그 마음의 여유와, 또 좋은 꽃을 내 뜰에서 나 혼자만 보지 않고 여러 사람이 같이 보며 즐기겠다는 그 마음의 아름다움이 내게는 그렇게 신기해서 아침마다 그 꽃을 차창으로 허리를 굽혀 내다보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여유, 이러한 마음의 아름다움이 요즘 세상엔 귀한 것 같다.
내가 아침 우리 집에서 이 차를 타고 신촌 E대학에까지 이르는 30분 동안에 길 좌우에서 나는 실로 적지 않은 수의 교회당들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가톨릭 성당도 있고, 신교의 예배당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정글처럼 날카롭게 하늘을 찌를 듯한 교회 첨탑들을 본다.
거리 동마다 파고들려는 이 교회당 속에 정비례하는 것이 신앙심이라면, 시민들은 좀 더 착해졌어야 할 것이련만, 그런 흔적은커녕 ‘악의 꽃’이 점점 더 만발하는 것만 같다.
--- p.29, 「언덕의 왕자」 중에서
나는 가끔 남대문 장이나 동대문 장엘 가는데, 갈 때마다 나는 참 좋은 교훈을 받아 가지고 온다.
특히 그것은 속셔츠니 군복 바지니 이런 것들을 한 사람 앞에 조금씩 놓고 파는 골목에서다. 그들이 장사를 하고 있는 바로 그 옆골목에서는 양단이며 빌로도며 나일론 등을 수십 필씩 쌓아놓고서는 분세수를 곱게 하고 자 질을 할 때마다 팔목의 순금 팔찌가 싯누렇게 내다보이는 포목상 부인네들에게다 비기면 그들의 자본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를 들를 때마다 저들은 번번이 웃음꽃들을 피우고 있다. 그 얼굴엔 한 사람도 궁기라든가 수심이라든가 근심하는 빛을 찾을 수 없다.
따져 본다면 그들에게 유달리 늘상 이렇게 즐거워 있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의 그들의 처지란 남의 집 협호에가 들어서 잘해야 방을 하나 둘 빌려 살고 있을 것이 뻔하다. 그런데 그들은 즐겁게 웃으며 산다. 아침이면 일어나는 길로 미군 종이 상자에다 물건을 넣어 가지고 눈을 비비며 남부여대 집을 나와 가지고 이렇게 장사를 하다가는 또 그 굴속 같은 방으로 물건을 가지고 기어들어가는- 이런 생활에서도 그들은 저 벼슬아치들이 부럽잖게 재미나게 즐겁게 사는 것이다.
공산당들이 맨몸뚱이로 내쫓았으나 이들은 이것을 이기고 살아 나와 오늘 또 이렇게 명랑하고 즐겁게 살아 나간다. 이들에게는 훌륭한 내일이 반드시 또 있다. 승리자의 얼굴을 나는 이 여인들에게서 발견한다. 웃으며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은 곧 또 이겨 나가는 사람들이다.
--- p.410, 「이기는 사람들의 얼굴」 중에서
나는 봄꽃 중엔 진달래가 제일 좋다. 이는 꽃 자체보다도 어릴 적 이야기를 함께 가진 연유일 게다.
살구꽃을 서울처녀라 한다면 진달래는 촌처녀다. 그는 장미나 백합과 그 운치가 또 다르다. 장미나 백합을 꽃병에 꽂아 보라. 그는 얼마든지 화병에 어울리게 멋들어질 수 있을 것이나 진달래를 꺾어다 놓아 보라. 화병에 어울리게 꽂아놓을 재주가 없을 게다.
