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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이 생명에 대한 한 없는 마음으로 다시 쓴 이야기. 몸뚱이 하나로 세상에 맞서는 진돗개 보리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경이로운 생의 순간을 마주치게 된다. 생이 감당하는 환희와 그리움, 아픔과 두려움 그 모든 마음들이 이 소설에 아로새겨졌다. -소설MD 김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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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 서문_ 군말
초판 서문_ 작가의 말 1. 보리 2. 마을 3. 갯벌 4. 흰순이 5. 배추 |
저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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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산골짜기와 들판, 강물과 바다, 비 오는 날과 눈 오는 날, 안개 낀 새벽과 노을 진 저녁들은 모두 입을 벌려서 쉴 새 없이 무어라 지껄이면서 말을 걸어온다. 말은 온 세상에 넘친다. 개는 그 말을 알아듣는데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사람들은 오직 제 말만을 해대고, 그나마도 못 알아들어서 지지고 볶으며 싸움판을 벌인다. 늘 그러하니, 사람 곁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개의 고통은 크고 슬픔은 깊다.
--- p.16 우리 엄마의 모든 슬픔은 엄마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 p.21 신바람은 개의 몸의 바탕이고 눈치는 개의 마음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람들은 남의 눈치를 잘 보는 사람을 치사하고 비겁하게 여기지만 그건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도 개처럼 남의 눈치를 잘 살펴야 한다. 남들이 슬퍼하고 있는지 분해하고 있는지 배고파하고 있는지 외로워하고 있는지 사랑받고 싶어 하는지 지겨워하고 있는지를 한눈에 척 보고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 남의 얼굴빛과 남의 마음 빛깔을 살필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있어야 한다. 부드러운 마음이 힘센 마음이다. --- p.31 사람들은 대체로 눈치가 모자란다. 사람들에게 개의 눈치를 봐달라는 말이 아니다. 사람들끼리의 눈치라도 잘 살피라는 말이다. 남의 눈치 전혀 보지 않고 남이야 어찌 되건 제멋대로 하는 사람들, 이런 눈치 없고 막가는 사람이 잘난 사람 대접을 받고 또 이런 사람들이 소신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받는 소리를 들으면 개들은 웃는다. 웃지 않기가 힘들다. 그야말로 개수작이다. --- p.34 할머니의 품에 안겨 있던 그 짧은 동안에, 사람의 몸 냄새는 내 일생에 잊지 못할 느낌으로 몸속에 깊이 들어와 박혔다. 새로 태어난 사람의 냄새와 오래 산 사람의 냄새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도 그날 알았다. 사람의 몸 냄새 속에 스며 있는 사랑과 그리움과 평화와 슬픔의 흔적까지도 그날 모두 알게 되었다. 그 냄새는 모두 사랑받기를 목말라하는 냄새였다. --- p.41 사람들은 개처럼 저 혼자의 몸으로 세상과 맞부딪치면서, 앞다리와 뒷다리와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힘만으로는 살아가지를 못한다. 나는 좀 더 자라서 알았다. 그것이 사람들의 아름다움이고 사람들의 불쌍함이고 모든 슬픔의 뿌리라는 것을. --- p.48 주인님 몸에서 나는 경유 냄새는 고단하고도 힘찬 냄새였는데, 어딘지 쓸쓸한 슬픔도 느껴졌다. 나는 그 경유 냄새를 아침바다의 차갑고 싱싱한 안개냄새보다 더 사랑했다. 그것은 일하는 사람이 풍기는 냄새였고, 내가 지키고 따르고 사랑해야 하는 냄새였다. --- p.72 나는 되도록 싸우거나 달려들지 않고, 짖어서 쫓아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사람들의 동네에서 살아야 하는 개의 도리다. 또 쓸데없이 싸우다가 다치지 말고, 기어이 싸워야 할 때를 위해서 몸을 성히 유지하면서 힘을 모아두어야 한다. 