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2년 10월 07일 |
---|---|
쪽수, 무게, 크기 | 316쪽 | 376g | 133*200*30mm |
ISBN13 | 9788954688796 |
ISBN10 | 8954688799 |
발행일 | 2022년 10월 07일 |
---|---|
쪽수, 무게, 크기 | 316쪽 | 376g | 133*200*30mm |
ISBN13 | 9788954688796 |
ISBN10 | 8954688799 |
MD 한마디
[새 길로 걸어가는 이 시대의 딸들에게] 이슬아의 첫 장편소설. ‘늠름한 딸’이 주권을 가지는 이 소설은 기존 질서를 당연시해오던 뒤통수를 뜨겁게 만들기도 하고, 귀여운 이 가족의 이름만 들어도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새 길을 걸어가는 대견한 이 시대의 딸들은 물론, 가족들과 ‘가녀장의 시대’가 오긴 할까 대화하고 싶어지는 소설. - 소설 PD 이나영
태초에 가부장이 있었다 7 이 집은 딸이 사장인가봐 12 역시 성공한 애는 달라 17 우리는 테레비나 보자 24 쫓겨나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31 복희를 공짜로 누리지 마 37 아저씨의 아름다움 42 장군 말고 장녀 48 바깥양반의 아우라 54 안 부지런한 사랑 62 충분한 데이트 69 복희식 오류 79 아쉬운 대답 드려 죄송합니다 85 복희는 된장 출장중 93 낭독회는 김장중에 시작된다 100 로즈 시절 110 사장님의 사장님 118 이기고 싶은 사람이 있어 131 딸의 예술가 친구들 143 미란이는 불시에 찾아온다 149 인쇄 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158 책을 사랑하고 두려워하기 165 이유 있는 문학 174 복희는 생각한다 183 당근님들 192 가부장의 아침 201 걸레질의 왕도 207 직원 복지는 요가로 210 부엌에 영광이 흐르는가 219 남의 찌찌에 상관 마 237 혼란스러운 가부장 247 헷갈리는 식탁 예절 257 누가 여자 역할이에요? 266 어느 오후의 부녀 274 우리들의 신을 찾아서 282 출판사 지붕 위로 구름이 지나간다 298 작가의 말 310 |
두 녀석이 성인이 되고 나서 진심으로 내 인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만약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나의 모습은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들을 키웠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만 문득 쓸쓸함이 다가왔었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알아챘을까? 큰아이가 군 휴가를 나와 해준 말이 고맙고, 감사하다. 군에 가보니 다양한 형태의,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가족 형태가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며 부모님이 자신에게 해준 사랑이 결코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는 큰 녀석. 엄마가 회사 다녔다면, 알지 못했을 수도 있을 그간 쌓은 엄청난 대화와 위로. 그 축적된 시간이 아이에겐 소중한 추억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말한다. ‘이젠 엄마 하고 싶은 것 다 하세요.’ 만약 내가 가녀장의 시대를 택했다면, 남편에게 회사를 그만두게 하고 내가 가장이 되는 일을 택했을까? 살아보니 그렇다. 가장의 시간도, 아이를 키우는 시간도 부모가 되는 그 순간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가녀장의 시대’라는 책을 읽었다. 가부장, 할아버지가 힘을 발휘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여자아이 슬아. 그녀는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든 이 세상에서, 자수성가도 어려운 글쓰기로 집안을 일으킨 딸이자 경제 주권자다. 글을 써서 집을 마련했고, 출판사도 운영하고 부모님을 직원으로 채용한 사장이다. 엄마는 정직원이지만 아빠는 정직원이 아니다. 하지만 불만은 없다. 아빠는 직원으로 열심히 일한다. 가녀장 딸과 아내를 곁에서 보필한다. 낮잠 출판사 사장 슬아는 가부장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임금과 보너스 시스템을 도입하고 엄마의 집안일에 대한 합당한 임금을 지불 한다. 이들은 업무시간만큼은 서로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하고 슬아가 글 쓰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노력 한다.
이런 세상이 올지도 모르겠다. 이젠 사는 데 남자, 여자가 뭔 의미일까 싶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전업주부를 했다. 이런 나를 보고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네가 그렇게 살 줄 몰랐다.’라는 말을 했었다. 그 말의 뉘앙스는 집안일을 하는 주부에 대한 무시 같은 게 느껴졌었다. 전업주부를 집에서 ‘노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집에 있으면서 누워본 적이 거의 없다. 오죽하면 울 아이들은 엄마는 왜 매일 바빠? 이렇게 말을 했을까? 아이들이 집에 오면 아이들에게 집중했고, 아이들이 없을 때에는 집안일에 집중했다. 어차피 할 일이라면 나는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이라 안 해도 되는 일을 찾아서 하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나는 시어머니와 함께 사니 게으름을 피울 여유조차 없었다. 누가 나에게 잔소리한 적이 없었음에도.