그는 오직 산에서 빛난다. 이렇게 진달래를 좋아하면서도 해마다 봄이면 꽃집에나 가서 꺾어다 놓은 것 아니면 산에 갔다 오는 사람들의 손에 몇 가지 들려진 것을 본 외에는 봄직하게 산에 피어 있는 것을 근자엔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 p.20, 「진달래」 중에서
코 없는 얼굴을 그려준 개성이 심한 여류화가요, 또 기막히게 멋진 시인 1인 2역의 재녀才女 마리 로랑상을 나는 전부터 참 좋아했다. 그는 산양(山羊)의 얼굴 같은 여인상을 그의 시작품에다 그려놓아 나는 그의 시와 함께 그림을 보며 마음으로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일전 어느 책에서 그의 사진을 보고는 놀랐다. 발자크가 조르쥬 쌍드를 보고 “저것도 여자냐?”고 “남자가 되려다 여자가 된 사람”이라고 했다더니, 정말 나도 그 순간 이와 같은 말을 마리 로랑상에게 할 수 있다. 키는 6척이 넉넉할 성싶고 머리는 송낙을 쓴 것 같은 모양이 어디로 보나 여장(女裝)을 한 남자지 여자 같지는 않았다.
--- p.39, 「마리 로랑상과 그 친구들 」 중에서
언제 찾아도 좋고 또 언제나 내가 찾을 수 있는 친구는 독서다. 읽다가 싫증이 나면 집어던지고, 그런가 하다 보면 또 눈이 충혈이 되어 가며 밤을 새워 글 읽기에 반하는 적이 있다.
세상의 온갖 화려한 것을 다 갖다 놓고 나를 그 속에 넣어 놓는 데도 내게서 책을 뺏어 치우고 독서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절대의 금령(禁令)이 내려진다면 단연코 나는 거기서 도망을 계획할 것이다. 독서를 못하면 머릿속에 말할 수 없는 공허를 느낀다. 내 평생의 소원이 마음에 드는 좋은 책들을 천정까지 닿게 쌓아놓고 읽고 싶은 책을 실컷 읽다가 여생을 마친다면 무슨 또 여한이 있을 것 같지 않다.
--- p.184, 「내 한 가지 소원이 있으니」 중에서
나는 헌 책사(冊肆)에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가끔 그 책의 내용이 좋아서보다도 책 꾸밈새가 재미있어서 사 들고 들어오는 수가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는 장정에 특별히 유의를 해 주는 화가가 드물기 때문에 책을 낼 때면 나중에 가서 이 장정 때문에 머리를 써야 하는 데서이지만 어쨌든 시집을 펴보다가 여백을 많이 남기고 짠 것을 보면 좋아서 냉큼 사드는 것이 내 버릇이다. 활자를 한 편으로 몰고라도 종이의 공간을 많이 남겨놓은 것은 재미있다.
여백…. 이 얼마나 좋은 말이냐! 아니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 빈틈없이 빽빽한 것은 정말 딱하다. 인생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도 이 여백은 있어 좋은 것이다. 여백의 즐거움이 하필 책 생김새에서만 머무를 것이랴. 이 여백이 없어서 우리는 모두 눈물에 핏발이 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 p.186, 「여백」 중에서
서로가 나누인다는 것은 하나의 매력 있는 일일 수도 있는 것 같다.
먹기 싫은 음식을 두었다 먹는 일이라든지, 또는 결혼 생활의 권태라는 위험천만한 시기에 바야흐로 부딪쳤을 때, 슬기로운 부인은 마주 으르렁거리는 대신에 재빠르게 트렁크를 집어 들고 어떤 여행을 계획하던 나머지, 하다못해 친정에라도 가는 것이 모두 이 이치와 통하는 일이다.
하루하루 떠날 날이 다가선다. 거기 따라서 나는 하루라도 될 수 있으면 이 집과 같이 해 주려고 일찍 집으로 들어온다. 집 뒤의 녹음이 나날이 짙어져 한창 펴가는 처녀처럼 탐스러워진다. 모든 것이 이같이 아름답게 보임은 다름 아닌 분명 작별을 하는 까닭일 게다. 그러고 보면 작별은 또 하나의 아름다움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새삼스럽게 아름다워 보이고 그리워지고 이해도 가질 수 있게 되고 동정(同情)을 보내게 되는 일이 이것으로써 생길 수가 있다면 사람들이 구태여 이것을 거부할 까닭도 없지 아니한가.
--- p.243, 「작별은 아름다운 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