사람 동네에서 개 노릇 하기가 쉽지 않다. --- p.113 싸울 때는 입을 벌려서 짖지 않아도 몸속에서 으렁 으렁 으렁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싸울 때 내 마음은 미움으로 가득 차서 슬프고 괴롭고 다급하다. 싸움은 혼자서 싸우는 것이다. 아무도 개의 편이 아니다. 싸우는 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다. (……) 싸움은 슬프고 외롭지만, 이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있다. 자라서 다 큰 개가 되면 그걸 알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은 끝내 피할 수 없다. --- p.115 아이들은 언제나 한 아이가 웃으면 모든 아이가 따라 웃는다. 다들 한꺼번에 웃어서 어느 아이가 맨 처음 웃었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럴 때 교실은 별이 부서지는 것 같고, 개울물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내리는 것 같다. --- p.119 앞발을 창문틀에 올리고 사람처럼 뒷다리로 서서 교실 안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정말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은 내가 달을 밟을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내가 사람의 아름다움에 홀려 있을 때,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르고 있었다. --- p.124 흰순이의 눈길은 이 세상의 끝 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작은 이마가 반듯했고 분홍색 콧잔등에 빗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땅에서 풀이 돋아나듯이, 어디선지 새들이 날아오듯이, 저절로 이 세상에 태어난 개였다. --- p.149 흰순이도 눈을 맞으러 나왔는지, 그 희미한 저쪽 논둑길 위에 주저앉아서 흰 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순이의 흰 몸 위에 흰 눈이 내려서 흰순이의 흰 몸은 그림자처럼 눈발 속으로 스며들었다. 흰순이의 새까만 눈동자 두 개와 새까만 코가 별처럼 보였다. (……) 나는 들판의 이쪽 가장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저쪽 논둑길에 쪼그리고 앉은 흰순이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p.170 수평선 안쪽으로, 혹은 섬 모퉁이를 돌아서, 주인님의 배가 한 개의 점처럼 나타나서 푸른 고리연기를 뿜어내며 다가오기를 나는 기다렸다. 그러나 바다는 끝내 물과 바람뿐이었다. 나는 빈 바다를 향해 우우우우, 짖고 또 짖었다. --- p.182 사람의 몸을 나무 상자에 넣고 뚜껑에 못질해서 땅에 파묻는 것이 죽음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주인님의 몸에서 풍기던 그 경유 냄새와 밤바다에서 주인님이 나누어 준 그 미역국 맛과 가을에 마당에서 도끼로 장작을 쪼개던 주인님의 그 아름다운 근육과 땀방울은 다 어디로 사라지는 것인지를 나는 알 도리가 없었다. --- p.188 그 마지막 며칠 동안에도 날마다 바람은 먼 수평선 쪽의 기척을 몰아왔다. 아침마다 바다는 유순한 잿빛의 어둠 속으로부터 맑은 빛을 밀어올리면서 깨어났고 저녁이면 저무는 빛들이 수평선 너머까지 빛의 다리를 이루며 반짝였는데, 나는 그 다리 위를 달려서 수평선 너머로 건너갈 수는 없었다. --- p.203 절을 마친 영희네 식구들은 무덤에서 내려와 승용차에 올랐다. 승용차는 수협 네거리를 지나고 학교 뒷길을 돌아서 국도로 나아갔다. 나는 국도로 들어가는 진입로까지 승용차를 따라갔다. 승용차 안에서 영희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면서 나에게 손짓을 했는데, 따라오라는 말인지, 그만 돌아가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양쪽 다였을 것이다. --- p.210 |
“한 자 한 자 다시 쓴 이야기”
