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7년 08월 07일 |
---|---|
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572쪽 | 602g | 127*188*35mm |
ISBN13 | 9788937434488 |
ISBN10 | 8937434482 |
발행일 | 2017년 08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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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572쪽 | 602g | 127*188*35mm |
ISBN13 | 9788937434488 |
ISBN10 | 8937434482 |
노르웨이의 숲 9 |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레이코의 말인 '기억의 잔존'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왜 이 책의 내용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예전의 나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한 텔레비전 광고에서 『상실의 시대』를 읽는 장면을 시작으로 닥친 하루키 열풍에 나도 동참했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었는데 국내에 들어오면서 다시 지은 제목이 더 좋았다. 시대에 맞물려 책은 한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가 있었다.
그때로부터 얼마나 지난 것일까. 새롭게 옷을 입고 원래의 제목을 달고 나온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은 지금은 그때보다 색채가 진해졌다. 그래봐야 물을 조금만 섞은 상태로 그린 그림일 뿐이다. 의미를 알 수도 의도를 해석할 수 없는 난해한 그림 속 배경에 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인생의 어두운 면을 알면서 현명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저 예전이란 연필로 대충 그린 그림이었다면 지금은 어떤 색을 칠해야 알지 어렴풋이 아는 정도인 것이다.
하루키의 출세작-이라고 쓰지만 출세작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노르웨이의 숲』의 줄거리를 요약하기란 쉽지 않다. 요약하라면 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열일곱 살에 삶의 굴절을 한 번 겪은 와타나베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서사란 중요하지도 대단하지도 않다. 와타나베와 나오코 그리고 미도리가 겪어내는 청춘의 시절을 따라가는 것으로 독자의 역할은 다 한 것이라 생각한다. 마음속에 꽉 차 오르는 생의 슬픔과 견딜 수 없는 의문의 죽음 앞에서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 나간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에 나는 죽음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죽음은 멀었고 익명이었고 대부분 타인으로 이루어졌다. 인간관계가 풍성한 시점도 아니어서 죽음은 뉴스에 나오는 다른 세계의 일이었다. 그때보다 별로 변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노르웨이의 숲』을 읽은 지금은 적어도 죽음의 빛깔이 어떤지 남아 있는 사람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생의 그림을 그려야 할지는 안다. 와타나베와 나오코, 미도리가 겪어낸 죽음 앞에서 그들이 애도하는 모습을 보며 별일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가는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란 희망과 용기, 긍정으로 가득할 것이라는 예감의 열일곱에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가장 가까운 친구인 기즈키를 잃었다. 기즈키는 와타나베와 당구를 치고 헤어진 그날 자살을 했다. 누구도 이유를 알지 못한 죽음이었다.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대체 그가 왜라는 질문만을 하며 살아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대학에 들어와 우연히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조우했고 서로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시내를 걸어 다녔다.
서른일곱 살의 와타나베는 비행기 안에서 들려오는 「노르웨이의 숲」을 들으며 18년 전의 그날들을 떠올린다. 부디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나오코의 말과 함께 말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지냈던 시간들의 벌이라도 되는 듯 와타나베는 한순간 그 시절로 빨려 들어간다. 기즈키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정리하지 못한 채 대학이라는 공간으로 둘은 내동댕이쳐졌다. 와타나베는 견디는 쪽을 택했고 나오코는 버티다 도망가는 것으로 죽음과 무관해지려고 했다.
시간은 착실히 흐른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방황과 좌절, 불안의 고통을 살았던 시간은 지나간다. 부끄러울 정도로 한심한 자신을 그저 지켜보는 것으로 말이다. 매일 실수를 하면서 살아가는 자신을 견뎌 주는 것. 죽음을 겪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살아가는 것이 아닌 지켜보고 견딘다. 『노르웨이의 숲』은 죽음이 남긴 상실 앞에서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한 사람의 처절한 기록이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 세계에서 버티기로 선택한 그의 시대를 기억한다.