이젠 제2의 내 인생을 살기 위해 또 바빠졌다. 바쁘지 않은 날이 없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그리고 슬아의 인생을 생각한다. 그녀가 글쓰기로 자수성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고, 또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을까? 나 역시 한때 아이들 글쓰기 수업(우리 아이들 가르치는 게 주 목적이었지만)을 했었고,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지금도 내 나름대로 소소하게 글을 쓰고 있지만, 그 글이 돈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글’을 ‘돈’이 되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이슬아 작가의 책은 처음인데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부모가 아니라 모부라고 말하는, 당당하게 가녀장이라고 말하는, 부모님을 직원으로 쓰는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예전 같은 가부장 시대는 아니라고는 해도 지금도 여전히 가부장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음을 안다. 이런 생각의 틀을 깨는 것.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세상 모든 가녀장들. 그녀들을 응원한다.
이슬아 작가는 「일간 이슬아」를 꾸준히 발행하며 ‘메일링 서비스’로 주목받았으며, 스타 작가로 떠올랐다. 꾸준한 인기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 시대 최고의 ‘놀람’을 만들고 있는 작가다. 그가 열한 번째 책이자, 첫 번째 소설인 『가녀장의 시대』로 또 한 번의 놀라움을 선사한 논픽션 소설이다.
그의 에세이집 『심신 단련』을 읽어서 내용이 생소하지는 않았다. 그 흐름의 맥락에서 쓴 소설이라서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정신력이 탄탄한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통해 효와 삶에 대해서 ‘조기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보통은 부모라고 말하고 쓰기도 하는데 이 소설책에서는 고집스럽게 ‘모부’라고 쓴다. 이슬아가 지칭하는 모부와 함께 ‘낮잠 출판사’에서 근무한다. 대표는 이슬아, 정식 직원은 복희씨, 비정규직 웅이씨가 있다. 실제로 ‘헤엄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엄마와 아빠와 함께 일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311P)
“길고 뿌리 깊은 역사의 흐름을 명랑하게 거스르는 인물들을 앞으로도 쓰고 싶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 맺는 가족 이야기만큼이나 가족으로부터 훌훌 해방되는 이야기 또한 꿈꾸고 있습니다. 사랑과 권력과 노동과 평등과 일상에 대한 공부는 끝이 없을 듯합니다. 이 공부를 오래 할 수 있도록 길고 긴 세월이 제게 허락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밝혔다.
매일 요가를 하고, 야식은 먹지 않는다. 엄마에게 배울 것을 권유하며 요가를 함께 다니고, 훌라 댄스 학원도 다니도록 한다. 수고한 일들에 대한 수당을 철저히 지급한다. 식사 준비나 김장, 된장 담기 등 출판사와 숙소가 같은 곳이지만, 근무 시간에 서로 존댓말을 쓰며 존중한다. 아빠랑 맞담배를 피우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들은 쿨하게 그렇게 산다.
가부장이 아니다. 딸이 살림을 일으키고 출판사의 사장이고, 모부가 고용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실권은 딸에게 있다. 여자가 가정을 이끌어가는 주도적 입장에 있기 때문에 가녀장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희생을 강요받으며 사는 것이 이 땅의 태어난 여자들의 오랜 숙명이었지만, 시대가 바뀌고 있다. 여자가 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높은 지위에 있을 수 있고, 남자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2005년에 호주제도 폐지가 되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부부가 공평하게 가사를 분담해야 한다는 조사에서 2010년에는 남성 31.2%, 여성 42.2%가 찬성했는데, 2020년도에는 남성 57.9%, 여성 67%로 가족 구성원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증대되었다고 한다.
「부엌에 영광이 흐르는가」에서(228P)
“새삼스레 슬아는 미안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미안함보다 민망함이 앞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때로 너무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라고 적었다. 매일 삼시 세 끼를 준비하는 엄마의 수고에 대한 마음이다. 그 수고를 감사하기보다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하는 말이다.
「헷갈리는 식탁 예절」에서(263P)
“선생님은 먼저 선先에 날 생生이 합쳐진 말이잖아요. 먼저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요.”라고 말한다. 식당에서 서빙하는 아주머니를 부를 때, ‘이모님!’이나 ‘아줌마!’로 부르는 것은 불합리하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식당에 가면 호칭이 늘 헷갈렸는데 ‘선생님!’ 이렇게 부르면 좋을 것 같다.
「우리들의 신을 찾아서」에서(294P)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슬아에게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진리 중의 하나다. 사람들이 좋은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계속 쓸 수 있겠는가. 슬아는 자신에게도 좋은 신앙이 있었음을 알아차린다. 좋은 이야기에 대한 추앙과 문학에 관한 믿음으로 슬아는 움직여왔다. 신의 입을 빌려 기도하고 몸을 낮추듯, 슬아 역시 자기보다 먼저 살아간 작가들의 힘을 빌려 글을 쓴다.”라고 밝히고 있다. 좋은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마음과 문학을 믿는 마음, 문학을 시이라고 믿는 작가 이슬아이기에 더 믿음이 간다.
