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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는 @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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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품의 구성 소개

책소개

목차

『어딘가에는 마법의 정원이 있다』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
『어딘가에는 아마추어 인쇄공이 있다』
『어딘가에는 원조 충무김밥이 있다』
『어딘가에는 도심 속 철공소가 있다』

저자 소개5

나이, 학력, 성별, 출신 지역 등 서로를 구분하는 모든 경계를 허물고 싶은 프로 N잡러. 국내외 생태마을을 오가며 생태관광, 퍼머컬쳐, 업사이클 디자인 등을 공부하고 이를 통해 사람과 자연을 대하는 철학과 기술을 배웠다. 평소에는 생태문화기획자로 활동하다가도 때때로 텃밭 교사, 정원사, 축제 기획자, 정책 연구자 등으로 변신한다. 순천에서 생태적인 지역 축제와 마을 만들기 사업을 벌이다 3년간 순천시 도시재생 저전동 현장지원센터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주민들과 함께 오래된 동네를 정원마을로 일군 경험을 바탕으로 식물과 정원이 사람들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마법 같은 힘을 알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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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신문〉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옥천 곳곳의 이야기를 취재하고 기록했다. 그 속에서 소멸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를 봤다. 있지만 없던 이야기, 묵혀놓은 이야기들이 투명하던 강을 흐리게 만들면서 떠오르는 것을 봤다. 이는 혼란이 아니라 해방이었다. 이주, 페미니즘, 동물권, 기본소득 등에 관심을 두고서 지금은 옥천군결혼이주여성협의회, 어스링스, 기본소득신진연구자네트워크 등에서 학업과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우리네 삶이 각각 다름을, 동시에 서로에게 기대어 있음을 보여주는 활동들이다. 각자의 경계, 모두와의 경계에서 느슨한 공동체를 이루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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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예창작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지금의 아내와 함께 진로를 고민하다 우연히 ‘레터프레스’를 알게 되었고, 그 매력에 빠져 지금까지 직접 그린 그림을 손수 인쇄하는 일을 하고 있다. 2018년 ‘어느한장면’이라는 이름으로 레터프레스 업체를 열어서 운영하고 있다. 2019년 결혼한 뒤로는 강원도 태백으로 이주하여 3년째 지역에 대해 알아가는 중이다. 자연, 동물 등을 담은 작품들을 꾸준히 소개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태백의 숲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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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문화와 지역 사회 다방면에 깊은 관심을 갖고 널리 알리는 기사와 글을 쓰고 있다. 기자가 본업이지만, 음악과 책을 사랑하는 기획자이자, ‘경남마을공동체지원센터’의 마을공동체협력지원가이기도 하다. 2016년 통영 로컬 언론 〈한산신문〉에서 일하며 진행한 ‘책 읽는 도시 통영’ 캠페인으로 언론진흥재단 이사장상을 수상하였다. 현재는 로컬미디어 인터넷신문 〈문화마당〉의 대표기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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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오롯이 학창 시절을 보냈다. 대학을 마치고 문화 기획과 예술 교육의 현장에서 일했다. 문화예술 단체와 공기업에서 근무했고 대학원에서 문화예술경영을 공부했다. 이후 보다 안정적인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동네 근처에서 창업했다. 2019년 ‘다니그라피’라는 이름으로 1인 출판사를 열고,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한데 모은 로컬숍 ‘머물다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쓰고 찍고 만들고 싸돌아다니는 일을 좋아한다. 대전의 여러 동네를 기웃거리며 마을 중심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나 사람들을 만나 기록하는 아카이빙 작업을 하고 있다. 먼 훗날의 유물을 지금 만들어가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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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7월 06일
쪽수, 무게, 크기
808쪽 | 1136g | 125*195*40mm

책 속으로

꽃 선물은 받는 사람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게 한다. 이것은 꽃의 힘, 꽃의 마법이다. 나는 늘 이런 꽃의 힘을 더 많이 알고 싶었다. 그래서 어른이 된 지금도 종종 〈꽃의 요정 메리벨〉 주제가를 떠올리곤 한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비밀이나 비법, 은밀하게 전수해야 할 것들을 노래로 남기니까 말이다.
---「들어가며_꽃의 요정 메리벨」중에서

손님들이 가득하고 자연스레 매출도 오르니 시장 상인 분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썰렁하던 전통시장이 활기로 가득 찼다. 정말 마법 같은 일이었다. 이 마법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문화기획자를 아시나요」중에서

1997년, 순천 시민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순천만의 가치에 공감하길 바라며 제1회 순천만 갈대제를 기획한다. 갈대제는 당시 예민했던 환경 이슈를 시위가 아닌 축제의 장으로 풀어낸 사례다. 지역 문제를 일상의 즐거움으로, 자신들의 삶과 연결되는 문화로 승화시킨 점이 놀라웠다.
---「흑두루미와 춤을」중에서

내 손바닥만 한 크기나 될까 싶은 새집 안에는 몇 개의 알이 있었고, 이윽고 날아온 작은 새가 알을 포옥 품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그저 감탄하며 새삼 내가 생생한 자연 속에 살고 있음을 실감했다.
---「숲으로 한 걸음」중에서

