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길과 골목들을 걷다 보면 여기에 어떤 시간들이 존재했을지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될 때가 있다. 계획에도 없이 그러나 이끌리듯 멈춰 서서 들여다보게 만드는 흔적들을 두고 『이미지와 함께 걷기』는 거기에 어떤 목소리와 존재들이 있었는지 여러 시간을 오가며 살피고 귀 기울여 우리에게 전한다. 광주를 만든 것은 여공들의 목소리였고 이제 그 흔적은 개발로 대부분 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어딘가에 남고 떠돌고 그리하여 이어진다는 것을 김서라의 글은 보여 준다. 모두 김서라의 광주를 함께 걷기를 바란다. 그리고 소리 내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모든 것을 다 아는 소녀의 이야기는 늘 흥미롭다. 끝까지 읽고 싶고 끝까지 알고 싶다. 그런데 끝까지 읽어도 소녀의 얼굴은 늘 떠오르지 않고 골목 끝까지 걸어도 누군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지는 않고 해가 질 때까지 걷고 걸어도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운명은 나타나지 않는다. 왜 그런 거야? 시간이 흐르고 내가 무엇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그런 기대를 하지 않게 된 지금도 모든 것을 다 아는 소녀, 따로 자라는 소녀의 얼굴은 그려지지 않는다. 아마 나란히 달려가는 마음 뜨거운 숨결 불안하게 움직이는 눈빛 같은 것만 생생하게 다가와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인가 보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아까시나무에 묶인 채 여름 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는 유현을 보았다. 반투명한 유현의 몸을 통과한 햇빛이 꼭 물결에 비친 빛처럼 그 아래쪽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부드럽게 풀린 유현의 얼굴이며 편안하게 허공에 놓인 팔다리가 하늘을 향했다. 몸속의 공기를 따뜻하게 데우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 보다가, 나는 다시 감자 줄기를 쥐었다. 마음 깊이,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듯 평화로운 마지막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어서. 마지막으로 보는 유현의 얼굴이 저런 얼굴일 수 있어서.비눗방울이 되는 약이 정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제로 저런 약이 생기면 자의로 약을 먹기보다 타의로 자신도 모른채 약을 먹게되는 경우가 빈번할 것이라는 냉정한 생각이 들어 조금 슬퍼졌다... 그래도 깔끔하고, 나름 낭만적인 죽음이다. 비눗방울이 되어 퐁, 하고 사라지는 죽음이라니.감자밭에 위에 펼쳐진 하늘 속에서 산들산들 흔들리며 반투명해진 유현의 몸통 사이로 파란 하늘이 비치던 모습과 '퐁'하고 사라진 마지막 순간이 좋았다. 사실 멀쩡한 사람이 약 먹고 비눗방울이 되어 터져 죽는 기괴한 상황인데, 약 30페이지의 이야기가 내내 밝고 경쾌한 느낌으로 진행되어서일까? 서로가 서로에게 마지막인 그 순간, 유현의 마지막을 세 명이서 함께 공유하고 함께했던 감정들이 청량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정목이의 아버지 정목이 원준이가 계곡을 향해 걸었다. 정목이의 아버지가 성큼성큼 앞서 걸었고 정목이 아버지의 뒤를 정목이와 원준이가 나란히 따라 걸었다. 그런데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정목이와 원준이가 정목이 아버지를 따르는 것 처럼 정목이와 원준이를 따르는 것이 있었는데. 뒤를 돌아보면 알 수 있겠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햇빛과 선명한 파란색의 하늘은 그대로이고 그것은 어느 다른 날의 햇빛과 하늘과 구름과 같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어느 날은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날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문장이 되게 신기하다. 문장부호가 분명히 이쯤 있어야 하는데 영원히 없음...그냥 읽으니까 문장이 잘 안 읽혀서, 가끔씩 책상 위에 손가락으로 원 세개를 그리며 읽었다. 정목이의 아버지, 정목이, 원준이. 세 동그라미가 세로로 나란히. 걷고 있는 세사람의 뒤를 따르는 무더운 여름날의 바람과 햇빛, 풀벌레와, 여름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잠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