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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며든 사랑이 나를 먹여 살렸음을] 고명재 시인의 첫 산문집. 첫 시집으로 사랑을 받은 그가 무채색의 글을 들고 다시 찾아왔다. 온몸으로 나를 아껴주었던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뒤, 그 사랑을 말하기 위한 백 가지 이야기들로. 그의 몸에 스며든 사랑은 시를 낳았다. ‘밝은 것들’을 남겨준 리듬 속으로 들어갈 책. - 에세이 PD 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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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색색마다 거두는 게 사랑이라 … 9
1부│많이 깎을수록 곡물은 새하얘진다 … 21 가루약 … 23 갈치 … 25 검버섯 … 26 검은 닭 … 27 구순암 … 37 기도 … 40 기와 … 42 김밥 … 44 꿈 … 45 눈 … 47 눈보라 … 49 눈사람 … 51 능陵 … 52 능이버섯 … 57 더위사냥 … 59 도라지 … 61 도정搗精 … 62 돌 … 63 돌부처 … 66 동지 … 70 2부│무의 땀은 이토록 흰빛이구나 … 71 두부 … 73 등 … 76 뢴트겐 … 77 막걸리 … 79 메추리알 … 83 목덜미 … 85 목련 … 89 목례 … 90 목탁 … 93 목화 … 95 무 … 96 물티슈 … 99 미농지 … 100 바둑돌 … 102 백묵白墨 … 103 백설기 … 106 백합 … 107 버짐 … 108 병간病看 … 109 부활절 … 110 3부│너무 보고플 땐 도라지를 씹어 삼킨다 … 111 비구니 … 113 빛 … 117 뼈 … 122 사우나 … 124 살 … 126 삼우三虞 … 128 선글라스 … 130 설렁탕 … 131 설맹雪盲 … 133 성체聖體 … 135 소주 … 140 손목 … 141 송이 … 146 수건 … 148 수국 … 149 스티로폼 … 150 슬하 … 153 안개꽃 … 156 안압 … 158 양피지羊皮紙 … 161 4부│날 수 있음에도 이곳에 남은 천사들처럼 … 163 어깨 … 165 연근蓮根 … 167 연탄 … 170 욕조 … 171 우유 … 174 윤潤 1 … 175 윤 2 … 177 윤 3 … 178 윤 4 … 181 시─이야기 1 … 185 빵 ─이야기 2 … 190 겨울 ─이야기 3 … 195 이스트─이야기 4 … 199 반죽 ─이야기 5 … 202 메뉴 ─이야기 6 … 204 입김 … 208 입술 … 209 자개농 … 213 장독 … 214 재 … 215 |
이 글은 순전히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썼던 글이다. 처음 김민정 시인을 만났던 날 그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명재씨는 무채색으로 글을 써보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그때 사실 속으로 많이 놀랐다. 나는 비구니들이 업어서 키운 아이였으니까. 매일매일 회색빛 승복을 보면서 내 무릎은 팝콘처럼 부풀었으니까. 그때부터였다. 그 말이 귀한 씨앗이 되어 무채, 라는 말이 내 안에서 뿌리를 뻗었다. 결국 무채로 쓰다보니, 글이 아니라 사랑의 곳간만 열려버렸다.