나는 아랑곳의 전공 과정 중 하나였던 ‘숲에서 살기학’을 좋아했다. 이 수업은 인간이 가진 야생의 본능을 일깨우고 스스로의 손으로 삶을 영위하는 기술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하이라이트는 ‘아날로그 포레스트리Analog Forestry’였는데, 스리랑카에서 만든 교육이다.
---「아날로그 포레스트리」중에서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가 엉켜 있는 도시에서 해결책을 제시하고 또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형사들이 범죄 현장에서 많은 단서를 찾는 것처럼 도시의 문제도 현장에서 단서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 먼저 저전동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골목을 걷고 사람을 만나며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무엇이 불편한지, 동네 골목마다 어떤 특징과 역사가 있는지 살폈다.
---「정원이란 만능열쇠」중에서

정원은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가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함께 이야기를 보탤 수 있는 길이 되어주었다. 저전동에서 정원은 그 자체로 지름길이었다.
---「정원으로 가는 지름길」중에서

결국 도시재생을 통한 마을 만들기는 정원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느냐가 아니라 서로를 돌보는 관계망을 어떻게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
---「할매들의 의자」중에서

그때까지 먹을 수 있거나 보면서 즐길 수 있는 식물만 중요하게 생각하던 내가 부끄러웠다. 눈앞의 이득만 고려하는 인간의 관점이 아닌 생명의 순환이라는 숲의 관점에서 식물을 다시 볼 필요가 있었다.
---「일곱 빛깔 나비들」중에서

개인적으로는 1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민 모임에서 튤립 구근을 나눌 때가 가장 좋았다. “우리 겨울 동안 잠시 헤어졌다가 튤립이 피는 4월 초에 다시 만나요!” 이런 약속을 나누는 것이 ‘정원마을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식물 도둑을 모십니다」중에서

뿌리내리고 산다는 것은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이다. 나에게 맞는 곳을 찾거나, 내가 있는 곳을 멋지게 만들거나. 그동안 순천에서 자연에서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들로 내가 사는 저전동을 더 나은 마을로 만들기 위해 오늘도 골목을 걷는다.

---「지속가능성 앞에서」중에서

아내는 손으로 만드는 일에 대한 흥미를 느끼는 것을 넘어서 그 과정 전체를 알아가고 실행해나가는 데 가치를 두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가 같이 일을 해나간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작은 확신이 들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꿈꾸는 ‘어떤 삶’의 모습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내가 뜬금없이 보여준 ‘챈들러앤프라이스’라는 기계의 영상으로 우리의 삶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 p. 9

레터프레스라는 인쇄를 시작하게 된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그 이유들은 시간이 지난 뒤에 붙여진 의식적인 의미 부여일 뿐이다. 솔직히 말해 그 당시 우리를 이끌었던 것은 ‘우연’이었다. 어떤 대단한 뜻이 있어서 레터프레스라는 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내와 나는 한 가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한 과정 속에 놓여 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이 무수한 실패의 연속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누구나 한 번쯤은 망한다. 언제 어떻게든 망할 수 있는 게 삶이고 인생인데 뭐든 해보자. 두 손 두 발 다 있고 머리도 있는데 못 할 게 뭐 있느냐’라는 당참을 보여줬다.
--- p. 22

불과 1960, 70년대까지만 해도 활판인쇄는 우리나라에서 활발히 사용되었지만 80년대에 들어 디지털 출판 기술이 발달하면서 급속도로 사양세에 접어들었다. 이렇다 보니 80, 90년대에 태어난 우리 부부로서는 레터프레스가 더욱 생경하고 신기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 손으로 한 장씩 종이를 넣어가며 잉크의 색은 어떤지, 그 양은 적당한지, 위치는 올바르게 맞아떨어지는지 등을 확인하며 작업하는 일은 너무나 번거로워 보였다. (…) 그러나 그 ‘번거로움’이 어느 순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버튼만 누르면 인쇄가 되는 세상에서 잉크를 조색해 판에 묻혀 종이에 찍어내는 그 공정이 특별해 보였다. 이처럼 뭐든 빠른 세상에서 한 땀 한 땀 차근차근 해내는 일이라니, 매력적이지 않은가.
--- pp. 29~30

‘다음에 또 올게요’ 하고 재단집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드디어 해냈다는 마음에 작게 탄성을 질렀다. 너무나 기뻤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아내와 나는 재단된 종이들을 살펴보았다.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로 깔끔한 단면! 정말 만족스러웠고 재단기 성능에 대해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날 재단비는 5천 원. 그 5천 원은 그동안 재단이라는 난제로 쌓였던 스트레스를 단박에 날린 우리 인생 최대로 값진 5천 원이었다.
--- p. 46

을지로, 그 삶의 분주함을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날 우리가 호기롭게 들이대지 않았더라면 영영 두려운 곳으로만 기억됐을 수도 있다. 그만큼 우린 인쇄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몰랐고 그분들은 베테랑이었다. 그 벽이 참 높게만 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은 것은, 물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간단한 순리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요구하면 누군가 잘못된 점과 고쳐야 할 점을 짚어주며 더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그렇게 직접 부딪쳐가며 을지로의 언어와 생태계를 배우다 보니, 이제는 그곳 사장님들과 함께 뭐든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에게 을지로는 가장 든든한 뒷배인 셈이다.