작가 김훈이 2005년에 쓴 동명 소설 『개』를 고쳐 다시 펴냈다. 이야기의 뼈대는 유지하면서 내용의 상당 부분을 손보았다. 이번에 글을 고쳐 쓰면서, 큰 낱말을 작은 것으로 바꾸고, 들뜬 기운을 걷어내고, 거칠게 몰아가는 흐름을 가라앉혔다. 글을 마음에서 떼어놓아서 서늘하게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야기의 구도도 낮게 잡았다. 가파른 비탈을 깎아내려서 야트막한 언덕 정도로 낮추었다. 편안한 지형 안에 이야기가 자리 잡도록 했다. 2005년의 글보다 안정되고 순해졌기를 바란다. _「군말」에서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소설의 주인공은 댐 건설로 수몰을 앞두고 주민들이 하나둘 떠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진돗개 ‘보리’이다. 보리는 주인할머니 부부와 살던 곳이 물에 잠기면서 바닷가에 사는 작은아들네로 옮겨가고, 그곳에서 새 주인 가족과 행복한 한때를 보낸다. 그러나 어부인 주인이 풍랑에 휩쓸려 목숨을 잃고 가족마저 도시로 떠나면서, 옛 주인할머니와 남아 새날들을 앞둔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다. 초판 출간 당시 작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개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과 세상의 직접적 관계, 그러니까 ‘생에 대한 직접성’을 설명하고 싶었다. 관능과 직관과 몸의 율동을 보여주면서 삶의 비애나 고통을 바로 들여다보는 존재를 상정하다 보니 개가 인간보다 유리할 거라고 판단했다. 개의 후각은 인간의 200배나 되고, 청각도 더 발달했다. 그처럼 감각이 발달한 개의 내면에는 인간보다 풍요로운 삶의 정서와 인상이 축적되어 있을 것이다. 개는 언어가 없기에 짖어댈 뿐이지만, 그 내면은 인간보다 풍요롭고 다양할 것이다.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짖어댄다는 불가능한 일을 해보려고 했다. -2005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지난 몇 년간 작가는 매일 공원을 산책하며 다가오고 지나가는 사람과 개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떠오른 생명의 이야기들이 『개』에 스며들었다. 덕분에 모진 매를 견딘 보리 엄마와 가혹하게 죽어간 흰순이의 삶이 다르게 변주되고, 보리의 눈에 비친 세상엔 온기가 더해졌다. 사랑과 희망, 그리고 싸움 ― ‘보리’의 삶 노부부가 사는 집에서 태어난 수컷 보리는 젖먹이 시절 엄마 품 안에서 따스하고 편안한 날을 맞는다. 하지만 “완벽한 평화 속에는 본래 슬픔이 섞여 있”듯, 그 행복의 시간 속에 태어날 때 다쳐 젖 먹기 경쟁에서 뒤처진 맏형의 죽음이 겹쳐진다. 온몸으로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개의 운명을 다리 부러진 맏형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한 엄마는 따스한 봄볕이 내리던 날, 눈도 뜨지 못한 형을 삼키고 만다. 본능에 가까운 엄마의 행동으로 맏형은 죽지만 보리의 눈에 그것은 한편으로 엄마의 따스하고 축축한 몸속,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런 엄마의 행동을 오해한 노부부는 자식 잡아먹은 재수 없는 개라고 매타작을 해댔다. 하지만 그들이 나쁜 사람인 것만은 아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그것이 개이든 고추 모종이든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심성으로 새끼 낳은 엄마에게 미역국을, 보리밥 잘 먹는 새끼들에게는 된장국에 따뜻한 보리밥까지 말아 먹였다. 수몰이 임박해서까지 집을 떠나지 못했던 것도 그런 마음 씀씀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톤짜리 목선으로 서해의 가까운 바다에서 잡아 올린 생선을 팔아 살아가는 주인의 둘째 아들네로 갈 때까지 보리는 신바람 나게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자랐다. “앞다리와 뒷다리와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힘”으로 세상과 맞부딪치는 동안 그를 이끌었던 것은 “냄새”였고, 자랑거리는 세상을 인식하는 풍향계인 “수염”이었다. 눈 위에, 가슴에, 주둥이와 턱 밑에 난 여러 수염과 그 수염 각각의 역할로 보리는 세상을 자신의 몸처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넉 달 만에 보리가 수몰 직전의 고향을 떠날 때 엄마는 개장수에게 팔려 가고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것 또한 슬픈 일일 테지만 개는 지나간 날들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닥쳐올 날들에 대한 근심도 없다. 바닷가 새 주인네에서 보리는 밤일 마치고 돌아오는 주인 배의 밧줄을 선착장 말뚝에 거는 일을 도왔다. 동네 저학년들을 데리고 아침 등교하는 큰딸 영희를 따라나서 길가의 뱀을 해치우는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기도 한다. 