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1년 06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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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반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200쪽 | 260g | 124*188*11mm |
ISBN13 | 9791190337755 |
ISBN10 | 1190337754 |
발행일 | 2021년 06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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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반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200쪽 | 260g | 124*188*11mm |
ISBN13 | 9791190337755 |
ISBN10 | 1190337754 |
MD 한마디
[조각난 진실과 부서진 믿음에 관한 서늘한 이야기]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작가 이꽃님 소설. 학교에서 죽음을 맞은 한 여고생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그의 단짝 친구, 둘은 정말 피해자와 가해자일까. 작가는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교차해 전개하며,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거듭 변모하는 두 사람의 관계를 긴장감 있게 그려낸다. -소설MD 박형욱
끔찍한 제목이다. 어떤 내용을 담기에 이런 제목을 지었을까? 책을 들 때 왜 이런 제목을 달았는가? 생각했다.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읽어나가니 조금은 마음에 온다. 인물들의 자기중심적인 생각들이 그렇게 만드는 듯하다. 세계가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니 타인은 도구에 불과하다. 자신에게 못마땅하면 상대를 어떻게 해도 된다는 생각들이 생긴다. 물론 그렇게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쉽지 않다. 하지만 생각이 행동을 만드는 근원이라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학교에서 17 세의 소녀가 변사체로 발견된다. 한 학생이 범인으로 지목된다. 범인으로 지목된 학생은 죽은 소녀와 친한 친구로 인정받던 학생이다. 그들을 아는 학교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죽은 소녀는 쓰레기장 소각장 근처, 학교에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이다. 옛날에는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그곳으로 가져와 태우기도 하곤 했는데, 요즘은 학교에서 쓰레기 태우는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것이 황량한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그곳에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날 용의자와 소녀가 전신을 통해 만나자는 얘기가 있었다. 그것은 죽기 전 현장에 같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살인의 도구로 사용된 벽돌에 용의자의 지문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주연의 것이다. 그것이 중요 증거가 된다. 죽은 학생은 엄마와 가난하게 사는 서은이다. 서은의 죽음에 모든 범죄의 정황이 친한 친구인 (지)주연에게로 향하고 있다.
서은과 주연은 중학교 때부터 가까이 지냈다. 서은이 가난하고 학습 능력도 그렇고 교우들에게 돌림을 당하는 학생이었다. 그것을 공부도 꽤나 하고 집도 부자인 주연이 다가가 친구가 되면서 서은이 더 이상 놀림의 대상이 되지 않은 상황이 된다. 그렇게 둘은 늘 가까이서 서로 함께하는 학교생활을 해나간다. 그것이 고등학교 1학년까지 지속되고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이어진다. 그러다 서은이 죽게 되고 모든 정황에 의해 주연은 용의자로 경찰서에 잡혀간다. 경찰서에서는 그녀를 거의 범인으로 단정을 하고 조사를 한다. 하지만 주연은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주연은 서은의 죽음이 황당하다. 자신이 그러지 않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죽였다고 한다. 자신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 아무도 그것을 제대로 들어주려고 하지 않는다. 아빠와 엄마는 자신들의 입장이 곤란해질까 주연을 살인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재판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김 변호사를 붙여준다. 김 변호사는 주연에게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자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한다.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고만 말하라고 한다. 주연은 자신이 질제로 죽이지 않았는데, 자신을 믿지 않고 자꾸 자신의 계획만 요구하는 김 변호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에게 불리한 언행도 마구한다. 변호사로서는 변호를 한다는 것이 도저히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불쾌함을 지니며 물러난다. 그리고 국선 변호사인 장 변호사가 붙는다.