--- pp. 49~50

이주여성은 누구인가. 이들은 자신을 이렇게 명명했다. ‘가난한 집 맏딸’. 익숙한 단어다. 산업화 시기 급격히 빈곤해진 농촌사회에서 서울로 돈을 벌러 간다던 한국의 ‘맏딸’들이 꼭 그랬었으니까.
--- p.17

이주여성들은 한국 생활에 적응해가면서, 기대와 꿈이 좌절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이주를 통해 원 가족의 계층 상승을 도울 수 있다는 성공 신화, 드라마 속 삶을 살 수 있다는 환상이 산산조각 나는 경험이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속았다’는 표현을 한다. 하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나간다. 새로운 환경이지만, 자신의 삶을 바꿔나가기 위해 무급노동인 가사노동, 출산과 육아, 시부모 모시기, 가내노동(농사)을 수행하며, 동시에 생계비를 벌어오는 역할도 수행한다.
--- p.21

이주여성은 다문화가족의 일원이다. 다문화가족이란 말 그대로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는 가족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주여성들은 자신들의 생활이 다문화가족의 생활이 아니라고 말했다. 자신이 자라온 문화, 언어, 전통을 모두 버리고 한국문화에 동화되도록 강제당하기 때문이다.
--- p.32

“한국 왔으니까 한국법만 따르라고 해요. 베트남 언어 못 쓰게 하고. 베트남 방송도 못 보게 하고. 베트남 음식 못 먹게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집에서 한국 음식만 먹으라고. 한국 사람도 베트남 음식 좋아하지 않아요? 한국 사람은 다른 나라 갔다고 음식까지 다 바꾸지 않잖아요. 왜 맨날 무조건 베트남 사람한테만 음식이랑 언어랑 친구랑 다 바꾸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 p.33

“제가 좀 알아서 하게 두면 좋겠어요. 저 잔업 많이 해도 150만 원 받았거든요. 근데 남편이 돈을 안 버니까 그거 생활비로 써야 하는데. 그때 시어머니가 너 적금 안 하면 아기 안 보여준다고 해서 힘들어도 눈 딱 감고 매달 50만 원씩 적금했어요. 내 통장 아니고 시어머니 통장에. 시어머니가 확인해야 하니까. (...) 아예 제 생활은 없죠. 친정에는 아예 돈 못 보내고.”
--- p.39

“저 그냥 사람인데. 자꾸 저를 나쁜 눈으로 보는 느낌이에요. 그냥 돈을 주면 나를 살 수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제가 시집온 건 그냥 한 사람과 잘 살아보려고 그리고 제 인생을 잘 살려고 한 거잖아요. 근데 이 사건만 봐도, 무슨 물건처럼, 자꾸 얼마 주면 살 수 있다는 식으로 하잖아요.”
--- p.42

“한국인 며느리라면 싸운 뒤에 막 화해시키려고도 하고 자기 아들 야단도 치고 그러는데, 베트남 며느리한테는 얼마 주면 되냐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도망가는 것도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돈 주면 막 대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말했죠. 어머니 우리 돈 받으려고 결혼한 거 아니에요. 우리 돈 벌려고 한국 온 건 맞지만 남편이랑 결혼해서 더 잘 살아보려고 온 거예요. 그냥 결혼 대가로 얼마씩 돈 받으려고 그런 게 아니에요.”
--- p.63

“진짜 욕하고 때리는 일은 정말 많아요. 몇 대 치는 정도는 그냥 화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요. 근데 그게 심해져요. 나중에 112 신고할 정도면 심각한 거예요. 목을 조르는데 정말 죽을 수 있다고 느끼는 거죠. 근데도 경찰이 와서 하는 말이 사이좋게 지내라고 해요. 몇 번이나 신고했는데도 맨날 와서 하는 말이 사이좋게 지내라는 거예요.”
--- p.66

“이혼하기 전에 개명을 했고 국적 받았어요. 그냥 그걸로 끝이에요. 남편은 안 쫓아내는 걸 다행으로 알라고 말하고. 돈이 없으니까 변호사를 따로 구할 수도 없고. 아기 얼굴이라도 보여준다고 하면 고마운 거예요. 어떤 친구는 남편이 때려서 이혼했는데도 아기 뺏겼어요. 맨날 아기 보고 싶어서 울어요.”
--- p.68

“친구는 평생 시어머니 밭에서 일했는데. 나갈 때 한 푼도 없어. 농작물 판 돈은 다 시어머니 통장으로 들어가요. 집에서 일하는 거니까 월급도 못 받아. 아이 키우고 싶은데 나가서 일해야만 아이 볼 수 있다고 해서 밭에서 매일 일했는데, 결국 헤어질 때 되면 빈손으로 나가는 거죠.”
--- p.69

“다문화가족협의회라고 있어요. 그런데 그 협의회가 남성 중심적이에요. 제가 그래서 회장에게 물어본 적도 있어요. 다문화가족협의회에서 여자는 임원이 될 수 없냐고. 그랬더니 그러더라고요. 여기는 남자만 임원 하는 거라고. 그래서 내가 남자만 의견을 내고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차라리 다문화남편협의회라고 이름을 바꾸라고 비꼬기도 했어요.”
--- p.86

“다문화가족 지원이라는 것이 이주여성이 다문화가족 안에서 힘들어도 다문화가족 자체가 그냥 잘 굴러가면 괜찮다는 거잖아요. 그러다가 이주여성이 탈락하면, 그냥 이주여성만 고국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고요. 그러면 다시 이주여성 한 명 데려와서 다문화가족 안에 데려다놓고요. 그럼 나는 뭔가요. 나는 다문화가족의 평화를 위한 희생양인 건가요?”
--- p.87

