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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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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윤리학과 정치학은 글쓰기의 핵심이다
-정치적 행위로서 글쓰기 1장은 글쓰기에서 윤리학(문장력)과 정치학(상대를 설득하는 기술)이 구현되는 방식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글을 모았다. 정희진이 중요하게 다루는 글쓰기 방법론인 ‘윤리적 글쓰기」중에서와 ‘정치적 글쓰기」중에서를 큰 줄기 삼아, 저자의 독창적 사유와 시선으로 우리 사회의 면면을 들여다본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1991년 이 시를 썼을 당시 안도현은 전교조 해직 교사였다는 저자의 소개와 해석을 읽고 반전이 일어났다. 그가 옳았다. 그의 정보 덕분에 이 시는 나의 시가 되었다. 이 시의 제목이 〈너에게 묻는다〉라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 ……시인을 최고의 지식인으로 생각하거나 자부하는 이들이 있다. 나도 그런 축이다. 시는 언어들의 언어,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은유는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시 한 줄이 사전 한 권이 될 수도 있다. 시인이 왜 잘났겠는가? 언어를 창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러워진 골목길 네가 치울 거냐」중에서 이제는 고전이 된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이나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모두 그들이 20대 중반에 쓴 작품이다. 자신이 피억압자라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해 사회운동에 헌신하면서 그 과정의 분노와 열정이 걸작이 된 경우다. 글쓰기의 목적이 사회 변화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글쓰기 자체가 사회를 다시 짓는 과정이다. 글쓰기의 목적은 결과에 있지 않다. 과정이 선하고 치열하면 결과도 그러하다. 글쓰기는 다른 삶을 지어내는 노동이다. ---「글짓기, 글쓰기」중에서 대중에게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바쁜 이들은 주로 정치인과 종교인이다. 요즘은 지식인이나 사회운동가도 힐링이라는 이름의 희망을 말하는데 이건 진짜 절망적인 현상이다. 그들의 임무는 고통을 드러내고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 희망은 바라는 것이므로 어차피 현재에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희망'의 문제는 두 가지다.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다. 맞다. 하지만 희망과 현실을 대립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이런 좌절이 오는 것 아닐까. 현실의 일부인 ‘어두운' 현실을 드러내면 희망이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희망은 욕망에 대한 그리움」중에서 2장 당사자의 글쓰기는 혁명의 꽃이다 -내용이자 방법으로서 윤리적 글쓰기 2장에는 여성, 장애인, 암환자, 치매 노인 등 사회적 약자의 ‘자기 현실 쓰기', 즉 자기 위치를 자각한 당사자의 글쓰기가 지닌 힘을 보여주는 글들이 실려 있다. 정희진은 훌륭한 저작이 되려면 지식의 축적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당사자가 자기 현실을 쓰려면 공감받기 어려운, 헤쳐도 헤쳐도 계속 달려드는 칡넝쿨을 쳐내야 한다.” 통념과 상식에 도전하여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사회적 약자의 글쓰기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장애인이나 여성이 자기 언어를 지니는 것은 지식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전복적인 행위다. 사회적 약자에게 공부는 취업, 성장 같은 당연한 의미 외에 자신의 삶과 불일치하는 기존의 인식 체계에 도전하는 무기가 된다. …… 장애인에게 공부의 의미는 이동, 관계, 투쟁……. 그리고 내가 알 수 없는 그 이상일 것이다. “장애인은 공부해도 어디 가서 써먹을 데가 없다.”는 생각은 현실과 정반대다. 공부야말로 사회적 약자가 해야 가장 효과적이다. 언어는 그들의/우리의 유일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공부해서 뭐하냐」중에서 대중적인 글은 쉬운 글일까? 아니, 대중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대중은 균질적이거나 실체적인 집단이 아니다. 모두가 만족하는 글은 가능하지 않다. 대중적인 글을 지향하는 것은 글을 못 쓰는 첩경이다. 안 되는 일을 어떻게 되게 하겠는가. …… 익숙한 말은 진부하게 여기고, 어렵다고 느껴지는 말에 호기심을 보이는 사회가 창조적인 사회가 아닐까. 사회적 약자가 경험을 드러내면 ‘사소한' 것인데도 불안하게 느껴지고, 가진 자의 논리는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회에서 인간성은 어디를 향하게 될까. ---「백인들의 말은 대단히 매끄럽다」중에서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글은 자기 시각은 없으나, 자기 뜻대로 쓰는 이른바 ‘객관적인 것들이다. 세상사를 전유(專有)하면서 스스로를 인간의 기준이라고 선포하는 글. 기회주의와 보신주의를 중립과 보편, 심지어 정론으로 포장한 것들이다. 