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3년 09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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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768쪽 | 836g | 128*188*40mm |
ISBN13 | 9788954699075 |
ISBN10 | 8954699073 |
작가 포스터/포함 국내도서 3만원 ↑ 하루키 블랙 머그 증정(개별 포인트 차감)
발행일 | 2023년 09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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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768쪽 | 836g | 128*188*40mm |
ISBN13 | 9788954699075 |
ISBN10 | 8954699073 |
MD 한마디
[6년 만의 하루키 신작 장편소설]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첫 발표 후 30대의 하루키가 70대가 될 때까지 마음에 품어왔던 소설이 43년 만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하루키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정도로 하루키 월드의 시작이자 완성이 될 완벽한 소설. - 소설/시 PD 김유리
1부 009 2부 221 3부 697 작가 후기 762 |
‘너’를 찾기 위한 이유의 세계가 ‘나’의 존재를 이해하는 세계로 변화해갈 때,
나는 마침내 새로운 우주를 얻게 되었다!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내가 열일곱 살이고, 네가 열여섯 살이었던 그 여름. 너는 나에게 8m 남짓의 견고한 어느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냇버들이 늘어진 아름다운 모래톱이 있고, 외뿔 달린 과묵한 짐승들이 곳곳에 있는 도시의 사람들은 오래된 공동주택에 살면서 간소하지만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한다고 했다. 하나뿐인 출입구에는 문지기가 지키고 있고, 벽은 견고해서, 특별한 자격이 있지 않다면 자유롭게 들어갈 수 없으며 따라서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도 없는 그곳에서 너는 ‘오래된 꿈’을 보관하고 지키는 일을 한다고 했다. 진짜인 네가.
‘너’를 찾기 위한 이유의 세계가 ‘나’의 존재를 이해하는 세계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어느 특별한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너’가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너’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그 도시에 가면 ‘진짜 너’를 만날 수 있을까. 물론 그곳은 둘이 함께 만들어간, 상상 속의 특별한 비밀 세계에 불과하겠지만, 그동안 ‘너’가 들려주었던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묵묵히 기록하며 ‘진짜 너’를 만날 수 있는 날만을 상상해왔던 ‘나’는 어찌된 일인지 정말로, 마침내 그 도시에 입성하게 된다. 대체 이 도시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너’를 만날 수 있을까.
“난 머리맡에 공책과 연필을 챙겨두고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지난밤 꿈을 기록해. 시간에 쫓겨 바쁠 때도 마찬가지야. 특히 생생한 꿈을 꾸다가 한밤중에 깼을 땐 아무리 졸려도 그 자리에서 최대한 자세하게 적어줘. 그것들이 중요한 꿈일 때가 많고. 소중한 것들을 많이 가르쳐주거든.” / 42p
“가끔 내가 무언가의,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너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듯 말한다. “여기 있는 나한테는 실체 같은 게 없고, 내 실체는 다른 어딘가에 있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언뜻 나처럼 보여도 실은 바닥이나 벽에 비친 그림자일뿐……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어.” / 111p
김연수 작가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 속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고 바뀔 수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너’를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과 ‘너’를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로 인해 벽을 둘러싼 가상의 도시, 아니 실제할 지도 모를 세계 속으로 이행된 ‘나’가, 이제껏 정면으로 마주해본 적이 없는 자신의 그림자와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획득해가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너’를 찾기 위한 이유의 세계가 ‘나’의 존재를 이해하는 세계로 변화해갈 때, 나는 마침내 새로운 우주를 얻게 되는 것이다.
경계를 넘어, 나를 쪼개고 부단히 이행함으로써 다른 나와 만나는 것은 ‘나’라는 존재의 가장자리를 끊임없이 늘리는 일이다. ‘이쪽’과 ‘저쪽’ 사이, 완전함과 불완전함 사이,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오가는 동안 ‘나’는 어느 누구와도 같은 세상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자기만의 속도와 방향이라는 것을 감각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어쩌면 내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그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든 그 자체로 ‘나’라는 것. 그 어디에 있든 나를 받아주고, 온전히, 무조건적으로 받아줄 사람이 존재하리라는 사실을 믿는 데 있다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하루키의 메시지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곳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 마음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장소여야 합니다.”
“가끔 저 자신을 알 수 없어집니다.”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혹은 잃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 인생을 저 자신으로, 저의 본체로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들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그저 그림자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그런 때면 제가 그저 나 자신의 겉모습만 흉내내서, 교묘하게 나인 척하며 살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집니다.”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 고야스 씨가 나지막히 말했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 452p
“당신의 생년월일을 알려주시겠어요?”