“저는 제 이름 ○○○으로 살고 싶어요. 근데 다문화가족이란 이름으로 저를 누군가의 며느리, 부인, 엄마일 때만 지원하는 거잖아요. 제가 만약 그 위치를 벗어나면요. 저는 아무것도 지원받을 수 없어요. 저는 그냥 저로 살고 싶어요.”
--- pp. 93~95

“저는 이 자리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옥천 주민의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지, 어떻게 하면 해결될 수 있는지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이기 전에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 p.100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충무김밥 원조집은 어디예요?”
하도 많이 들은 질문이라 무심히 적당한 답변을 주워 전하곤 했으나 생각해 보니 새삼 신기하기도 하다. 언제부터 통영항 강구안에 충무김밥집이 이렇게나 많이 늘어서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강구안에는 충무김밥집이 이렇게 많았을까」중에서

내가 기억하는 1990년대 충무김밥에는 꼴뚜기 중에서도 제법 큰 것을 꼬치에 꿰어 내놓거나 몇 번 숭덩숭덩 잘라 오징어무침 하듯 만들어 반찬으로 곁들였다. 물론 건어물점의 말린 꼴뚜기를 볶아 낸 것과는 전혀 다르다.
---「충무김밥의 스탠더드」중에서

어디선가 충무김밥이 맛없다고 느꼈다면, 그 이유는 명쾌하다. 저품질 식재료를 썼거나, 만들 때 정성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음식인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특히 충무김밥은 식재료를 다루는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난다. 단순 명료해서 맛있고, 그만큼 잔재주로 맛을 속일 수 없는 음식이다.
---「별거 아닌 듯 별거 있는 맛」중에서

섞박지의 각도는 충무김밥집 할매와 아지매들이 일일이 측정해 가며 잘라 낸 게 아니라, 경험의 공유와 계승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야말로 ‘손맛’이다. 질서 정연하고 반듯하게 썰어 내지 않고, 무를 돌려 깎아 낸다는 느낌으로 숭덩숭덩 넓고 크게 잘라 내는 것이 중요하다. 너무 두꺼우면 안 되고 적당히 얇아야 간이 충분히 잘 배어들어 시원한 식감을 자아낸다.
---「섞박지, 15도와 20도 사이」중에서

통영 여행자의 동선마다 충무김밥집이 있다. 통영 여행자의 동반자랄까. 통영에 발을 디딘 여행객을 가장 먼저 반기는 향토 음식이 충무김밥이며, 섬으로 향하는 여행자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도 충무김밥 간판이다. 애초에 충무김밥은 뱃사람 또는 여객선 여행객의 간편식으로 탄생했으니, ‘여행자의 음식’이라는 정체성은 충무김밥집이 자리 잡은 위치에서도 알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김밥집이 제일 많은 곳」중에서

충무김밥의 공간은 충무김밥집 실내보다는 충무김밥집 창밖으로 바라보는 항구, 또는 통영 풍경 그 자체다. 동피랑 꼭대기 동포루일 수도 있고, 서피랑 언덕일 수도 있고, 이순신공원 바닷가일 수도 있다. 한산도 제승당을 오가는 카페리 위에서 먹는 충무김밥은 통영 여행의 ‘결정적 순간’이 된다.

---「맛의 완성은 통영 풍경」중에서

중앙시장에도 맛있는 먹거리가 넘치지만, 아무래도 대전역의 명물로 손꼽히는 것은 바로 ‘가락국수’이다. 이 가락국수가 유명해진 데에는 재미난 사연이 있다. 경부선 철도 개통에 이어 1914년에는 대전에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경부선에서 호남선으로 갈아타려면 꼭 대전역을 거쳐야만 했다. 이때 열차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기차가 잠시 멈추었는데, 승객들은 환승을 기다리는 잠깐의 짬을 이용해 승강장에서 재빨리 가락국수를 먹곤 했다. 짧은 시간에 기차역에서 후루룩 먹는 국수 한 그릇이라.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 p.19

한국전쟁 때부터 조성되어 7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역전시장은 대전시의 역사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 주변 지역의 농민들이 기차역과 가까운 대전역 광장에 나와 물건을 팔며 형성된 이 시장은 좋은 농산물이 많아 한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화려했던 시절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역전시장 골목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점포도 점점 줄어들고 왕래하는 사람도 적어진다.
--- p.27

“우리 집이 산내였는데, 그때는 아주 시골이었어. 내가 중학교 3학년을 댕기다 학교를 중퇴했어. 돈이 없어서. 그때만 해도 철공소 하면 돈을 엄청 많이 번다고 했거든. 그래서 아버지 지인이 추천해줘서 여기 남선기공이라고 있었는데, 거기 주물부로 취직을 했어. 그때가 열일곱 살 때였지.”
--- p.53

과거 남선기공 주변에는 학고방이라 불리던 작은 판잣집이 많았다. 6.25 전쟁 이후에 피난민이 몰려와 대전역 근처였던 원동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땅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피난민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남선기공이 처음 설립된 1950년 3월 1일, 그로부터 겨우 100여 일이 지난 시점에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 당시 원동은 전쟁과 가난의 상처가 뒤엉켜 사건, 사고가 줄지어 일어나는 때였다.
--- pp.56~57