거리를 ‘잡는 것'(포지셔닝 혹은 주제 파악)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거리 두기와 동일시는 자신을 이동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반면,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가능한 공감과 연대는 어렵다. ---「극단적 현실」중에서 3장 글쓰기의 두려움과 부끄러움 -세월호에 대해 쓴다는 것 3장에서는 이 시대에 ‘세월호'에 대해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찾고자 한 저자의 치열한 고민이 담겨 있다. 정희진은 2014년 4월 16일 이후 오랫동안 자신이 쓴 거의 모든 글이 세월호에 관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잊지 않겠다.”, “그만 울자, 산 사람은 살아야지.”, “불순파 유가족, 순수파 유가족”까지 세월호를 둘러싸고 등장했던 다양한 발화를 살펴보면서 세월호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한다. 자녀의 죽음, 전쟁에서의 생존, 홀로코스트, 집단 성폭력, 지진……. 정말 신은 인간이 감당할 만한 고통만 주실까. 인간은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가. 이는 어떤 조건에서만 맞는 말이다. 고난을 견디는 능력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피해자와 잠재적 피해자들의 상부상조와 이를 지지하는 사회. 이것이 정의다. ---「이타적 인간」중에서 “우리가 슬픔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슬픔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 고통받는 인간은 선택받았다. 누구도 이런 선민이 되고 싶지 않겠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조건인 것을. 다만, 사회는 이들에게 “(힘이 없는데) 힘을 내라.”,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잊어라.”, “(이미 너무 참고 있는데) 참아라.”, 심지어 착취 구조에 갇힌 사회적 약자에게 “왜 그렇게 분노가 많냐.”고 분노하지 않기를 바란다. 돕고 싶다면 그들의 분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 가장 비윤리적인 분노, 그래서 참아야 할 분노는 딱 하나, 분노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다. ---「우리가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슬픔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중에서 눈물을 금지하는 원리는 같다. 어렸을 적 부모나 교사에게 억울하게 혼났을 때 울면 안 된다. “뭘 잘했다고 울어!” 한 대 더 얻어맞기 십상이다. 때린 사람은 우는 사람이 불편하기 마련이다. 가해자의 논리는 “(나는 가해자가 아닌데) 네가 우니까 내가 가해자가 된 것 같아 기분 나쁘다. 고로 네가 가해자.”다. 자기 행동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고 심지어 동의와 웃음을 강요한다. 아이고 사건은 눈물이 불법을 넘어 체제 위협으로 간주된 예다. 눈물=체제 위협. 눈물은 힘이 세다. 눈물은 정치적이다. 그래서 ‘아이고 사건」중에서은 어디에나 있다. 여론이 약자에게 동정을 보일 우려가 있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걷잡을 수 없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고 사건」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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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몸에서 글이 나온다
- ‘나’에게 돌아오는 글쓰기 1장은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에 관한 정희진식 글쓰기 방법론을 보여준다. 정희진에 따르면, 좋은 글쓰기란 통념과 상식, 기성의 것과 상투성에 머물지 않고 텍스트를 나만의 것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글쓰기 과정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이 ‘나’에게 돌아오는 글쓰기다. 나는 누구인가. 모든 사람이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물음은 내 경험과 사회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을 때, 타인이 멋대로 나를 규정할 때 솟아난다.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넌 누구냐?”라는 심문(審問)에 대한 일차적 반응이다. …… 저자가 일관되게 문제 삼는 것은 이러한 상황이 피억압자의 삶을 내내 뒤덮고 있는 신문(訊問)의 정치라는 사실이다. ‘여성’, ‘아줌마’,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 아닌 사람, 식민지 사람은 이중 메시지 상황에서 늘 자기를 설명하라는 요구에 시달린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저들」중에서 유럽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가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다. 서구가 비서구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서구를 열심히 연구하다 보면 질문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나를 알려면 나를 만든 이들을 거쳐야 한다. 비서구, 여성, 장애인……. 