이 책을 읽고 소년의 질문을 따라 내가 태어난 날은 무슨 요일일까를 검색해보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아쉽게도(?) 나는 금요일이었다. 수요일이신 분들은…… 음……. 그냥 여기서 생략하겠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럼에도 “첫째로는, 이렇게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 네, 왠지 내가 아름다운 시의 몇 행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랍니다.”란 글귀를 쓸 수 있는 이 작가의 글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설의 뒷부분에서 하루키는 느닷없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라는 소설 얘기를 한다.
“그의 이야기에는 현실이 비현실이,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이 한데 뒤섞여 있어.” 그녀는 말했다. “마치 평범한 일상 속의 일들인 것처럼.”
“그런 걸 매직 리얼리즘이라고들 하더군.” 내가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비평적 기준으로는 매직 리얼리즘일지 모르지만, 가르시아 마르케스 자신에게는 이런 이야기 방식이 지극히 평범한 리얼리즘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해. 그가 살던 세계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이 지극히 일상적으로 혼재했고, 그런 풍경을 보이는 대로 썼던 게 아닐까.”
어색한 장면이다. 내용이 그런 게 아니라, 별로 문학에 조예가 깊어 보이지 않은 역 앞 이름 없는 카페의 30대 여주인의 입에서 나온 얘기라서 그렇다. 그만큼 하루키는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이 이야기가 바로 그런 얘기라는 것처럼. 분명 비현실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그게 바로 리얼리즘이라는...
현실과 비현실이 오간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전개되면 될수록 어느 쪽이 현실인지, 어느 쪽인 비현실인지가 애매해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열여섯, 열일곱 살 풋풋한 감성으로 소녀를 만나 연정을 품었던 이야기가 현실이고, 어느 순간 벽이 높게 쳐진 도시에 들어가 그림자를 떼어 놓고 ‘꿈을 읽는 일’을 하게 된 것이 비현실 같아 보인다. 그러고는 그림자가 도시를 탈출하는 데, 그 후의 얘기는 내가 갑자기 그 도시 밖으로 나와 회사를 다니고, 시골 마을의 도서관장이 되고 하는, 멀쩡한 현실의 얘기처럼 보인다. 물론 여기서도 죽은 사람과 얘기를 나눈다든가 하는 비현실적인 얘기가 있지만, ‘나’라고 하는 인물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다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이야기가 된다. ‘나’는 여전히 그 도시에서 ‘꿈을 읽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고, 그림자는 무엇인지가 불분명해지는 것이다.
바로 그런,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하루키는 얘기하고 싶었으리라 짐작한다. 마치 ‘호접몽(胡蝶夢)’처럼 말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 즉 지금 이렇게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이 점하고 있는 세계가 과연 ‘나’라는 인간의 본질이 속해있는 세계인가, 아니면 또 다른, 아니 진짜 나의 자아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런 질문을 던지기는 하지만, 실은 그런 질문이 별로 의미 없다고도 얘기하는 게 이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것처럼, 그런 구분이 실상은 가능하지 않은지도 모르는 것이다.
거의(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다) 유물론자인 내가 보기엔, 이 소설은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쓰레기는 아니다. 충분히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내가 ‘거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듯이, 어떤 의심 같은 것이 존재하니까 말이다. 하루키는 그 의심을 극대화시켜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제목이 ‘도시의 불확실한 벽’, 혹은 ‘도시와 불확실한 벽’이 아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고 ‘그’라는 글자를 넣었다. 도시 자체가 불확실한 벽이라는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진짜 ‘나’이든, 혹은 상상 속에 존재하는, 보조적인 분신의 ‘나’이든, 내가 존재하는 도시가, 말하자면 ‘불확실한 벽’이라는 의미다. 어느 쪽이 진짜 ‘나’의 존재인지가 불분명하고, 아니 그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듯, 그런 도시의 존재조차도 불확실하다. 우리가 세울 수도 있고, 무너뜨릴 수도 있는 세계인 셈이다. 소설 속의 ‘나’(이름도 없다)는, 그리고 비상한 계산 능력과 독서 능력을 가진 서번트 증후군의 소년(역시 이름이 M**으로 가려져 있다)은 그런 도시를 세웠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 도시를 벗어난다. 그 도시에 존재하고 있던 ‘나’가 본체라면 그림자가 ‘나’의 행세를 하면서 도서관장 일을 하고 있는 그곳으로 와서 합쳐질 것이다. 만약 그 반대라면 비현실의 내가 현실의 나를 다시 찾아가는 것일 것이다. 결국은 역시 현실과 비현실이 갈렸다가 다시 이어지는, 그런 이야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