주연은 답답하다. 자신이 서은에게 무엇을 그리 잘못 했는가? 자신이 기억에서 지워버린 사고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지 못하고 자신이 정말 죽였는가? 스스로를 자책하는 시간도 가진다. 모두가 자신을 믿지 않고 범인으로 몰아가는 상황이 그를 절망적으로 만들어 간다. 부모는 부모대로 주변 사람들은 그들대로 교우들은 또 그들대로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결국 처음엔 주연이 그랬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까지 주연을 범인으로 몰아간다. 미디어에서는 취재를 하면서 주연을 몰아붙이고, 주연은 더욱 힘들어 간다. 재판에서도 승산이 전혀 없게 흘러간다. 장 변호사가 자신이 왕따를 당했던 과거 경험과 주연의 눈빛을 보고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도와주기 위한 조사를 하기도 한다. 살인 도구로 사용된 벽돌의 흔적에서 이상함을 느끼면서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까지 한다. 같이 있으면서 벽돌을 아무리 세게 내리쳐도 그렇게 산산조각이 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목격자가 나타나고 목격자에 의해 위에서 벽돌을 던졌다는 증언을 듣고는 그도 그 의문점이 해결된다.
마지막에 반전이 일어난다. 반전은 결국 주연이 죽인 것이 아니고 우발적으로 목격자가 떨어뜨린 벽돌에 서은이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법정과 상관없이 목격자의 하느님을 향한 문답으로 풀어내고 있다. 결국 법정에서는 주연이 죽인 것으로 결론지어질 것이다. 책에서는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이처럼 진실이 아닌 데도 진실처럼 호도되는 경우가 세상에는 많다. 그것이 인신을 구속하는 결과를 만드는 일이라면 참으로 황당하다. 사람의 자조적인 심리와 증거의 묘한 끼어 맞춤으로 만들어지는 재판이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이 글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소설이지만 재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조심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죄를 뒤집어쓰는 안타까운 사람의 경우가 없도록 해야 한다.
이 글은 많은 학교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정을 다루고 있고, 왕따를 문제 삼고 있다. 학습과 성폭력 문제도 거론하고 있다.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부모들의 과도한 생각도 문제 삼고, 가정 학교에서 소외감, 외로움을 느끼는 학생들을 얘기하고 있다. 집안의 가난도 문제가 된다. 그러다 미묘한 우정을 만나게 되고 그것이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관계가 이루어지는 상황으로 그려낸다. 그러다 기울어진 입장에서 다시 바르게 세우려고 하다 보니 이상한 관계가 되고 갈등을 이루는 상황이 된다.
서은이 엄마를 도우기 위해, 자신도 친구인 주연에게 물질적으로도 떳떳하고 싶어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러다 오빠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늘 주연과 함께했던 시간을 나눌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 주연은 못마땅하다. 자신은 모든 것을 다 서은을 위해 줬는데, 그런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서은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주연은 서은이 옆에 없으면 혼자가 되어 외로움을 느끼는 상황이 된다. 그런데 서은은 자신도 떳떳해지고 싶은 마음에 주연과의 만남 시간도 줄이면서, 주연에게 오해를 사면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이다. 물론 오빠와의 만남은 서은의 일탈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서은에게도 주연은 충요한 사람이다. 그러기에 쓰레기 소각장의 만남도 이루어진 것이다.
둘은 쓰레기 소각장에서 만나게 되고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게 된다. 서은은 자신의 입장을 얘기한다. 나도 너와 기울어진 관계가 아니고, 늘 얻어가지는 관계가 아니고 떳떳하게 만들기 위해 일도 한다고. 그러기에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그리고 너는 모르겠지만 기울어진 관계 속에서 많이 아팠다고. 그리고 마지막 충격적인 말을 한다. “그러게 좀 잘 해주지 그랬어, 사람 개무시하지 말고.” 주연이 서은에게 마지막 들었던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주연은 자신의 생각과 너무도 다른 서은의 생각에 천지가 아득해진다. 주연은 이 말이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잊어버리자고 생각하면서 뛰쳐나간다. 교실이 있는 복도를 올라갔고 그곳에서 아래에 있는 서은과 눈이 마주쳤다. 그 충격적인 장면에 주연은 가지고 있던 벽돌을 난간에 놓아두고 뒤돌아 정신없이 집으로 갔다. 서은의 충격적인 반응이 자신의 진심과 너무도 상반되어 스스로를 가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벽돌이 주변 사람에 의해 떨어지게 되고, 서은은 그 벽돌로 죽게 되는 우연적인 상황이 전개된다. 소설 속의 반전이다.
