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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판사는 왜 시민과 다르게 생각하는가
1장 |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한다는 것 검사는 사법부가 아니다 삼가고 삼가는 일이야말로 형사재판의 근본이다 무거운 죄를 저질렀다고 꼭 구속되는 것은 아니다 물증이 없더라도 유죄로 선고할 수 있다 죄인을 그리 가볍게 처벌하지 않는다 소년법, 무엇이 문제인가 2장 | 이익과 손해를 따져서 권리를 선언한다는 것 민사재판에서는 사람을 흥부로 보지 않는다 재판은 판사가 법정에서 말을 듣는 절차다 법정 문을 여는 열쇠, 법리와 판례 전문가 아닌 판사가 판단하는 법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 개인 파산자는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3장 | 법의 이성과 사람의 감정을 헤아린다는 것 법에도 눈물이 있다 정의의 기준을 판사가 정하지 않는다 공정한 절차가 재판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판사는 법적 안정성을 중시한다. 하지만 법치주의는 권력을 제한하고 인권을 보장한다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 4장 | 세상 물정에 어두운 판사가 세상사를 판단한다는 것 화성에서 돌아온 판사 판사는 핵인싸가 아니다 판사에게는 두 개의 양심이 있다 열정도, 무관심도 아닌 판단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 대담 시인의 마음으로 공감하는 판사가 좋은 재판을 한다 미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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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형벌론의 주춧돌을 놓은 이탈리아 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Cesare Beccaria, 1738~1794)는 1764년 『범죄와 형벌』에서 “형벌은 주어진 사정하에서 가능한 한 최소한의 것이어야 하고, 범죄에 비례하지 않으면 안되며, 성문의 법률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어느 나라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가혹하게 처벌할수록 시민사회는 위축되며 민주주의는 위협받는다. 수사절차와 형사재판은 무혐의와 무죄로 끝나더라도 개인에게 치명상을 입히므로, 장자가 말한 ‘포정의 칼’처럼 섬세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삼가고 삼가는 일이야말로 형사재판의 근본이다」중에서 이런 상황에서 실체적 진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재판을 통해서 그대로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할수록 판사는 오판에 빠질 위험이 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식능력의 한계에 비추어볼 때 절대적 진실의 발견은 불가능하다. 판사도 예외가 아니다. 법조계에서 흔히 하는 말대로,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사건 당사자가 제일 많이 알고, 그다음은 변호사이며, 가장 사건을 잘 모르는 판사가 결론을 내린다. 모름지기 형사재판을 맡은 판사는 이런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편견과 선입견 없이 백지상태에서 사건에 임해야 할 것이다. ---「물증이 없더라도 유죄로 선고할 수 있다」중에서 판사는 형법의 이념과 시민의 법감정 사이의 괴리를 고민하면서 형량을 정할 수밖에 없다. 형사재판에서 유무죄는 판사에게 익숙한 사실인정과 법리의 영역이지만, 양형은 판사가 잘 알지 못하거나 꺼리는 감정과 윤리의 영역이다. 판사는 피고인과 피해자 그리고 시민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리고 책임주의 원칙을 지키면서, 죗값이 얼마인지 성찰하고 판결문에 일상용어로 적어서 이해와 소통을 구하는 길밖에 없다. ---「죄인을 그리 가볍게 처벌하지 않는다」중에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민법은 엄숙한 표정으로 “권리 위에서 잠자는 사람은 보호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민사재판을 해온 판사로서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다. 판사도 법에 의해 재판권을 부여받았으므로, 자기 생각과 가치관은 어떻든 법의 이념과 원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법치주의다. ---「민사재판에서는 사람을 흥부로 보지 않는다」중에서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이 대립되고 판례가 변경되는 데서 알 수 있듯, 법리는 완벽하지 않고 사회가 변해 더는 타당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판사는 ‘법률가적 사고방식’에 따라 성찰하고 궁리하며, 판례가 제시한 법리와 비교하고 검토해야 한다. 