시대적인 변화상을 반영하는 것이 문학이고, 또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것이 문학이라고 할 때, 이슬아는 일인 출판사를 운영하며 출판사 경영과 책 쓰기, 글쓰기 지도, 원고 마감, 운동 등 자기 관리와 일에 대한 프로 정신으로 일인 다역을 해가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글에서 사람을 생각하는 따뜻함과 예절, 공평 등의 고집스러움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자유분방함과 재미가 있어서 이슬아를 찾게 된다.
'가부장'이라는 말이 익숙한 어린시절을 지냈고 지금 역시 '가부장'적인 남자와 살고 있다. 실제로는 얼마전까지는 '가모장'의 가족이었다. 가족을 부양하는 주체에 따라 살아간다면 실제로도 '가녀장'의 가족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딸이기 때문에 어리기 때문에 가장으로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한 마디 할라치면 '돈 버는 유세'라는 말로 기를 죽이 시대를 살고 있다.
워킹맘으로 가사와 육아, 직장 일을 병행하며 정말 억울할 때가 많았고 지금도 많다. 제대로 생활비 한 푼 벌지 않으면서 가사와 육아를 선택하는 그를 보며 내게 결혼이란 제도는 여자의 희생을 강요하며 여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합법적이지만 불합리한 제도로 자리잡았다.
또한 자식이기 때문에 부모를 부양하는 것을 낳아서 길러준 것에 대한 보답을 효도라는 이름을 붙여 의무로 부여한다. 더 우스운 것은 분명 내가 더 부모를 부양하는 일에 꾸준했고 결정적이었는데 아들에게 효자라는 타이틀을 지우는 나의 어머니를 비롯한 부모 세대에 꾸준한 의구심이 들었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들이 쌓여가곤 했다. 비단 나만이 그렇게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딸과 엄마는 애증의 관계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나보다 9년이나 늦게 태어난 '이슬아' 작가는 내가 신세한탄만 하고 있을 때 현재 가족 제도가 가지고 있는 불합리하지만 전혀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문제점들을 소설 속에서 유쾌하게 반박해나간다.
'가녀장' 이슬아가 아버지 웅이와 어머니 복희와 가족의 형태에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형태를 더하여 가장으로서의 자신의 공로를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도 되는, 부모로서 제공하는 노동력에 정당한 댓가를 지불함으로써 자식에게 얹혀사는 부모가 아닌 가족과 사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노동자로서 역할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낸다.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모부'이다. 우리가 흔히 엄마아빠라고 부르는데 한자로는 아버지를 뜻하는 '아비 부'를 먼저 적는다. 엄마의 역할이 가정의 형태를 유지를 하는데 결정적인데도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부모'라는 물로 양친을 표현해왔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유지해온 가족 형태의 근본적인 문제를 이렇게 꼬집는 이슬아 작가의 위트가 참 맘에 든다. 5~6년 전쯤 전업주부의 노동력을 약 4천만원의 연봉으로 환산할 수 있다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가 상승률을 반영한다면 현재 전업주부의 연봉은 4천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당시 14년~15년 차의 직장인이던 나의 연봉과 맞먹는 연봉임을 생각할 때 절대 적은 금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업주부의 노동을 너무 하잘것 없고 하찮게 여긴다. 대체할 수 없으면서도 말이다. 그런 어머니의 노동력에 물질적 가치를 부여하여 고용하는 살림 해본 '가녀장 이슬아'의 생각이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딸을 가장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의 노동력에 관한 댓가를 지불하는 고용주로서 존중하고 딸이자 고용주인 '슬아'에 대해 섭섭해 하지 않는 웅이와 복희에게서 어떤 어른으로, 모부로 나이들어가며 어떻게 자녀와의 관계를 유지해나가야 하는지 모델을 발견한다. 한편으로 아이를 낳아 키우며 부모의 도움 없는 것에 대해 서운해하고 친정 덕을 보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것을 깊이 반성한다.
가장 가까운 관계이면서도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고 가정이 해체되는 현대사회에서 '가녀장의 시대'에 슬아와 웅이와 복희 그리고 웅이와 복희의 모부들과 연결된 가족의 모습은 보급이 시급한 가족형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간 이슬아를 발행하는 이슬아 작가의 성실함과 우직함에 그리고 직업 의식에 존경을 표한다. 꼭 먼저 태어나야만 배울 것이 있는 것은 아닐거다. 작가라는 직업으로 한정지었지만 사실 많은 직장인들의 애환과 부담을 가녀장 이슬아에 투영하여 볼 수 있었고 그 과정이 위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