“제가 공장 짐 자전거를 타고 작업복 입고 아침에 출근하면, 우리 친구들 중에 충남중학교 다니는 애들이 반갑다고 (자전거) 좋다고 막 그랬어요. 자전거에다가 자기들 가방도 싣고요. 여기 영광교회 옆에 공장이 있었는데, 이제 거기까지 오면 그 애들이 와서 (자전거에 실었던) 가방 들고 학교 가고 그랬던 시절이 있었어요. 저는 그 애들이 참 부러웠죠.”
--- p.93

“예전에 제가 인동 쪽에 기계 제작하는 업체에서 일할 때, 공고에 교사 발령을 앞두고 잠깐 공장에서 일했던 분이 있었어요. 어느 날 그분이 양복을 쫙 빼입고 왔는데, 그날 일하다가 손목이 절단된 거예요. 저는 큰 기계 쪽에서 일하고 그분은 작은 기계를 가지고 일하고 있었는데, 악! 소리가 나길래 보니까 뭐가 휙 날아가더라고요. 그분 손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급히 선병원에 막 이렇게 손을 붙들고 갔죠. 그때가 한여름이었는데 날씨도 우중충하고 그랬어요. 그날 제가 그걸 보고 충격을 받아서 직업을 전환할까 고민도 했어요. 이 일을 하기 싫어지더라고요. 그분이 입원해서 병문안을 가야 하는데 낙심한 모습을 상상하니까 진짜 발도 잘 안 떨어지더라고요.”
--- p.110

잠깐 식사할 때를 빼고 작업시간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퇴근 후에나 다른 공장의 기술자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퇴근 후 두부두루치기나 오징어두루치기와 함께 막걸리 한잔 하는 것이 바쁘고 고된 하루를 보낸 기술자들의 낙이었다. 한창 작업할 때는 다들 바빠서 얼굴 볼 시간이 없으니 퇴근 후 술 한잔이 철공소 장인들의 유일한 교류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힘든 노동 후에 담소를 나누며 함께 마시는 술 한잔이 위로이자 행복이었다.
--- p.131

디자인을 전공하거나 도면 그리는 법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는 장인이지만, 오랫동안 이 분야에서 일을 하다 보니 제작을 위한 드로잉에도 절로 능통해졌다. 손님의 요구사항을 듣고 종이에 쓱쓱 스케치하고 보여주면, 훨씬 더 빠르고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다. 장인의 능력은 이뿐만이 아니다. 도면을 그리는 작업은 손님과의 소통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지만, 개인적인 창작 활동을 할 때 스케치 따위는 필요 없다. 그냥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손을 움직이면 어느새 근사한 철공 작품이 뚝딱 완성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장인의 창작품들이 전송정밀 공장 곳곳에 숨어있다.

--- pp.146~147

출판사 리뷰

갈대밭과 흑두루미를 지켜낸 지역 시민들
생태 도시, 지속가능한 정원을 꿈꾸다


순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순천만국가정원과 순천만 생태습지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지역 관광지가 아니다. 순천만의 갈대밭과 흑두루미 등 다양한 동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이 오랜 시간 습지 보존 활동을 펼친 결과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토록 자랑스러워한 국가정원에서도 철마다 버려지는 꽃들을 보며 진정한 생태적 가치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다.

진정한 생태란 무엇인지 도시 안에서도 생태적으로 살 수 있는지 궁금했던 청년은 자기 안의 질문을 품고 순천을 떠나 공부를 시작한다. 국내외를 넘나들며 생태마을과 숲으로 복원된 도시(아날로그 포레스트리)를 탐방하고 지속가능한 농사 방식(퍼머컬쳐)을 배운 것이다. 그리고 여러 배움 끝에 다시 순천으로 돌아온다. 생태적 가치를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서, 삶에서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맞는 지역을 찾기 어렵다면 내가 사는 곳을 더 멋지게 만들면 어떨까’라는 마음으로 저자는 공동체 텃밭, 생태 캠프, 쓰레기 없는 축제 등을 기획했고 순천을 넘어 타 지역의 큰 관심을 받았다.

오래된 마을을 밝히는 마법 같은 순간들
담벼락과 골목, 사람과 도시 사이 정원이 피어난다


정원이라고 하면 흔히 꽃과 나무가 무성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순천 저전동 곳곳에 만들어진 정원을 들여다보면 그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외관을 꾸미고 녹지를 늘리기 위해 만든 공간이 아닌, 마을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주민들의 소망을 수렴해 만든 ‘마을정원’이기 때문이다. 활기를 잃어가는 지역 사회가 그러하듯 순천의 저전동 역시 학생과 주민 수의 감소, 텅 빈 가게들, 위험한 보행 도로와 골목길, 서먹한 이웃 관계 등의 문제가 존재했다. 순천시 도시재생 저전동 현장지원센터의 사무국장이 된 저자는 이런 구도심의 문제를 생태적이고도 지속가능한 마을정원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저자와 주민들은 텅빈 학교 운동장을 활용해 ‘생태놀이터정원’으로 만들고, 빗물이 넘치는 도로에 ‘빗물가로정원’을 조성한다. 동네잔치를 할 수 있을 만큼 널따란 ‘먹거리정원’도 마련하고, 자투리 공간에서도 식물을 만날 수 있는 ‘세모정원’과 ‘띠정원’을 일궜다. 가장 큰 변화는 골목 담벼락을 낮추고 개인 정원을 ‘이웃사촌정원’으로 개방하면서 폐쇄적으로 느껴졌던 동네 골목 구석구석을 환하게 변모시킨 일이다. 이제 그들은 정원을 함께 보살피는 힘으로 식물 도둑을 막아내고 동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한다. 마을정원사들의 자발적인 노력 덕분에 저전동은 갈수록 잎과 꽃이 가득한 마을이 되었다. 3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이제는 저전동 주민의 한 사람이 된 저자는 자신의 정원을 더 아름답게 가꾸고 마을정원의 힘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꿈을 꾸고 있다.