진실이요? 백번 천 번도 넘게 말했습니다. 전 아니라고요. 아무도 안 믿더라구요. 그때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세상은 진실을 듣는 게 아니구나. 세상은 듣고 싶은 대로만 듣는구나.p142
주연이 문제가 되면서 범인으로 몰리고, 가진 생각이다. 이런 일들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만연하여 있다. 선입견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억지 주장으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 한다. 진실이 왜곡되고 거짓이 참이 된다. 당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아플까? 정말 공권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조심하고 조심해야 할 일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고 교도소에 억울한 사람들이 없는가? 새김질해 본다.
우리 애 대학 뭇 가면 방송국에서 책임져요? 한 질 거잖아요. 애 인생이 달린 문제인데 왜 들쑤시고 다니냐고요. 들쑤시고. 서은이 엄마도 그래요. 어떻게 학교에 매일 찾아와 그러냔 말이에요. 방송국이며 애 엄마며 하여간 다 문제에요. p150
맞는 말이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에 이 말은 정당하다. 학부모님들의 상황이 되면 이런 일들이 벌어지면 충분히 얘기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것이 과도하게 흐르는 것이 문제이지만. 요즘 집단이기주의가 가져오는 사회적 투쟁들을 우리는 많이 만난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곁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무척 힘겹게 된다. 이런 문제들을 충분히 생각하는 조율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만드는 방송국의 행태다. 마녀재판을 해나가는 것도 문제지만,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만드는 것도 문제다.
글의 마지막 부분에 주연이 했던 말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다 그랬다고 하니까? 제가 죽인 것 맞은 것 같아요. 자신은 친구를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친구를 죽였다 한다. 자신도 자신을 배반하고 남자 친구와 더 어울리는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 자신이 죽인 게 맞는 것 같다. 물리적인 살인이 아니라 심리적인 살인을 행한 것이다. 그런 마음은 스스로 가꾼 배반감 때문이리라. 죽이고 싶은 아이, 진실이 통하지 않은 세상에서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진실과 무력감을 생각하면서 아프게 읽은 글이다.
딸아이 덕분에 알게된 작가 이꽃님의 신간이 작년에 나왔다고 했을때 몹시 궁금했다. 나에겐 청소년소설도 어른 소설못지 않은 재미와 완성도가 있다는걸 알게해준 작가이기도 하다. 제목이 다소 자극적인데 그래서일까. 더 궁금해졌다.
이 책을 읽고나니 역시나 이꽃님의 소설은 재미있다는걸, 믿고 보는 작가로 다시금 나에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죽이고 싶은 아이>는 어느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두고 죽은 피해자와 가해자로 의심되는 가장 친했던 친구 두명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읽어나가면서도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계속 의심하고 추리하면서 책을 읽었다.
작년 5월 뉴스를 통해 온국민의 관심을 받았던 한강에서 발견된 정민군 사건이 떠오르기도 했다. 두 친구가 엮여 있다는점, 뉴스와 방송에서 이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을뿐만 아니라 인터넷과 유튜브에까지 추측성 글과 영상이 올라가고 사람들은 '카더라' 혹은 '그럴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미 결론을 한방향으로 몰고가는 점도 비슷했다.
이 책 역시 진실보다는 정황과 두 친구를 둘러싼 소문과 주변인들의 판단과 기억을 통해 사건의 실체를 접근해간다. 아직 제대로 조사와 판결이 나지 않은 사건을 방송과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다룬것도 부와 권력을 가진 악한 자와 평범하고 그렇지 못한 선한 자로 나누는 프레임을 씌운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밝혀내지 못하는 음모가 있을것이라는 점이 작년에 있었던 실제 사건을 많이 떠오르게 했다.