이때 옛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가되 근본을 잃지 않아야 한다.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말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다. ---「법정 문을 여는 열쇠, 법리와 판례」중에서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라는 법언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먼저 ‘자기가 재판한 사건에 대해 모든 것을 판결문에 적어야 하고 다른 방법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다. 판결의 정당성은 오로지 판결문을 통해서 심사받는 것이고, 달리 중언부언하는 것은 변명이 되기 쉽다. 다음으로 ‘다른 판사가 한 재판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학문적으로 분석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단편적 사실과 인상만으로 판결을 평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재판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 마지막으로 ‘재판에 관련될 수 있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공개적인 언급을 자제하라’는 뜻이다. 특정 법률의 폐지를 공언하는 판사가 나중에 그와 관련된 재판을 맡으면 당사자는 물론 시민도 쉽게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상황이 달라지면서 이 법언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이 사법의 독립을 지키고 신뢰받기 위해 나왔다는 배경과 이유는 깊이 새겨야 한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중에서 가수 양희은은 〈그대가 있음에〉에서 “슬픔이 슬픔을, 눈물이 눈물을, 아픔이 아픔을 안아줄 수 있죠.”라고 노래했다. 『심판』을 쓴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는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체험하기에 최적의 직업이어서 법학을 선택했다.”라고 말했다. 판사는 왜 가슴이 따뜻하지 못할까? 로마의 어느 시인은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려거든 먼저 울으라고 읊었다. 이제 판사들은 법정 밖으로, 세상 속으로 뛰쳐나가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법정에서 만날 사람을 위해서. ---「법에도 눈물이 있다」중에서 대법관의 명칭이 ‘Justice(정의)’인 미국에서는 정의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다. 어느 대법관은 “안녕히 가세요, 대법관님. 정의를 실천하세요.”라는 인사를 받자, “그것은 내 일이 아니네. 내가 하는 것은 법을 적용하는 것이네.”라고 답했다. 다른 대법관은 퇴임하면서 “법관으로 재임 중 중립적이었다고 생각한 판결은 나중에 보니 강자에게 기울어진 판결이었고, 약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고 한 것은 나중에 보니 중립적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우리나라 판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정의의 기준을 판사가 정하지 않는다」중에서 재판에서 법적 안정성은 항상 지켜져야 할까? 그렇지 않다. 법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만들 수 없으므로 현실에서는 법 개념에 딱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법의 목적을 따져볼 때 문구대로 적용하면 오히려 범위가 지나치게 넓거나 좁은 사건도 일어난다. 그동안 확립된 법리와 판례에 따라 결론을 내리면 그 결과가 오히려 사회윤리적으로 명백히 부당할 수도 있다. 이때 판사가 맹목적으로 법과 종전 판례만 따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개별 사건의 특수성을 감안해서 입법자가 그 사례를 알았더라면 어떻게 법을 만들었을지 생각해서 결론 내는 것이 ‘형평’이고 ‘구체적 타당성’이다. 이 경우 판사는 법이 정한 요건에다 다른 요건을 추가하거나 예외를 두고, 가치판단적 일반조항(신의 성실의 원칙을 선언하고 권리 남용을 금지한 민법 제2조 등)을 적용하는 방법으로 정의를 지켜낼 수 있다. ---「판사는 법적 안정성을 중시한다. 하지만」중에서 화성에서 돌아온 판사의 가장 큰 문제는, 동네 사람과 공감하고 소통하지 않은 채 개념과 법리만 말하는 것이다. 유학 보낼 때 현자로 돌아오길 기대했는데, 공구만 만지작거리는 ‘법률 기술자(legal technician)’로 온 것이다. 오늘도 시민은 판사가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한다고 불평한다. 판사가 당사자를 의사소통의 상대방이라고 생각하며 말을 들어주고 공감할 때, 법정은 진정한 의미에서 소통의 장이 될 것이다. 공감은 감정이입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 같이 느끼는 감정이다. 