모든 타자들에게 인생이란 이렇게 멀고 복잡한 우회로이다. 이는 피식민자의 자기 찾기는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 자신을 다시 구성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해준다. ---「끝을 보고야 만 자의 씁쓸함」중에서 진저리는 몸이 해체되기 시작할 때 뼈와 근육 간의 연결이 이탈되기 전 단계의 몸이다. 진저리의 최후는 몸과 영혼의 분리, 죽음이다. 진저리치는 글을 쓰는 작가는 여러 번 죽었다 깨어난다. …… 독자 역시 최소한의 비슷한 경험, 진저리의 연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특정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다. 인간의 변화는 진저리를 동반한다. 독서에는 반드시 몸의 반응이 따른다. 가벼운 바람도 있고 통곡할 때도 있다. 어쨌거나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성들이 여성학 책을 읽을 때가 대표적인 경우다. ---「진저리를 쳤다」중에서 2장 우리는 타인을 위해 산다 - ‘너’를 만나는 글쓰기 2장은 ‘타인을 만나는 글쓰기’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글을 모았다. 저자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자기 변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삶의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생의 절정은 성별, 계급, 나이, 심지어 정치적 입장을 넘어서 상호 성장을 위해 자기가 알던 유일한 세계를 포기하는 순간”에 있다.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유의 시작이다. 호소하고 싶은 사연, 모순된 자기 행동을 이해받고 싶은 마음, 몸에서 말을 내보내야만 생존이 가능한 상태를 수치심과 상대방에게 판단당하는 걱정에 시달리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얼마나 될까. 내가 택한 안전한 관계는 나 자신과의 대화인데, 이 방법은 정신이 분열될 위험이 있다. 혹은 신이나 절대자와 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결국은 자신과의 대화다. 우리에겐 타인이 필요하다. 타인과의 상호 작용은 소중한 차원을 넘어 존재 양식과 생사의 문제다. ---「안전한 관계」중에서 나의 바닥을 드러낼 수 있는 상대. 아무리 세게 부딪쳐도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벽, 나도 믿기 어려운 경험을 당연한 듯 믿어주는 사람, 내 안의 고통을 비워줄 수 있는 사람. ‘진정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이 필요한 시간이 있다. 이 사랑은 말을 들어주는 것이 첫째다. 상대방의 경험에 대한 수용력, 호기심을 품지 않는 예의, 취약한 상대방을 조종하거나 동정하지 않는 사랑. 깊고 신중한 배려 속에 나를 넣어주는 사랑이다. ---「사랑은 말하고 싶음, 말할 수 있음이다」중에서 자신을 버리고 언제나 상대방이 되는 삶. 바울은 ‘주인, 이스라엘인, 남자’가 되기를 버리고 ‘여자와 노예’가 되기로 하지만 실패한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간절히 타인이 되고자 해도 진정 타인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요지는, 바울의 제안이다. 타인이 됨으로써 약자의 저항과 융합을 강조하는, 공동체의 윤리를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내가 타인이 되고자 함은 ‘복음’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서이다. 타인을 수용하고 온전히 이해하고 이해받을 때 우리는 어떻게 변형될까. ---「될 수 없는 자」중에서 3장 내게 ‘여성’은 고통이자 자원이다 - 창의적 글쓰기의 가능성 3장은 ‘여성주의 글쓰기’란 무엇인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글들을 모았다. ‘#나는_잠재적_가해자입니다’ 해시태그 운동,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 ‘남성 페미니스트’의 등장, ‘가스라이팅’ 폭력 등 한국 사회의 젠더 관련 이슈를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다시 쓴다. 성차별과 여성 혐오, 데이트 폭력과 살인(femicide)이 일상인 현실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분노와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여성에 대해 쓴다는 것은 여성, 여성의 경험, 여성이 처한 현실에 대해 상상력이 없는 이 세계에 숨을 불어넣는 일이다. 헬렌 켈러를 다룬 책 중에서 가장 실체적 진실에 가깝다고 평가받는 도로시 허먼의 《헬렌 켈러》를 읽으면서 위인전에는 어떤 종류의 ‘19금’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했다. …… 위대한 인물은 부정의한 사회와 투쟁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헬렌 켈러가 헌신했던 사회운동에 대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고, 주류 사회가 인정한 성취 전달하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일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이렇게 박제된 인식에 대한 교정이자 도전에 있다. 3중 장애 여성은 공산주의자, 페미니스트이면 안 되나? 박제는 생각보다 무서운 말이다. ‘박(剝)’은 벗기다, 깎다, 찢다라는 뜻. 그러니까 아예 다르게 만들어버리겠다는 의지다. ---「사회주의자 헬렌 켈러」중에서 사실 나를 가장 놀라게 한 사건은 “나도 잠재적 가해자입니다.”