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경성의 삶이 조립된 아파트는 갖은 사람의 욕망을 밟고 서 있다. 이 소설은 빠르고, 예측 불허하고, 통쾌하다. 그리고 재밌다! 퍼즐을 맞춰가는 유희적 즐거움을 넘어서 시간 여행자의 설렘을 느끼게 한다. 손에 잡힐 듯한 일제강점기의 생활상 속에서 입분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경성의 산책자가 된 당신을 발견하게 된다. 선과 악의 빗금 사이로 미끄러져가는 범죄스릴러!
무엇을 기억할지 결정하기가 매번 힘들었다. 그때의 모든 일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아마 영원히 그럴 게 틀림없었다. 장이 확신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그에게 빚졌다는 사실을 바 꿀 수는 없었다. 그 빚으로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망해버린다
큰 빚이 큰 부자를 만드는 진리는 언제나 통한다. 하지만 우리의 빚은 저들의 것과 다르다.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가난하다. 서로에게 내어준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노트에 눌러쓰고, 그 빚을 기억하며 평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으 로 언젠가 세상을 설득할 것이다. "테믈렌아, 이젠 가이소. 객지에서 고생 많았소. 가서 편히 쉬이소."
"그냥 조심하라고, 저번 계엄이랑 다를 거라고 하시죠. 그것 말 고는 · · 저희 아버지도 예편한 지 오래라." 그 정도는 장도 예상한 내용이었다. 몇 년 전에도 전례 없이 비상계엄이 발동됐는데 해프닝처럼 세 시간 만에 국회가 해제시켜 버렸다. 그것 때문에 대통령이 파면되긴 했지만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대통령 부부와 국방부 장관을 포함해 핵심 측근 몇이 감옥에 간 게 전부였
이었다. 그런데도 눈물이 났다. 장은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이 강처럼 흘러 한자리에 모여든 이유는 울기 위해서였다. 우는 사람은 답답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람들이 모여서 우는 게 정부에겐 비상사태였다. 광장은 원래 생겨난 시절의 모습처럼 소란스러웠다. 소매 끝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사람과 주저앉아 엉엉 우는 사람이 한데 섞여 있었다.
어젯밤 가까이서 본 말뚝의 몸통은 표면이 갈라지고 부스러질 만큼 바짝 말라 있었다. 매끈한 얼굴을 만져보기도 했다. 사람의 것인 듯 사람 같지 않았다. 장은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눈물이 났다.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누구세요. 어떻게 죽으셨어요. 입은 열리지 않았다. 보지 않고 방에 들어가면 눈물이 그쳤다.
사람들에게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오는 형국이었다. 바다에서 해변으로, 해변에서 도심으로, 도심에서 당신들 앞으로. 장의 앞에 센서 등이 하나씩 켜지고 뒤로는 하나씩 잦아들었다. 그렇게 아침에 나온 집 문 앞에 다시 섰다. 장은 낯선 기분에 휩싸였다. 건조한 나무 냄새 같은 것이 복도를 맴돌았다. 출근할 때와 무엇인가 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