나의 20대는 어떤 모습이었지? 대학엘 다녔고, 회사에 다녔고, 그리고 20대의 끝자락에 결혼을 했다. 나는, 내 청춘은 무엇을 위한 고민을 했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솔직히 가물가물하다. 치열했고, 전쟁 같았고, 찬란했을 거라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 당시엔 그 조차 알지 못했기에 우린 고민하고 고뇌했는지 모른다. 인생에 대해, 결혼에 대해, 사랑에 대해, 미래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들을 하고 있어서... 누군가 내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 물으면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니라고. 다시 수많은 고민들을 안고 살고 싶지 않다고. 그렇다고 지금... 내가 고민 없이 사는 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른 삶의 무게를 안고 살아간다. 젊음은 좋을 수 있지만 이젠 미숙한 건 피곤하다. 지금 완숙함을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때보다 아주 조금 자랐으니 그 자체로 만족한다.
평소 하루키의 소설은 나와 맞지 않는다 생각하는 사람이다. 몽환적이고 난해한 느낌의 그의 소설을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오랜 명작이라고 하는 ‘노르웨이의 숲’은 궁금했다. 그가 써 내려간 청춘에 대한 이야기. 물론 시대적 배경이나 문화가 우리와 달라 100% 공감할 수는 없어도 하나의 생각 거리라도 준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으로 읽어 내려간 책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하루키의 책은 아니 소설은 나와 많이 버석거린다는 거.
와타나베는 고등학교 시절 늘 함께 한 친구가 있었다. 기즈키와 기즈키의 여자친구 나오코. 셋은 만나면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기즈키의 자살로 균열이 생긴다. 열아홉. 와타나베는 도쿄의 한 사립대학에 진학하며 고향을 떠나고 나오코 역시 도쿄로 올라와 대학 생활을 한다. 둘은 가끔 도쿄에서 만나 특별한 연민과 애정을 나눈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나오코는 자신은 지금 요양원에 와 있다며 편지를 보내고, 와타나베는 그곳으로 나오코를 찾아간다. 요양원으로 찾아가던 와타나베는 자신이 나오코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과는 별게로 같은 대학에서 만난 미도리는 나오코와는 다른 매력의 아가씨로 와타나베의 일상에 개입하게 된다. 나오코와는 다르게 발랄하고 명랑하고 거침없는 미도리... 나오코와 미도리 사이에서 와타나베는 아름답지만 위태로운 스무 살의 시간을 살아가는데...
내 스무 살은 확실히... 나오코나 미도리 그리고 와타나베와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겪는다는 스무 살의 혼란도 나는 잘 모르겠다. 또한 이 책이 왜 명작인지도... 확실히 나는 명작을 구분하는 촉이나 느낌이 없는지 모른다. 하지만 남들이 좋다고 나까지 좋은 건 아니지.. 라는 생각으로 책을 덮었다. 하루키 특유의 문장들과 표현들. 어떤 때는 그것들이 참 좋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거북할 때가 있다. 또한 지금처럼 이런 내용이라면 더욱. 청춘이 가진 매력은 다양한 혼란과 다양한 고민과 다양한 사랑일 수 있지만... 청춘이기에 의미 없는 섹스를 즐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왜 이런 표현들이 거북한지 모르겠다. 역시.. 나와 하루키의 장편 소설은.. 맞지 않는 걸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숲을 드디어 만났다. 한동안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몰아서 읽다가 어느 순간 그 숨 막히는 늪 같은 답답함이 느껴져서 내려놓았다. 뭔가 스멀 스멀 엄습하는 무거움이 항상 존재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고, 가끔은 심장이 콕콕 찔리는 느낌이다. 젖은 숨으로 내리 누르는 그 기분을 벗어나고 싶어서 한동안 손 대지 않았다. 그러다가 슬슬 이것 저것 사모으다가 독서모임에서 읽게 되었다. 소설은 워낙 스스로 읽지 않으니 이런 기회가 없으면 언제 읽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모든 상황이 맞아 떨어지면서 지금은 내가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다른 제목은 <상실의 시대>. 왜 제목을 ‘상실’이라고 넣었는지 이해 간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끊임없이 상실한다. 그것도 자신의 인생에서 꽤나 중요하다고 여긴 것들을. (하긴 중요하지 않으면 상실했다고 여기지도 않겠지.) 가장 친하면서 유일한 친구였던 기즈키를 상실했고, 그 뒤 그토록 원하던 나오코도 상실한다. 결국 자신도 상실한 듯하다. 미도리는 가족을 상실하고, 레이코는 가족도 자신도 상실한다. 심지어 나가사와도 결국 자신을 사랑해주던 하쓰미를 상실한다. 그렇게 모두 모두 상실을 경험한다. 우리들은 모두 상실을 경험하고도 살아낸다.