판사는 공감능력이 있어야 시민에게 필요한 선이 무엇인지 숙고할 수 있다. ---「화성에서 돌아온 판사」중에서 법원에 전관예우가 관행적·전반적으로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시민이 그렇다고 믿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송사가 터지면 담당 판검사와 인연이 닿는 변호사를 우선순위로 삼는다. 전관 변호사는 전관예우가 불리하지 않아 부정하지 않고 은근히 이용하려 하고, 비전관 변호사는 패배의 책임을 억지로라도 떠넘기려 한다. 전관을 선임했다고 해서 이길 사건이 지고 질 사건이 이기지는 않지만, 재판받는 사람이 절차적으로 전관이 배려받는다고 느끼는 경우는 있을 것이다. 사직 판검사의 변호사 개업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전관예우라는 유령은 사라지지 않는다. ---「열정도, 무관심도 아닌」중에서 판사는 세상 물정에 어둡지만 세상만사를 판단한다. (…) 사안의 실체와 핵심을 정확히 알려면 세상 물정에 밝아야 하는데, 책상물림 판사는 대체로 세상이 돌아가는 실정이나 형편에 어둡다. 학자들은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사물의 본성’을 논하지만, 그 말을 수백 번 곱씹어도 세상 물정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쓰라린 세상의 리얼리티는 장터나 사무실에서, 거리나 지하철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하면서도 다양한 세상만사를 가늠하는 판사는 선입견 없이 입장을 바꾸어 요모조모 생각하면서 분쟁의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길밖에 없다. ---「판단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중에서 김현섭_“판결문에 감정의 이유를 개념화하여 풀어 써주면서 판사 자신도 단순히 각서의 내용대로 이행하라는 명령을 넘는 자신의 결론이 정당한지 반성할 수 있고, 원고도 판사가 피고의 감정에만 편향적으로 매몰되어 내린 자의적 판결이 아님을 이해하고 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상소가 제기된 경우 상급심 법원이 원심에서 제시한 법리를 재검토할 수 있으며, 추후 유사한 사건을 처리하는 다른 판사에게도 참고 자료가 될 것입니다. 판사의 직관과 감정에서 출발하되 그 근거를 개념화하여 법리를 전개하면, 당해 사건을 타당하게 해결할 뿐만 아니라 관련 법규의 내용을 발전시켜 우리 판례법의 형성에도 기여할 수 있겠습니다.” ---「대담_시인의 마음으로 공감하는 판사가 좋은 재판을 한다」중에서 박형남_“저도 어떤 사건에서는 논증뿐만 아니라 판결문에 공감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이성을 갖고 있지만 그보다 먼저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고 느끼는 감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시인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고 읊었지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치이고 억눌리고 고통 받은 사람이 법원의 문을 두드릴 때, 시인의 마음으로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태도가 좋은 결론도 도출하면서 그 사람을 부축해 일어서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담_시인의 마음으로 공감하는 판사가 좋은 재판을 한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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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가고 삼가는 일이야말로 형사재판의 근본이다.”
-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한다는 것 형사재판은 사람의 죄와 벌을 가늠한다는 점에서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큰 재판이라면 그에 거는 기대와 원망도 못지않게 무겁다. 보통 사람들이 재판의 결과에 따라 판사를 추켜세우거나 비난을 서슴지 않는 것도 형사재판이 갖고 있는 무게감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구속영장을 발부했는지 여부로 피의자의 죄를 단죄했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시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박형남 판사는 구속 여부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감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영장이 발부되었다고 다 유죄로 선고되는 것이 아니고, 영장이 기각되었다고 처벌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37쪽)라는 것을 강조한다. 구속영장을 남발할 때 “가족은 있는 돈 없는 돈을 모아 합의금을 마련하고, 사돈의 8촌까지 동원해서 경찰이나 검사와 연줄이 닿는 사람을 찾아다니는”(34쪽) 풍경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대중의 편견을 강하게 만들 뿐이다. 