어딘가에는 @ 있다
다섯 출판사의 지역 인문 시리즈


강원 고성의 온다프레스, 충북 옥천의 포도밭출판사, 대전의 이유출판, 전남 순천의 열매하나, 경남 통영의 남해의봄날. 단단하고 색깔있는 책들을 선보여 온 지역의 다섯 출판사가 2년 넘게 함께 기획하고 제작하여 동시에 〈어딘가에는 @ 있다〉 시리즈를 펴낸다. 처음 듣는 지명, 낯선 사람, 생소한 사물들, 그리고 서울이나 대도시가 아닌 곳에서 자신의 생활과 일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작지만 가볍지 않고 단단하게, 다양한 색깔로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삶의 기록을 올컬러의 인문 시리즈로 담아냈다. 전체 시리즈의 북디자인은 타이포그래퍼로 유명한 안삼열 그래픽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잔잔하고 풋풋한 이야기 속의 야무진 집념

이동행 작가는 본래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지만 대학 시절의 대부분을 게임 그래픽을 배우는 데에 매진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그래픽 툴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된 뒤로는 자신의 작업물이 실제의 삶에서 쓰이지 못하고 가상의 공간에서만 쓰임새가 있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는 모니터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실물의 무엇인가를 만들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느꼈다.

결혼 전 지금의 아내와 함께 시작한 일은 역시나 그래픽 분야였다. 다만 그는 조금씩 그래픽 이외의 여러 가능성의 영역을 살펴보기 시작했고, 그러던 어느 날 주물로 만들어진 대형 인쇄기 앞에서 한 사람의 장인이 수작업으로 인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바로 그들 작가 부부가 레터프레스라는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영역에 발을 디딘 순간이다.

이쯤 되면 이야기의 흐름상 이들 부부가 업무 면에서나 이주·정착 면에서 여러 성취를 이뤄내는 전개가 예상되겠지만, 실제 이야기는 그저 그들의 풋풋함과 솔직함을 보여주는 좌충우돌의 에피소드들로 채워진다. 그 이야기들의 바탕에는 자신의 성취가 그저 ‘우연’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라는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다. 이 숨김없는 고백이 이 책의 가장 큰 백미이자 매력 아닐까 싶다.

레터프레스라는 인쇄를 시작하게 된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그 이유들은 시간이 지난 뒤에 붙여진 의식적인 의미 부여일 뿐이다. 솔직히 말해 그 당시 우리를 이끌었던 것은 ‘우연’이었다. 어떤 대단한 뜻이 있어서 레터프레스라는 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내와 나는 한 가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한 과정 속에 놓여 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이 무수한 실패의 연속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22면)

드물디 드문 기술을 익혀서, 멀디 먼 태백으로 향하다

레터프레스(letterpress)란 레터 즉 금속활자로 한 글자씩 본을 떠 만든 인쇄용 판[活版]으로 글자를 찍어내는 일을 통칭한다. 1960, 70년대까지만 해도 활판인쇄는 거의 모든 인쇄물에 활발히 쓰였지만 80년대에 들어 디지털 출판 기술이 발달하면서 급속도로 사양세에 접어들었다. 이렇다 보니 2020년대에 활판인쇄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곳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레터프레스 전문가들 또한 희귀하다.

레터프레스는 작업 중에 1밀리미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무척 세심한 일이다. 이 같은 고도의 작업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그들이 이 일을 익히기까지는 오랜 노력과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일단 그들은 활판인쇄의 가장 초급 기기인 에볼루션이라는 키트를 구입해서 그림을 찍어보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들이 활판인쇄의 노하우를 쌓게 된 것은 본인들이 무작정 직접 종이를 칼로 재단해보고, 그 뒤로 을지로의 종이 재단집들의 문을 두드리면서, 또한 실질적인 인쇄기인 아다나를 구하러 골동품상을 찾는 일들이 쌓여가면서부터다. 하나같이 어처구니없고 무모해 보이는 일들을 치르면서 그들은 활판인쇄의 개념을 두루 터득해간다. 여기에 본래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오면서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던 스케치가 더해지면서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선보일 수 있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두 사람은 이처럼 ‘우연’에 이끌려 레터프레스에 입문했고 강원도 산속 마을로 이주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통적인 직업 관념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다고, 또한 자신들이 이 업을 택한 이유가 단지 ‘우연’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책을 모두 읽고 난 이 들이라면 이들이 ‘천직을 구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도 험한 일을 노래를 흥얼거리며 해낼 수 있으랴. ‘어느한장면’ 이동행, 이문영 작가 부부의 삶이 다른 이들 에게도 작은 감흥과 생각거리를 주리라 믿는다.
이주여성들은 차별과 편견을 일상적으로 겪는다. 무례한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묻는다. 그들이 떠나온 본국이 얼마나 가난한지, 본가는 얼마나 가난한지, 얼마 받고 시집왔는지, 그래서 본가에 얼마씩 송금하는지... 아무렇지 않게 묻는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 굳이 ‘베트남’, ‘월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처음 본 사이임에도 서슴없이 반말을 한다. 집에서는 모국어를 못 쓰게 한다. 모국어 사용을 금지당한 이주여성들은 자식에게도 자신의 모국어를 가르치지 못한다. 아이는 갈수록 한국말이 유창해지지만 이주여성은 한국말 익히기가 쉽지 않고, 결국 아이와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단절이 생긴다. 아이는 점차 엄마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상당수 이주여성들은 과중한 노동에 시달린다. 집안일을 도맡는 것은 기본이고, 끊임없이 임금노동을 한다. 이들이 버는 돈은 시어머니나 남편 통장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자는 시간 빼고 대부분 시간을 노동하는 데 쓰지만 이들은 가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본가에 그래서 얼마씩 송금하냐’는 무례한 말을 듣고 ‘돈 벌려고 몸 팔아 결혼했다’는 참기 힘든 모욕의 말을 듣는다. 한국 며느리들이 친정에 용돈 보내면 죄가 아닌데, 이주여성들은 친정에 아껴 모은 돈을 조금이라도 부치면 도둑 소리를 듣는다.