책의 마지막을 읽어나갈때까지 정말 범인은 누구일지. 내가 생각한 정황이 맞는건지 궁금해하며 읽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밝혀지는 마지막장에서 결론에 뒷통수를 한방 맞은듯한 느낌이었다.
작가가 다루고 싶었던 것도 진실과 믿음에 관련된 문제라고 했다.
나는 종종 진실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진실은 사실 그대로인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는 것인지, 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범죄의 문제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들이 누군가를 범인으로 지목하며 이야기하기 시작할때 실제로 가해자가 아닌 당사자는 처음에는 억울함으로 화가나겠지만 모두가 그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변호사조차 믿음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변호할때 당사자는 어떤 느낌일까.
절망을 넘어서서 자기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의심하고 내려놓게 될지도 모를일이다.
범죄에서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사실들이 얼마만큼 진실에 가까울지 우리는 받아들이고 싶은것만 보고 믿고 싶은것만 믿는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특히나 sns가 그 어느때보다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다양한 매체와 유튜브같은 개인이 생산하는 미디어들이 넘쳐나는 이때에 가짜 뉴스들과 진실을 왜곡하는 이야기들이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수시로 흔들어 놓는다.
때론 옳은것이라고 생각해서, 정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행동과 말들이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진실을 왜곡하거나 덮을수도 있음을 생각해보게 된다.
한편으론 요즈음의 아이들이 조숙하고 어른못지 않은 말과 생각을 보인다고 하지만 여전히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어찌할지 모르는 어려움을 겪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이 책속 아이들을 통해 가까이에서 보는듯해서 안타깝기도 했다. 청소년 아이들에게 성장의 과정이자 배움의 과정인 관계를 배워나가는 이 과정이 입시학원으로 전락한 고등학교 안에서 제대로 풀길없는 모습으로 밀려나는것 같은 안타까움이 더해지는듯 하다.
청소년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생각해볼 화두를 던져주는 <죽이고 싶은 아이>는 이꽃님 작가의 전작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께>와 함께 모든이들에게 추천해주고픈 책이다.
한창 미투, 빚투, 고발 용어가 사회를 휩쓸다가 최근에는 '학폭'이라는 용어가 돌아 다닌다. 굉장히 좋은 현상이다. '학폭'은 절대 미화돼서는 안된다. 공소시효도 짧아서는 안 된다. '학폭'은 정말 극악하다. 여기는 당연히 폭행, 추행, 절도, 사기, 모욕 등을 함께 동반한다. 학폭은 범죄 의식이 결여된 미완성 인간을 사회로 양성하여 내보내는 시작점이다. 선량한 이를 괴롭히는 것이 힘의 논리라고 믿게 한다.
'위세과시'를 다른 능력으로 할 자신이 없는 이들이 가장 원시적인 방식으로 '위세과시'를 하는 방식이다. 이런 인식을 학창시절에 만들고 사회로 내보내면, 그 사회는 원시사회가 된다. 국어, 수학, 영어를 완성하는 것보다 사회성을 완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교육학 용어로 교육은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다. 그깟 국, 영, 수 등급이나 구분하는 과정이 아니다.
학폭이 악질인 이유는 '죄의식 결여' 때문이다. 졸업을 끝으로 가해자 스스로 자체 공소시효를 소멸한다. 적당히 '낄낄' 거리며 즐기다가, 졸업하면 혼자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한다. 약간의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이미 과거라고 생각한다. 교내에서 벌어지는 일을 단순히 '서열', '인간관계', '교우관계' 정도로 정의해 버린다. 당연하게 미친 증상이며 '범죄'다.