양형은 형사재판에서 특히 민감한 주제다. 세계 최초 성문법인 함무라비법에서 규정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칙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보다 합리적이고 개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현대의 양형은 동해보복(同害報復)의 법 감정을 극복했지만, 시민들은 재판 결과를 보면서 여전히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무겁게 처벌하면 범죄가 줄어들 것이라는 ‘엄벌주의’는 어떤 사회에서도 입증되지 않았다. 판사는 양형위원회를 거치며 만들어진 양형 가이드를 적극 참고하되, 디지털 성범죄를 비롯한 성폭력 범죄에 더욱 중한 처벌을 내리고 범죄의 충격을 피해자 입장에서 고찰하는 노력을 기울일 때 판사에 대한 시민의 신뢰도 좀 더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판사가 재판을 통해 어떻게 ‘실체적 진실’을 찾느냐 하는 것도 무척이나 어려운 문제다. 형사재판은 사건의 진상을 명백히 밝히는 게 가장 중요한데, 그때그때 바뀌는 증언과 범인이 남긴 희미한 흔적만 가지고 처벌을 한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다. “실체적 진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재판을 통해 그대로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할수록 판사는 오판에 빠질 위험이 있다.”(42쪽) 그렇기 때문에 적법절차 안에서 실체적 진실이 재구성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진실은 허구이고 재구성될 뿐이라는 뜻은 아니다. 판사는 “몇 가지 법 지식보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앎이 훨씬 중요하고, 선의로 이해하는 마음과 올곧은 결기를 아울러 갖추어야”(44~45쪽) 실체적 진실에 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다. 판사는 형법의 이념과 시민의 법감정 사이의 괴리를 고민하면서 형량을 정할 수밖에 없다. 형사재판에서 유무죄는 판사에게 익숙한 사실인정과 법리의 영역이지만, 양형은 판사가 잘 알지 못하거나 꺼리는 감정과 윤리의 영역이다. 판사는 피고인과 피해자 그리고 시민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리고 책임주의 원칙을 지키면서, 죗값이 얼마인지 성찰하고 판결문에 일상용어로 적어서 이해와 소통을 구하는 길밖에 없다. - 54쪽 2. “민사재판에서는 사람을 흥부로 보지 않는다.” - 이익과 손해를 따져서 권리를 선언한다는 것 법치주의 국가인 우리나라 역시 민법이 매우 중요하다. 민법의 원칙 중 핵심은 ‘사적 자치의 원칙’, 다른 말로 ‘계약 자유의 원칙’이다. 그런데 이 원칙을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순진한 사람이 거짓말에 속아 계약하고 손해를 보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너무나 안타깝지만 민법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능력이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시민들은 법을 잘 알고 자기 이익을 스스로 챙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민법의 차가운 정신은 더 넓은 사회적 관계와 따듯하고 인간적인 삶을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편 이익과 손해를 따져서 권리를 선언하는 데 있어 ‘법리(法理)’와 ‘판례(判例)’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판례는 판결의 지침이 된다는 점에서 사실상 법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판사는 대법원 판결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판례가 제시한 법리를 비교하고 검토하면서 “옛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가되 근본을 잃지 않아야 한다.”(86쪽) 보통 사람들에게 재판에서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다름 아닌 판결문이다. 재판의 결론인 ‘주문(主文)’과 주문에 도달하기까지 논증 과정을 적은 ‘이유(理由)’로 구분되는 판결문은 법치주의를 실현하는 데 핵심적이다. 우리나라 판사들이 일주일 동안 쓰는 판결문은 만 개가 넘는다. 그렇게도 많은 판결문이 만들어지건만, 오랫동안 법원을 출입한 기자는 판결문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판사님들을 만나보면 성격이나 취향과 생각이 다 다른데, 어째서 판결문은 한 틀에서 나온 것처럼 똑같나요?”(97쪽) 상당수 판사가 판결문을 쓸 때 당사자보다 상급법원을 더 의식하면서 판결문의 가독성과 이해도가 떨어진다는 비판 또한 피하지 못한다. 