영희의 학교에서 이웃 동네 암캐 흰순이를 만나 마음 설레는 날들도 생겼다. 돼지우리 지키는 사나운 개 악돌이와는 한바탕 싸움도 벌인다. 그런 일상과 사건의 연속이던 보리의 삶을 한순간에 바꿔놓은 건 조업 중 폭풍에 휩쓸린 주인의 죽음이었다. 생계를 잃은 가족은 도시의 아파트를 구해 떠나지만 아파트에서 키울 수 없는 보리는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 집안 뒤처리를 위해 남았던 할머니마저 떠나면 보리는 “어디론가 가야 할” 형편이다. 고향을 떠나올 때도 그랬지만 그렇다고 두렵지는 않다. “어디로 가든 거기에는 산골짜기와 들판, 강물과 바다, 비 오는 날과 눈 오는 날, 새벽안개와 저녁노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고 그런 “세상의 온갖 기척들”을 맡으며 “달리고 냄새 맡고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이미 다졌던 발바닥 “굳은살”의 탄력이 있기 때문이다. 돋을새김된 생의 명암 ― ‘보리’가 본 인간 세상 사람들은 오직 제 말만을 해대고, 그나마도 못 알아들어서 지지고 볶으며 싸움판을 벌인다. 늘 그러하니, 사람 곁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개의 고통은 크고 슬픔은 깊다. _16쪽 전지적 개시점으로 쓰인 이 소설은 개 이야기지만 개의 시선으로 인간사를 반추하는 대목이 여운을 남긴다. 노부부가 엄마 때린 이야기를 하며 “사람들은 남의 눈치를 잘 보는 사람을 치사하고 비겁하게 여기지만 그건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보리는 생각한다. 개처럼 눈치 보라는 것은 비굴하게 처신하라는 게 아니다. “남들이 슬퍼하고 있는지 분해하고 있는지 배고파하고 있는지 외로워하고 있는지 사랑받고 싶어 하는지 지겨워하고 있는지를 한눈에 척 보고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이야기다. “남의 눈치 전혀 보지 않고 남이야 어찌 되건 제멋대로 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고 그야말로 “개수작”이다. 개는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나의 것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나무와 풀과 벌레 들의 눈치까지도 정확히 읽어내야 한다”며 “그게 개의 도리고, 그게 개의 공부”라고 한다. 사람의 경우라고 달라야 할 까닭이 없다. 바닷가 주인네 둘째인 두 돌배기 영수가 싼 똥을 먹어 야단을 맞고도 보리는 그 “똥을 먹은 일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똥을 먹는다고 해서 똥개가 아니”라 “도둑이 던져주는 고기를 먹는 개가 똥개”라는 대목은 인간 세상에 던지는 촌철살인이다. “되도록이면 싸우거나 달려들지 않고, 짖어서 쫓아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람들의 동네에서 살아야 하는 개의 도리”다. “쓸데없이 싸우다가 다치지 말고, 기어이 싸워야 할 때를 위해서 몸을 성히 유지하면서 힘을 모아두”는 것도 필요하다. 다만 “사람들은 개처럼 저 혼자의 몸으로 세상과 맞부딪치면서, 앞다리와 뒷다리와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힘만으로는 살아가지를 못한다”는 것을 보리는 좀 더 커서 알게 된다. 그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이고 불쌍함이며 모든 슬픔의 뿌리라는 것을. 인간의 그 모든 순간에 ‘보리’가 함께한다. 『개』는 작가의 생명에 대한 깊은 애정과 통찰을 흥과 위트 넘치는 문체에 담아낸 소설이다. 오직 네 발바닥으로 세상 속을 달리며 제 생을 받아들이고 힘차게 살아내는 진돗개 보리의 삶과 보리의 눈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 속에 세상 모든 존재가 감당하는 삶의 빛과 어둠이 돋을새김되었다. 인생은 다시 쓸 수 없지만 소설은 다시 쓰인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새 이야기를, 이미 읽은 독자라면 작가가 걷어내고 매만진, 소설 속 생명들의 또 다른 삶을 만나는 시간이 될 것이다. 표지 그림 소개 화가 김호석(金鎬?, 1957~)이 작품 표지를 위해 그림 세 점을 그렸다. 화가는 작품의 보리 같은 두 돌 된 진돗개와 보름가량 집과 호수, 바닷가를 오가며 살피고 화폭에 담았다. 인간 곁에서 아픔과 기쁨을, 생의 빛나는 순간과 비루한 때를 묵묵히 함께하는 ‘보리’를 생각하며 그렸다고 한다. 표지 그림은 바다로 떠난 주인을 기다리며, 작은 기척도 놓치지 않으려 한껏 귀를 세운 보리의 이미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