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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시선-452이동
정현우 | 창비 | 2021년 01월 1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8 리뷰 19건 | 판매지수 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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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1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56쪽 | 198g | 128*188*9mm
ISBN13 9788936424527
ISBN10 893642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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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기형의 바닷바람,
얼음나무 숲을 쓰러뜨려도
그칠 수 없는 눈물이
갈비뼈에 진주알로 박혀 있다는 생각
그것을 꺼내고 싶다는 생각
내가 태어났을 때
세상의 절반은
전염병에 눈이 없어진 불구로 가득했다.
---「세례」중에서

눈 내린 숲을 걸었다.
쓰러진 천사 위로 새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천사를 등에 업고
집으로 데려와 천사를 씻겼다.
날개에는 작은 귀가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귀를 훔쳤다.
귀를 달빛에 비췄고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다.
두 귀,
두개의 깃.
인간의 귀는 언제부터 천사의 말을 잊었을까.
---「귀와 뿔」중에서

두 눈은 울기 위해 만들어졌지,
인간은 가장 말랑한 슬픔을 가지고 있어서

(…)

죽은 이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내겐 운,
슬픔을 가진다는 것 또한 인간이 되기 위한
경우의 수,

천사는 생각해, 마음껏 울어도 돼 그래도 돼
얼마나 많은 슬픔을 깨뜨려야
사람이 인간이 될까
---「유리 주사위」중에서

간밤의 꿈을 모두 기억할 수 없듯이, 용서할 수 있는 것들도 다시 태어날 수 없듯이, 용서되지 않는 것은 나의 저편을 듣는 신입니까, 잘못을 들키면 잘못이 되고 슬픔을 들키면 슬픔이 아니듯이, 용서할 수 없는 것들로 나는 흘러갑니다. 검은 물속에서, 검은 나무들에서 검은 얼굴을 하고, 누가 더 슬픔을 오래도록 참을 수 있는지, 일몰로 차들이 달려가는 밤, 나는 흐릅니까. 누운 것들로 흘러야 합니까.
---「슬픔을 들키면 슬픔이 아니듯이」중에서

사람의 마음과 마음 사이
폭설을 내려주시어
들어갈 수 없는 길을 알게 하소서.
한토막의 슬픔으로
무너진 사람이
혼자 걷는 눈길을
사랑이라고 말하게 하소서.

눈과 눈 사이 거스를 수 없는 빛을
눈빛이라 부릅니까.
서로의 눈을 닫으면
슬픔만을 가져갈 수 없음을
---「겨울의 젠가」중에서

우리는 수저 없이 밥을 떠먹습니다.
손이 없어도 나는
가장자리 잎을 흔들 수 있고
밥상에 달그락거리던 저녁을 훔칠 수 있고
모든 고백이 떠밀려오는 겨울밤
아무 일 없이 마주 앉아
식은 뭇국을 떠먹으면,
죽은 그대를 불러와
나란히 수저에 얼굴을 올리면
나는 목이 멥니다.
배고픈 나의 심장을 내밀어보면서
오른손으로 수저를 들어보면서
고개를 숙여 목구멍으로 허겁지겁
주검들을 넘기다가
아, 나는 뜨거워
왼쪽과 오른쪽 슬픔의 얼굴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창가에 날리는 쌀알만
꼭꼭 씹어 뱉어내고 싶었습니다.
---「밥알을 넘기다 수저를 삼키면」중에서

깨진 거울은 나무가 되고 잠들이 무너지는 밤, 조등이 내게 걸어오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휘파람을 붑니다. 밤과 잠을 그리며 새들은 나와 나란해집니다. 설명되지 않은 것 따위 겁이 나지 않느냐고 돌아와야 하는 거실은 불이 켜지는데 창밖, 영혼이 하나씩 생겨날 때마다 그믐은 나의 이마를 씻깁니다. 다시 태어날 수 없는 사람들은 별자리로 떠돌다 목을 맨 유성으로 떨어집니다. 서걱서걱 눈발 소리를 견디려 밤새 귀를 기울여도 무너지는 것들만 있어, 이파리들이 눈송이를 비비는 밤길, 양손으로 두 귀를 막고 서서 몇개의 잎사귀가 남았는지 나를 더듬어 확인합니다.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혼은 잎이 진 채 겨울을 납니다. 당신의 잠은 무엇이냐고, 다시 꿈을 꾸어도 되느냐고 사륵, 사륵 눈 결정이 서린 나무가 입술을 글썽이던 삼일이 이내 지나갔습니다.
---「소멸하는 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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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고해록이다. 생의 여분을 거역할 수 없기에 청년 이전의 시간들에 대해 고해하고, 태어났으되 갇혀버린 몸과 명점(命點)에 대해 고해한다. 시인은 조준선 끝에, 그리고 감각의 연장선 위에 신(神)의 선택을 받거나 받지 못한 자신의 운명을 배치한다. 그와 그와는 다른 낯선 자신, 그 둘은 공모하여 그에게 사람의 일이 아닌, 시를 쓰라고 책상에 앉혔다.

시 속에 ‘엄마’가 수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자신을 빚어놓은 대상에게 붙들려 살지도, 대상을 폐기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일 것이고, “신을 받지 않는 내가”(「인면어」) “작두날을 얼굴에 대고 연풍을 돈다”(「강신무」)는 진술은 시인이 첫 시집으로 지은 세계가 발광하는 빛으로 지붕을 올린 날것의 사원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다. “위태로운 것은 아름답”(「항문이 없는 것들을 위하여」)기에 “나의 안쪽을 오래도록 들여다”(「덫」)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따뜻하고 부드럽게, 억세고 질기게 자신의 혈맥에 호소한다. 그 호소력은 자기다움의 소실점을 따르고 있다.

정현우 시인은 이 시집 한권으로 고해의식을 마치고도 경로를 지속하여 더 낮은 것들을 노래할 것이다. 이름을 받지 못해 엉킨 채로 서글프게 떠도는 허공의 회로들과 한 몸이 되어 쓰고, 서로를 태우고 살아갈 것이다.
- 이병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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