다문화센터라는 곳이 있다. 얼핏 보면 이주여성을 지원하는 곳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가 않다. ‘다문화가족’ 지원의 내용은 이주여성을 한국 가정에 동화시키는 과정이다. 한국 가정은 그대로이고, 이주여성만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한국 가정의 ‘법’에 순응하게끔 한다. 이주여성은 현재의 다문화센터 운영이나 다문화가족 정책 등이 자신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이뤄진다고 문제제기한다. 한쪽(이주여성)은 자기 문화를 버리고, 한쪽(한국가정)의 문화만 법처럼 따르는 게 어떻게 ‘다문화’인가.

지방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때의 일이다. 이주여성들은 선거 후보자들에게 이주민 관련 공약을 요구하기 위해 관련한 인사들을 불러 모아 기자회견 및 정책토론회를 열었다. 다른 지역의 활동 사례 및 참고할 만한 조례 내용 등을 조사 정리하여 선거 입후보자들에게 전달했고 더불어 ‘이주여성 및 이주민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고발했다. 뜨거운 현장이었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자리에 참석한 후보자들의 발언에서도 편견은 심각하게 드러난다. 이주여성의 출산율이 6%나 되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가 중요하다느니, 이들의 아이들 덕분에 지역의 작은학교들이 학생 수를 채우고 있으니 더욱 신경 써야 한다느니 등등. 이주여성을 누군가의 부인, 며느리, 엄마로서만 인정하고 이주여성의 존재 자체는 무시하는 인식은 끔찍할 만큼 굳건하다.

가정폭력을 당해서 경찰에 신고해도 도착한 경찰은 한국말이 통하는 남편 말만 듣고 돌아간다. 폭행을 당한 이주여성이 겁이 질려 서툰 한국말로 상황을 설명하려 해봐도, 경찰은 “좋게 좋게 푸세요. 아니, 남편이 감옥 가면 좋겠어요?” 같은 말을 하며 서둘러 떠나려 할 뿐이다. 이상의 내용들을 모든 이주여성들이 모두 겪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 중 하나의 상황도 겪은 적 없는 이주여성은 찾기 힘든 실정이다. 차별과 편견과 혐오로 엮인 그물망이 그만큼 촘촘하다.

여기, 차별과 편견과 혐오 같은 폭력에 더 이상은 당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주여성들이 있다. 스스로 자신의 인권을 말하고, 혐오에 맞서겠다고 외치는 이들이 있다. 더는 친구를 잃지 않기로 다짐한 이들이 있다. 옥천군에 사는 이주여성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나’로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누군가의 부인, 누군가의 며느리, 누군가의 엄마일 때만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던 이주여성들은 이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겠다고 외친다. 그러기 위해 이들은 어려움을 겪는 이주여성들을 찾아내고 다가가고 손을 잡았다. 옥천군결혼이주여성협의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서로를 지탱하는 이들, 편견과 핍박에 맞서 싸우며 서로 보살피는 옥천 이주여성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음식 여행
발로 뛰어 가며 듣고, 일일이 재고 세어 보며
낱낱이 파헤친 충무김밥 스토리


통영의 대표 음식으로 손꼽히며 전국적으로 알려진 충무김밥이지만 그 유명세에 비해 충무김밥에 대한 기록은 적은 편이다. 충무김밥의 역사는 적어도 여객선이 활발히 운항하던 1950년대 충무항에서부터 시작되었으리라 추정하지만 이를 향토사적으로 정리한 기록은 찾기가 어렵다. 이에 저자는 충무김밥의 원조를 찾기 위해 옛 시절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은 물론 오래된 충무김밥집 사장 등 많은 인물들을 만나 직접 발로 뛰며 충무김밥 스토리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또한 현재 충무김밥 맛을 결정 짓는 요소를 찾기 위해 섞박지 맛을 좌우하는 무 자르는 각도를 재고, 김밥 한 개에 들어간 밥알의 평균 개수와 크기를 재는 등 다양한 관점으로 충무김밥에 접근한다. 이 과정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충무김밥의 황금비율이 아니라 긴 세월 경험의 공유와 계승으로 이어진 충무김밥집 할매, 아지매들의 ‘손맛’이며 어르신들의 지나온 세월 속에 녹아든 충무김밥의 추억이다. 현재의 충무김밥은 바로 이들의 경험과 기억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원조’가 마케팅의 수단으로 통용되는 시대,
진정한 원조란 무엇인가


