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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걷는사람 시인선-030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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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1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49쪽 | 164g | 125*200*20mm
ISBN13 9791189128968
ISBN10 1189128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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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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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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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파 고구마를 삶는다
냄비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고구마가 익는다
다 익었나 싶어 젓가락으로 고구마를 찔러 본다
들어간다
고구마는 울지 않는다
나도 가만히 있는다
고구마를 맛있게 먹으려면 고구마 속울음이 다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흰 뱀 두 마리가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내 발을 물었다
어떤 고통은 가장 깊은 곳에서 오히려 고요하다
제 울음을 품은 채 고구마가 익어 간다
찔러둔 내 젓가락을 끝까지 다 받아 주면서
---「고구마」중에서

내게 밥을 줘야 할 백반집 아주머니가
식탁에 엎드려 자고 있다
빈 소주병이 두 개
숟가락 담긴 국밥 투가리
귀잠에 든 듯
아주머니 아주머니 낮게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 어떤 피로와 슬픔의 파도가
저를 여기까지 밀고 온 것인지
혼곤한 잠으로 거대한 입 하날 버티고 있다 틀어막고 있다
다 놔버리고 싶어도 놓아지지 않는 것
여인이 환하게 웃는 달력 아래
영산홍 한 그루
붉은 밥 한 상 조용히 차려 놓고
너도 배가 고프냐
말없이 묻고 있다
---「거대한 입」중에서

늙은 남자의 코 고는 소리 들린다
매일같이 들린다
아버지는 벌써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를 피해
고향 떠나 서른 군데도 넘게 이사를 다녔는데
아버지는 태연히 코를 골며 주무시네
아버지는 가난하여 손수 시체를 끌고 산으로 가셨다 했지
아버지의 시체를 끌고 선산으로 가는 말들을 난 그냥 지켜보았어
그 늙은 말들, 장례 행렬에 줄줄이 서 있던 의심스러운 마귀할멈들은 어디로 갔나
아차, 뒤늦게 늦었다며 맹렬히 달려가도
선산은 언제나 비어 있고
아버지는 내 곁에서 코를 골며 주무시네
그때 그 의심스러운 마귀할멈들,
아버지와 붙어먹고 어머니와 대판 싸우던
째보할멈한테서 시신을 빼앗았어야 했는데
빼앗은 아버지의 살을 우그적우그적 씹어 먹고
내가 아버지가 되었어야 했는데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 대가가 너무 크구나
---「불편한 잠」중에서

어머니는 자꾸 숨겼다
처음에는 옷장 속에 쌀통 안에 보일러실에 돈을 숨기더니
새로 산 신발을 숨기고 시금치 씨를 숨기고
호미를 숨기고 얻어 온 옆집 똥거름을 숨기고 호미도 숨기고
커다란 빨래 건조대까지 숨겼다
선산에 묻힌 아버지를 숨기고
부산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막내 이모를 일본 대마도에 숨겼다가
우리에게 들키자 다시 내 여동생 속에 꼭꼭 숨겼다
(…)
오늘은 저 바다에 무엇을 숨겼을까
선창가에서 올라오는 어머니 뒤로
서쪽 바다가 시뻘건 노을에 뒤덮여 있는데
어머니가 거대한 황혼을 뒤로하고 난데없이 숙제를 낸다
내 좀 찾아봐라 온 동네를 다 뒤져도 안 보인다
---「황혼」중에서

모두가 떠나간 곳에서
꿈도 바닥도 없는 곳
너의 대답도 아무 대책도 없는 곳에서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모든 일이 기적이었지
첫눈 한 송이
옛날 순댓국집에 피어오르던 김발
부용천변에 마른 갈잎 흔들리는 일조차
기적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었지

어느 해 초겨울
국화분을 들고
널 찾아간 적이 있었지
오뎅 국물 세 컵을 다 마실 때까지
아무도 네가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지 않았어
그냥 북쪽으로만 갔다고 했지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의정부북부역이 어디냐고 물어도
사람들은 묵묵부답

아무래도 나는
좀 더 북쪽으로 가야 할 것 같네
---「의정부북부역」중에서

요즘은 책이 싫고 공책이 좋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마음에 터럭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공책을 읽자
그냥 책은 읽지 말자
공책에는 수많은 말들이 있고 이미지가 있다
꽃이 있고 바람이 있고 아이들이 자라서 걸어오고 있다
양파 한 알에도 공책이 있다
내 몸 어딘가에 잘 익은 침묵이 있듯이
까도 까도 공책이 있다
---「공책이 없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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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는 남양주에서 이웃으로 살았다. 장현리와 퇴계원의 선술집들 생각난다. 외로움을 잔에 나누면 즐거워졌다. 교수가 되었다가 학교에서 밀려나 그대는 목수가 되었지. “살림집”과 “귀신집”을 지었다. 가난한 시인을 그리 밀어내는 곳은 살 만한 곳이 아닐 거다. 내가 남으로 떠났다가 다시 가 만났을 땐 큰 병과 싸우고 있었지. 시집은, 아픈 몸의 음악이 흐르는 착란의 무대 같다. 맹렬하고 섬세한 심금이 울고 있다. 그대는 현대의 무당, 타는 피의 광기로 존재와 세계에 뚫린 구멍에 맞선다. 어긋나고 방향 없는 무의식의 말들은, 천지간의 환상을 횡단해 윤회의 피 묻은 시간 운동을 끊고 다른 시간을 만나 새로 태어나는 중이다.

귀신과 귀신 소리들을 다 불러 모아 텅 비어 충만한 “공(의)책” 속으로, “눈물의 마니보석이 둥둥 떠다니는” 화엄 세상에 닿으려는가. 잘 못 보고, 잘 못 듣고, 잘 걷지 못하는 몸. 그러나 다른 곳을 보고, 다른 것을 들으며, 어딘가로 가는 시의 몸이 여기 있다. “희망이 있다고도/없다고도/말해선 안 된다” 중얼거리며, 그 몸은 우리 몰래 울고 웃는 중일 거다. 그대는 모두를 대신해 앓아 온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그대와 함께 나을 차례이겠다.
- 이영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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