-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454)
‘상실’이라는 건 무언가 완전하다고 느껴지는 내 공간에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그 공간이 비고, 무언가로 채우거나 그것의 비어있음에 적응하기 전까지는 힘들 수밖에. 인생에서 어떤 상실을 어떤 시기에 경험하는가에 따라 그 차이도 엄청날 수 밖에 없다. 와타나베처럼 예민하디 예민한 사춘기 시절 가장 친한 친구가 자살한다는 경험은 쉽게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가 지속적으로 허전함을 느끼는 건 당연할지도. 그 후 그나마 마음을 열었던 나오코의 죽음은 더 할테고 말이다.
-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486)
마지막 페이지에서 미도리와 통화하던 와타나베는 자신이 어디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 잊을 만큼 그는 그를 잊었다. 큰 무언가를 상실하였다. 그가 결국은 그 상실의 고통을 풀어냈는지는 알 수 없다.
-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꼬이고 또 꼬여도 절망적인 기분에 빠지거나 다급한 마음에 억지로 끌어내려 해서는 안 돼. 충분히 시간을 들인다는 생각을 갖고 하나하나 천천히 풀어 나가야만 해. (201)
그는 레이코가 이야기한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풀어갈 생각은 했을까? 책을 다 읽고 1장을 다시 읽었다. 현재의 이야기를 하던 시간으로 돌아와 다시 그의 현재 상태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쪽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모습과 크게 다른 바 없었다. 그는 여전히 상실을 겪고 있었다.
기즈키를 잃은 후 와타나베는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았다. 그냥 살았다. 어떤 이유도 목적도 없이 살아 있기에 살았던 와타나베. 그러다 나오코를 만나고 태엽을 감을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태엽을 감으며 살아있음을 실행한다.
- 자, 오늘도 하루를 잘 살아 보자고 하면서. 스스로는 못 느끼는데 요즘 들어 내가 혼잣말을 자주 한다고들 해. 아마도 태엽을 감으면서 뭐라고 혼자 중얼대는 말일 테지. (335) (중략) 일요일에 나는 태엽을 감지 않는다. (337)
정확하게 그의 태엽 감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살아가지 않다가 살아간다는 의미의 태엽일까, 혹은 스스로를 독려할 필요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어도 되기에 태엽을 감지 않아도 되는 걸까. 현실 세계에서 정상처럼 보이기 위해 살아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태엽 감기 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맥락인 듯 하지만, 미묘한 차이에서 그는 살아있음을 전제로 하는지, 살아 있지 않음을 전제로 하는지가 달라지는 것 같다.
레이코에게 태엽은 멈추는 것, 살아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 이 사람에게 맡겨 두면 안심이라고, 조금이라도 내가 이상해지면, 태엽이 풀어지기 시작하면, 이 사람이 금방 알아차리고 참을성 있게 정성을 다해 나를 고쳐 줄 거라고, 태업을 다시 감고 얽힌 실타래를 풀어 줄 거라고 말이야, 그런 신뢰감이 있으면 병은 재발하지 않아. (209)
자신이 자신 그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가 태엽이었다. 자신이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서, 온전히 제대로 잡고 살고 있기 위해서는 필요시마다 태엽을 감아야 했다.
나에게도 태엽이 있을까? 평소에 나는 살아 있을까? 죽어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이유로 태엽을 감아야 할까? 그리고 태엽을 감을 수 있는 건 나 자신일까? 혹은 내가 상실한 그 부분일까? 나는 상실을 감당하고 있는가? 상실을 외면하고 있는가? 레이코씨의 말대로 나는 상실을 하나씩이라도 풀 생각은 하고 있을까
글로 풀어내기가 참 어려운 책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 잘 모르겠다. 게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더더욱. 죽음과 상실, 섹스와 삶. 여러 요소를 통해 무엇을 난 더 생각해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