지역마다 유명한 맛집 거리에 들어가 보면 수많은 가게들이 손님을 이끌기 위한 홍보 수단으로 간판에 ‘원조’를 내건 것을 종종 목격한다. 무언가를 처음 시작한 이나 사물을 뜻하는 ‘원조’, 그렇다면 원조를 내세우는 이들 사이에서 어떻게 단 하나의 원조를 특정해 낼 수 있을까? 원조 충무김밥을 찾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원조 간판을 발견했고, 저마다 원조로서의 자부심 어린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원조 논쟁을 떠나, 시대와 상황에 따라 충무김밥의 원형도, 재료도 바뀌었을지언정, 현재까지도 그 맥을 이어간 이들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김밥을 이고 지고 팔며 어려운 시절을 함께 난 통영의 할매, 아지매들이 있다. 음식 문화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변화의 과정에서 만나는 면면의 사람들, 통영의 풍경, 추억과 문화야말로 오늘날의 충무김밥을 있게 한 진짜 주역일 것이다.

**〈어딘가에는 @ 있다〉 시리즈

처음 듣는 지명, 낯선 사람, 생소한 사물들, 그리고 서울이나 수도권, 대도시가 아닌 곳에서 자신의 생활과 일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들이 전하는 지역의 목소리. 작지만 가볍지 않고 단단하게, 다양한 색깔로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삶의 기록을 서울에서 살다가 지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다섯 출판사 강원 고성의 온다프레스, 충북 옥천의 포도밭출판사, 대전의 이유출판, 전남 순천의 열매하나, 그리고 경남 통영의 남해의봄날이 함께 담아냈다.
철공소 거리의 산 역사가 된 장인들

송기룡 장인은 늘 뜨거운 불 앞에서 일한다. 1950년 원동에 설립된 대전 최초의 공업사 ‘남선기공’에서 미싱 다리를 만드는 조공부터 시작해 한평생 주물 일을 해왔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최고의 호황을 누린 88올림픽 전후, 고단했던 IMF 시기 등 한국 현대사를 모두 겪어낸 원동의 살아있는 역사와도 같다. 윤창호 장인은 홀어머니 고생을 덜어드리고자 14살 때부터 철공 일을 시작했다. 퇴근 후 동료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왁자하게 회포를 풀던 과거를 그리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도전한다. 고객에게 필요한 제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 끝에 성창갈고리라는 히트상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홍경석 장인은 철공업 35년 차로 창조길의 막내다. 프레스, 시보리, 선반 등 다양한 기계로 갖가지 제품을 쓱싹 스케치하고 뚝딱 만들어내는 전천후 장인이다. 80년대 후반에 철공 일을 시작해 한 공장에 10명씩 기계를 돌리던 미니 공단의 호황기를 또렷이 기억한다. 그 시절에 비하면 너무나도 한산해진 철공소 거리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자리를 지킨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대전의 다른 모습

요즘의 레트로 열풍은 과거로 향한 이 시대의 욕망을 보여준다. 70~80년대의 고성장 시대. 활기차게 돌아가는 기계들로 상징되는 그 시절의 흔적은 21세기가 되어 자취를 감춘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도심 곳곳에 여전히 존재한다. 이 책은 과학과 교통 도시로 알려진 대전을 다른 시각에서 살피며 원동 철공소 거리가 IMF 이전까지 우리나라 금속 제조업의 메카로 명성을 떨친 곳임을 기억하게 해준다. 화려했던 시기를 보내고 이젠 텅 빈 듯 한적해진 거리 풍경은 우리를 향수에 젖게 만든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현대사의 질곡처럼, 호황기를 누리던 원동 철공소 거리엔 기계에 손이 잘리거나 갈비뼈가 부러지고, 학교 가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일터로 향하고 망치로 얻어맞으며 일을 배워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시대의 뒤안길이 된 그곳에서 장인들은 여전히 용광로의 뜨거운 쇳물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삶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대전의 모습이다.

〈어딘가에는 @ 있다〉 시리즈 소개

강원 고성의 온다프레스, 충북 옥천의 포도밭출판사, 대전의 이유출판, 전남 순천의 열매하나, 경남 통영의 남해의봄날. 단단하고 색깔있는 책들을 선보여 온 지역의 다섯 출판사가 2년 넘게 함께 기획하고 제작하여 동시에 〈어딘가에는 @ 있다〉 시리즈를 펴냈다. 처음 듣는 지명, 낯선 사람, 생소한 사물들, 그리고 서울이나 대도시가 아닌 곳에서 자신의 생활과 일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작지만 가볍지 않고 단단하게, 다양한 색깔로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삶의 기록을 올컬러의 인문 시리즈로 담아냈다. 전체 시리즈의 북디자인은 안삼열체로 유명한 안삼열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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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딘가에는 @ 있다〉 시리즈 기획한 다섯 로컬 출판사 인터뷰
    〈어딘가에는 @ 있다〉 시리즈 기획한 다섯 로컬 출판사 인터뷰
    202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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