판결문에는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 해도, 시민에게 신뢰받는 판결문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은 그만큼 재판이 시민의 삶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민법은 엄숙한 표정으로 “권리 위에서 잠자는 사람은 보호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민사재판을 해온 판사로서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다. 판사도 법에 의해 재판권을 부여받았으므로, 자기 생각과 가치관은 어떻든 법의 이념과 원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법치주의다. - 70~71쪽 3. “판사는 법적 안정성을 중시한다. 하지만” - 법의 이성과 사람의 감정을 헤아린다는 것 법은 냉혹해 보이지만 법정은 눈물과 한숨이 끊이지 않는 통속 드라마다. 형사 법정이든 민사 법정이든 “법에도 눈물이 있지 않느냐.”고 하소연하며 판사가 고통을 들어주고 눈물을 닦아주길 바라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박형남 판사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과 피해를 법의 언어와 논리를 통해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 재판의 근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09년 한 공무원이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로 목숨을 끊은 뒤 공무원연금공단이 유족에게 보상금을 주지 않자, 박형남 판사는 정신과 교수에게 ‘심리적 부검(psychological autopsy)’을 의뢰해 당사자가 업무상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는 취지의 감정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의사 사위의 뻔뻔한 지참금 청구소송이나 방문목욕 서비스를 받은 80대 할머니에 대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부당한 처우 등에 대해 약자의 입장에 서서 판결을 내렸다. 이와 같은 판결에는 미국의 법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말한 ‘시적 정의(poetic justice)’가 스며들어 있다. “억울한 사람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고 보듬어주는 것이 ‘법의 눈물’”(119쪽)임을 잊지 않고 시적 정의에 목마른 시민에게 응답하는 것이 판사가 해야 할 일이다. 법과 정치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1987년 민주 헌정 체제가 만들어진 이후 헌법재판소가 활성화되면서 정치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대통령 탄핵, 과거 청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등)가 있을 때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큰 역할을 해왔다. 이와 같은 ‘정치의 사법화’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20세기 후반부터 여러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법원이 정치적인 쟁점을 보다 진보적으로 이끄는 면도 있지만, 정당이나 국회가 정치적인 결정을 법원에 떠넘기는 문제도 발생한다. 정치권력이 사법부의 판단을 유도하거나 재판이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하는 ‘사법의 정치화’ 또한 발생한다는 것도 고민거리다. 현행 제도를 개선하는 것은 물론, 법원이 스스로의 권한을 억제하면서 한국형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를 줄이는 노력이 함께해야 한다. 대법관의 명칭이 ‘Justice(정의)’인 미국에서는 정의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다. 어느 대법관은 “안녕히 가세요, 대법관님. 정의를 실천하세요.”라는 인사를 받자, “그것은 내 일이 아니네. 내가 하는 것은 법을 적용하는 것이네.”라고 답했다. 다른 대법관은 퇴임하면서 “법관으로 재임 중 중립적이었다고 생각한 판결은 나중에 보니 강자에게 기울어진 판결이었고, 약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고 한 것은 나중에 보니 중립적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우리나라 판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 128쪽 4. “판사는 ‘핵인싸’가 아니다.” - 세상 물정에 어두운 판사가 세상사를 판단한다는 것 우리나라 판사들은 ‘화성에서 돌아온 판사들’이다. 공부하느라 세상과는 담을 쌓은 채 수백 년 전의 법률가들과 마찬가지로 법률 개념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고 분쟁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판사다. 그러다 보니 법을 공구상자처럼 사용하는 ‘법률 기술자’로만 살아가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판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이다. 