이 글은 무채라는 이상한 세계, 이를테면 수녀복과 승복의 회색, 살 아래를 파고드는 뢴트겐의 빛, 흰 뼈의 눈-시림, 할머니의 바늘 끝, 눈사람과 숯과 솥과 우유의 세계다. 영도零度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바르트). 일상 속에 가득한 중간中間의 얼굴. 사랑하는 중음신中陰身, 그리운 사람들, 사랑과 빵과 명랑과 뽀얀 밀가루자루와 눈동자의 색채를 이루는 고요한 세계다. 가끔, 스님은 연락도 없이 과일을 한 박스씩 보내곤 했다. 뜬금없이 집 앞에 배가 주렁주렁 열릴 때 나는 아름다운 그 금빛을 모조리 기억하려다 그런 색채마저 거두는 게 사랑이라 고쳐 믿었다.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 늘어난 속옷처럼 얼핏 보면 남루하지만 다시 보면 우아한 우리의 부피. 매일 산책하는 강변의 기나긴 길과 일렁대는 강물과 버드나무 줄기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그런 아름다운 걸 ‘무채’라고 퉁쳐서 불러보았다. 배앓이를 하듯 자꾸 보고 싶을 때 무채 무채 말하다보면 좀 나아졌다. 죽은 개들이, 인자했던 할머니 손끝이, 그렇게 건너온 저쪽, 너머의 존재와 말들이, 너무 귀하게 느껴져서 쥐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언젠가는 이 사랑도 비울 것이다. 그때까진 용감하게 사랑을 줘야지. 그럼 지금부터 이야기를 해볼까. 색을 열고 색을 삼키고 색을 쥔 채로 나를 키운 사람들의 마음 이야기. ---「들어가며」중에서 그리하여, 언제든 사라져버릴 사람을 우리는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눈사람」중에서 한낮이면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더위사냥을 뚝 반으로 부러뜨렸다. 그러곤 말없이 곁에 와서 내 작은 손안에 반쪽을 쥐여주었다. 나란히 앉아서 사각사각 베어 먹는 소리. 달콤한 빙과로 입술은 끈적거리고. 옥수수보다 이게 낫지? 할머니는 물었고 내가 대답 없이 마주보고 실쭉 웃으면 다음날은 어김없이 옥수수를 삶아주었다. 여름은 그렇게 언제든 반으로 무언가를 잘라서 사랑과 나누어 먹는 행복의 계절. 간혹 나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할머니 몰래 속으로 기도를 하고는 했다. 내 수명을 뚝 잘라서 당신께 주세요. 그렇게라도 좀더 지금일 수 있다면, 조금만 더 느리게 녹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가 지금 이대로의 우리일 수 있다면. ---「더위사냥」중에서 부처는 신적인 존재나 초월이 아니라 비가 오면 흠뻑 젖는 우리 자체다. 나무와 풀과 지붕과 철물은 피하지 않는다. 비가 오면 강물은 고스란히 비를 맞는다. 내가 사랑했던 비구니는 생의 끝에서 병원에 가지 않고 그냥 그대로 살았다. 나는 빌었다. 스님, 제발 병원에 가요. 스님, 제발 곁에서 살아주셔요. 아무 말 없이 검지 하나를 세우고 웃는 것, 그것은 법, 그것은 진리. 살아내는 것. 풀 한 포기처럼 그저 살아내는 것. ---「돌부처」중에서 그러니까 한번은 공기가 될 뻔했었던 증기였던 쌀의 꿈. 곡물의 막바지. ---「소주」중에서 한식 레시피를 가만히 옮겨 적고 있으면 이것은 손에 관한 복음서 같다. ‘정량’이 아니라 ‘사람의 손’이 만져온 것들의 그 부피감을 온전히 믿어보는 것. 조리법이 이렇게 인간적일 수 있다니. 그래서 나는 한식이 좋다. 한의원이 좋다. 실수하거나 맥을 잘못 짚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엎질러지는 무릎이니까. 그릇 밖으로 넘치는 물결이니까.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 잠든 엄마를 옆에서 꼭 끌어안을 때 그 부피, 그 형상, 엄마의 골격. 그 순간 나는 출렁이는 물의 마음이 되어 엄마를 위해 쏴쏴 나를 버릴 수 있다. 사랑은 언제나 부피와 질량 너머에 있다. ---「욕조」중에서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올 것이 있다. 비와 눈은 오는 것. 기다리는 것. 꿈의 속성은 비와 눈처럼 녹는다는 것. 비와 눈과 사람은 사라지는 것. 그렇게 사라지며 강하게 남아 있는 것. 남아서 쓰는 것. 가슴을 쏟는 것. 열고 사는 것. 무력하지만 무력한 채로 향기로운 것. 그렇게 행과 행 사이를 날아가는 것. ---「편지」중에서 |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고명재 시인의 첫 산문!