죄의식을 가져야 한다. 범죄의 대부분은 '악'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식 결여'라는 무지에서 시작한다. 사이코패스와 다르게 '반사회적 인격장애'인 '소시오패스'는 후천적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하는 이들은 역시나 '교육'된다.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
물론 애들은 그럴수도 있다. 6살 아이가 5살 아이의 장난감을 빼앗을 수도 있고, 7살 아이가 6살 아이를 때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것을 보자마자 형사소송법을 들이밀며 입건 수사할 수는 없다.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 이론은 인간을 영아기부터 노년기까지 8단계로 나눠 발달한다고 봤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7살에는 죄의식을 갖게 되며 12살 까지는 열등감을 갖고 청소년기에는 역할과 정체성을 확립한다.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면 7살인 어린 아이는 마트의 장난감을 호주머니에 넣어가지 않고 12살된 아이는 남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애들이 그럴 수 있지'는 지극히 부모 생각이다.
소설 '죽이고 싶은 아이'는 아이를 잠재우고 조용한 밤에 '밀리의 서재'로 읽었다. 청소년 소설이라고 하는데, 나름 재밌게 읽었다. 굳이 '청소년 책'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같은 소재의 드라마 '더 글로리'가 19세인 것을 보면 충분히 성인도 즐길만한 컨텐츠다. 가만히 누워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소설은 쉽게 읽히지만 점차 반전의 반전을 준다.
과연 '선과 악'은 무엇이며, 죄와 벌'은 무엇이고, 진실과 믿음은 무엇인지 생각할 거리도 많이 던진다. 잠에 들기 전에는 가벼운 소설을 읽고 싶다. 너무 무겁고 긴 소설은 자기 전에 읽기 부적합하다. 시작을 하면 늦게까지 끝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잠들기 전에 읽기 시작하고 아침에 눈을 뜨고 완독했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두 친구의 관계에 대한 의심. 친구라고 믿었던 친구와의 관계. 어른과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의 차이. 미디어와 학교의 관점. 단순히 학교 폭력 정도를 담은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개인적으로 소설과는 다른 이야기인데, 마지막 국민학교 시대를 다녔던 나로써 학교는 야생과 닮아 보였다. 당연히 교육과 사회화가 덜 된 어린 아이들이 집합이기에 '성인'들의 정돈된 사회와는 달랐다. 다만 나에게 인상 깊었던 모습은 '학교'의 모습이다. 그 시대는 지금 돌이켜 보면 굉장히 특이했고 야만적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양말에 나무 가시가 박히는 마룻바닥이었는데 학교가 끝나면 책상을 모두 뒤로 밀고 앉아서 8살, 9살 되는 아이들이 양초와 마른 걸레로 왁스질을 했다.
한참하고나면 무릎이 반들 반들해지고 손 끝이 빨갛게 됐는데, 이 시간에 놀다가 걸리면 성인 남성의 선생님이 가차없이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치셨다. 쓰레기를 버리러 소각장을 가면 학교 수위 아저씨는 쓰레기통에서 플라스틱 병이 나왔다며, 뒷통수를 때리거나 뺨을 후려 갈겼다. 얼핏 잘 기억은 안나지만 의자를 집어 던지시던 선생님도 계셨고 뺨을 맞는 건 그닥 불평할 사항도 아니었다. 한번은 놀림을 받던 친구가 교무실에 있는 선생님께 이야기하자, 선생님은 '고자질도 나쁜 거다.'라며 크게 혼내시던 모습도 생각이 난다.
지금은 되려 교권이 바닥이라, 선생님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에 사회가 공감하는 분위기지만, 그때의 어른들의 모습이 생각이 난다. 당연히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따돌림'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하다 싶은 상황이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침묵을 택했다. 불필요한 위험을 스스로 떠안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나를 포함하여 당시 침묵하던 친구들도 그때를 돌이키면, 자신들의 모습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 정의롭게 나서지 못했을까.
학교폭력은 고로, 가해자를 제외한 모든 이에게 트라우마를 만들고, 혼자 즐거운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지극히 사회를 병들게 하는 이기적인 범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