시민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판결은 사람에게 답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적 논증은 필수적이지만 감정에 호소하고 설득하는 것도 꼭 갖추어야 한다. 재판이 마음에 와닿으려면 왜 이 사람이 이런 일에 빠져 법정에 올 수밖에 없었는지 따뜻한 가슴과 섬세한 눈으로 보아야 한다.”(168쪽) 인문학적 성찰과 사회과학적 분석이 함께할 때 법정은 진정한 의미에서 소통의 장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판사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외부 사람과 사교 관계도 없고 검사나 변호사와도 큰 교류 없이 조용히 산다. ‘판단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인 판사들의 일상은 고단하기 이를 데 없다. 법원 내부 조사에 따르면 “전체 판사의 48퍼센트가 주 52시간 이상 일했고, 60퍼센트는 주말 근무, 50퍼센트는 주 3회 이상 야근”했으며,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한 판사도 52퍼센트나 되었다.”(195쪽) 책상에 틀어박혀 한 주 내내 판결문을 쓰고 잠깐 법정에 서는 판사들은 그야말로 ‘고슴도치형 인간’이다. 바로 이렇게 세상과 격리된 판사들이 세상만사를 판단한다는 게 아이러니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시민들도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는다. 여전히 전관예우가 널리 퍼져 있다는 믿음이 대표적이다. 이럴 때일수록 판사들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양심이 아니라 공정성과 합리성에 근거해서 법을 해석하는 직무수행상 양심, 즉, ‘법조적 양심’을 가지고 판결해야 한다는 것이 박형남 판사의 지론이다. 언제나 회의를 거듭하면서 법조적 양심에 따라 세상만사를 판단하려 힘쓸 때 판사에 대한 시민의 시선도 보다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판사는 세상 물정에 어둡지만 세상만사를 판단한다. (…) 사안의 실체와 핵심을 정확히 알려면 세상 물정에 밝아야 하는데, 책상물림 판사는 대체로 세상이 돌아가는 실정이나 형편에 어둡다. 학자들은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사물의 본성’을 논하지만, 그 말을 수백 번 곱씹어도 세상 물정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쓰라린 세상의 리얼리티는 장터나 사무실에서, 거리나 지하철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하면서도 다양한 세상만사를 가늠하는 판사는 선입견 없이 입장을 바꾸어 요모조모 생각하면서 분쟁의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길밖에 없다. - 199~200쪽 5. 시인의 마음으로 공감하는 판사가 좋은 재판을 한다 - 대담_박형남 판사 × 김현섭 서울대 교수 책의 마지막에는 박형남 판사와 서울대학교 철학과 김현섭 교수(윤리학, 법철학)의 대담을 실었다. 김현섭 교수는 사법연수원에서 박형남 판사에게 ‘민사재판실무’를 배운 젊은 법학도였고, 판사 생활을 하다 철학으로 발길을 돌려 법철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두 사람의 우애 어린 대화는 판사의 실제 생활, 판결문에 얽힌 감정의 문제, 우리 사법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과 법원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폭넓게 펼쳐 보여준다. 책에서 못다 한 이야기가 상세하게 펼쳐지면서 독자들은 법철학적인 고민을 더욱 풍성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는 박형남 판사가 오랫동안 법정의 울타리를 넘나들며 해온 고민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풀어낸 책이다. 30여 년의 시간 동안 한 사람의 재판관이 인문학적 성찰과 사회과학적 분석을 통해 법의 마음과 눈물을 하나씩 살핀 성장 기록이기도 하다. 억울한 사람의 눈물에 공감하며 보다 엄정하면서도 인간적인 재판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판사의 냉철한 정신과 따뜻한 마음을, 더 나아가 법의 진심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가수 양희은은 〈그대가 있음에〉에서 “슬픔이 슬픔을, 눈물이 눈물을, 아픔이 아픔을 안아줄 수 있죠.”라고 노래했다. 『심판』을 쓴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는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체험하기에 최적의 직업이어서 법학을 선택했다.”라고 말했다. 판사는 왜 가슴이 따뜻하지 못할까? 로마의 어느 시인은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려거든 먼저 울으라고 읊었다. 이제 판사들은 법정 밖으로, 세상 속으로 뛰쳐나가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법정에서 만날 사람을 위해서. - 118~11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