‘사랑’이라는 이상한 리듬을 말하기 위한 시인 고명재의 무채색에 얽힌 백 가지 이야기!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문학동네, 2022)으로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은 고명재 시인의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출판사 난다에서 펴낸다. ‘사랑’이라는 이상한 리듬을 말하기 위한 무채색에 얽힌 백 가지 이야기를 담았다. 무채색은 색상과 채도가 없고 밝고 어두운 차이만 있는 색을 말한다. 흰색에서 회색을 거쳐 검은색에 이르는 무채색은 그 자체로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색. 있고 없음 사이에서 존재하는 비존재의 색이다. 시인이 살펴본 무채 속 풍경은 사랑이라는 밥솥에서 끓어오르는 밥물과 같다. 누군가를 먹이고 돌보려 먹이는 하얀 밥, 흰살 생선, 밀가루, 두부, 멸치의 은빛, 능이버섯, 간장, 양갱…… 고명재 시인은 이 첫 산문집에서 우리에게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늘어난 속옷처럼 얼핏 보면 남루하지만 다시 보면 우아한 우리의 부피” 같은 사랑을. 나랑 할머니는 둥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엄마가 갖가지 반찬을 만드는 걸 보고는 했다. 특히 나는 엄마가 멸치를 볶을 때 이상한 기대감에 부풀곤 했는데 그건 순전히 멸치의 아름다운 빛깔과 달궈진 팬 위에서의 우아한 궤적 때문이었다. 은빛 멸치를 팬에 올리고 볶기 시작하면 엄마의 손짓 한 번에 얘들이 튀어올랐다. 팬 위에서 차글차글 소리를 내면서 공중으로 휙휙 떼로 날아가는데 그 모습이 자유로운 헤엄 같았다. 저렇게 떼로 움직이며 살아갔겠지. 무엇보다도 나는 멸치의 빛깔이 좋았다. 은화 같은 멸치들이 몇 분 사이에 팬 위에서 금빛으로 눌어붙었다. 그럼 좀, 덜 가난해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럼 좀, 할머니가 덜 슬퍼할 것 같아서 그럼 좀, 환기를 할까요? 명랑하게 말하고 가게 문을 활짝 열고 볕을 쬐었다. 그렇게 삼대三代가 멸치 냄새로 매캐한 가게에서 가슴 졸이며 서로를 훔쳐보았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햇빛, 은빛, 금빛도, 낡은 팬도, 멸치도, 물엿도 할머니 백발도 돌이켜보면 모든 게 햇살 속에 있었다. 그 모든 게 사랑의 풍경이었다. _「빛」 부분 어른도 우는구나 어른도 두렵고 슬픈 거구나 8월의 한여름, 자신에게 너무도 큰 사랑을 주었던 새-엄마, 비구니의 부고를 듣고 시인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어서 아이처럼 울다 깨닫는다. 자신이 슬픔에 빠져 그 사랑을 보지 못했음을. 가진 것 없이도 오래도록 안아준 사람. 아주 느리게 성실하게 그저 걸어가라고. 자신의 몸이 망가질 때에도 사랑만 쥔 채로 내가 쓸 종이의 흰빛을 꿈꾸게 해준 사람. 텅 빈 채로 가득한 소리를 내는 목탁, 나무로 된 심장을 보며 시인은 생각한다. 이별의 순간 그가 전해주었던 가르침은 이별이 완전한 사라짐이나 소멸이 아니라 흙이었던 것의 본래 흙으로 돌아감이라는 깨달음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이야기가 남습니다. 몸이 사랑이 됩니다. 또한 그 이야기와 사랑조차 시간에 녹아 다 사라진대도 우리가 함께했다는 것, 눈부신 그 사실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아요”라고 시인은 신춘문예 당선소감에서 말한 바 있다. 시인에게 ‘눈’은 분명 손바닥에 닿았는데 녹아버리는, 존재와 소멸을 동시에 보여주는 놀라운 물질이다. 이렇게 사라지면서 존재하기에 눈은, 물질이라기보다는 ‘상태’에 가깝다.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시인은 묻는다. 사람의 성분은 뭘까. 왜 빛이 났을까. 어쩌면 사람도 아주 더디게 녹고 있는 눈송이가 아니었을까. ‘언젠가는 꼭 다시 같이 살자’ 내 안에 왜 이리 밝은 것들이 가득한가요 형아, 여기서는 경주가 전부 보이고 큰 나무도 보이고 산도 다 보여. 형아, 가끔씩 난 여기 선 채로 형아도 보인다고 생각해. _「능陵」 부분 동생과 어머니, 아버지와 헤어진 채로 할머니 집에 맡겨진 시인은 그곳에서 시라는 이상한 리듬을 배운다. 그에게 시는 인공관절 같은 것. 안에서 빛나며 느리게 펼쳐지는 것. 돕는 것. 삶을 무릎을 무지개처럼 일으켜 접고 걷게 하는 것. 고명재 시인은 말한다. 자신에게 시란 ‘이 사람이 존재했었다’ 그 빛나는 사실을 드러내는 능인지도 모른다고. 한겨울, 더 견딜 수 없을 만큼 보고 싶을 때 가족을 보러 찾아간 경주에선 마중 나왔던 보들보들한 동생. 그애가 자신을 데려간 눈 쌓인 언덕, 그 왕릉 위에서 잠시 바라본 시간 너머의 풍경처럼. 최소의 말, 최소의 눈빛으로 사랑을 가르쳐준 이는 떠나고 시인은 홀로 걷는다. 그러나 시인은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자신의 등과 어깨를 감싸는 어떤 손길들이 있다. 세상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겨울. 마음의 벼랑에 고드름이 슬고 무릎이 시린 시간, 그런 때야말로 우리가 온기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아름다운 숨, 입김이 보이는 것처럼. 시인에게 조끼는 구구절절한 형식과 장식은 모두 거두고 가장 소중한 것을 데우기 위해 만들어진 의복이다. 조끼는 왼팔 오른팔 거두절미하고서 심장을 감싼다. 뚫린 채로, 구멍 난 채로 사랑을 해낸다. 시인 역시 그러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