라는 ‘운동’이다. 잠재적 가해자라니?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라면, 여성의 현실적, 현재적, 일상적 피해는 누가 저지른 일이란 말인가. 물론 ‘선의’겠지만 무지에서 나온 선의는 지배 세력의 관용과 성찰로 둔갑하기 쉽다. 사회적 모순에 ‘잠재’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빈부 격차를 ‘잠재적’이라고 하는가? 지역 차별, 장애인 차별도 일상적이고 노골적이지 잠재되어 있지 않다. 성차별은 더욱 그렇다. 따라서 “나는 잠재적 가해자입니다.”는 “나는 성차별 구조에서 가해자의 위치에 있습니다.”로 바꿔야 한다. ---「잠재적 가해자?」중에서 여성의 처지는 같지 않다. 수많은 차이가 있다. 계급, 인종, 나이, 성 정체성, 지역, 장애……. 이것은 단순한 다름이 아니라 적대적 모순 관계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여성으로 일반화해버릴 수 있는 권력이 가부장제다. …… 여성이라는 ‘작은’ 공통분모 하나 때문에 일상과 목숨을 잃는 세상에서, 여성은 일시적으로 “너는 나다.”라는 정체성의 정치를 주장한다. 여성의 저항은 그 자체로 보편적인 사회 정의다. 이들의 목소리가 가시화되면 여성의 복종으로 성립되어 온 가부장제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네가 나야」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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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선 엘리트 정치인 김종찬(김주혁)의 아내로 나오는 김연홍(손예진)은 선거 운동 와중에 딸이 실종되는 사건을 겪는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 혼란과 분노 속에서 사건의 실체에 다가갈수록 믿을 수 없는 진실이 드러난다. 연홍은 운전대를 잡고 “생각하자” “정신 똑바로 차리자”를 반복한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한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운다. 이 영화,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p.62 마지막 장면에서 범죄자 강태오(주지훈)는 형사 김형민(김윤석)에게 진부한 대사를 던진다. “니가 아무리 지랄해도 결국 내는 못 이겨.” 형사는 진부하지 않게 받는다. “내가 니 같은 놈 이겨서 뭐 하려고?” 그는 이기고 지는 데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 인간의 생명을 두고 승부가 중요한가? 형사의 관심은 범죄자와의 심리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범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있다. --- p.68 나는 김기덕의 영화를 ‘한국의 남성성 연구’라는 차원에서 모두 보았다. 어떤 작품은 두 번 보았다. 고통스럽고 몸이 아픈 중노동이었다. 나는 그의 영화를 세 종류로 나눈다. 작품의 만듦새 자체가 어설픈 유치한 영화(〈해안선〉), 걸작 두 편(〈빈집〉, 〈스톱〉) 그리고 나머지는 그냥 목불인견의 미소지니 그 자체다(〈나쁜 남자〉). 대개 그의 작품은 그의 분노 표출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의 입장이고 관객들은 더 분노한다. 나 역시 분노 그 이상의 모욕감을 느끼거나 그가 경험한 세계가 저 정도로밖에 ‘승화’되지 않는지 하여튼 답답했다. --- pp.75∼76 기본적으로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흑인 문제’가 아니라 유색 인종에 대한 증오와 원주민 학살로 이루어진 국가, 미국을 조명하는 텍스트다. 존 웨인이 주연한 ‘서부극’부터 거스 밴 샌트 감독의 〈엘리펀트〉까지 레퍼런스로 등장한다. 영화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영화들이 계속 나온다. 흑인의 관점에서 영화로 읽는 미국사다. 또 다른 쾌락은, 영화를 보면서 미친 듯이 받아 적었지만 결국 제대로 다 받아 적을 수는 없던 영화의 대사 즉, 볼드윈의 에세이다. 그의 글은 명문, 미문, 외우고 싶은 시이자 무기로서 완벽한 언어다. --- p.97 우울증 환자의 호소. “지구가 나를 붙잡지 않아요.” 지구의 의지, 중력의 법칙에서 버려진 이들이 우울증 환자다. …… 우주는 무중력 상태이므로 지구와 달리 우울증 환자가 살 수 있는 공간이다. 우주가 배경인 〈그래비티〉에서 우울증 환자는 지구에서와는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무중력이지만 첨단 장비가 그와 우주를 연결해주니 발버둥 치지 않아도 생존 가능하다. 지구에서 이 연결은 사람과 사랑이지만 구하기 쉽지 않은 끈이다. --- pp.118~120 내가 본 영화 중에서 나의 사랑 개념에 가장 가까운 텍스트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다. …… 볼 때마다 위로가 된다. 이 영화는 지구 멸망이나 홀로코스트를 맞더라도, 사랑과 슬픔이라는 인간의 힘이 있다면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슬픔이 최고의 힘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그러나 내겐 너무 아프고 부담스러운─부탁을 들어주는 것이다. --- pp.125~126 말하는 행위는 마음의 가시를 돌보는 일과 비슷하다. 어떤 종류의 침묵은 마음속 가시와 같아서 같이 살 수 없다. 가시가 움직일 때마다 몸을 찌른다. …… 〈피고인〉에서 조디 포스터는 타인과 다름없는 엄마에게, 〈화양연화〉에서 양조위는 벽에다 대고 말한다. 민폐도 없고, 누구에게도 부담주지 않으면서 말하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앙코르와트에서. ‘들어 달라’가 아니라 ‘나는 말했다’가 중요하다. --- pp.136~141 영화 속 마을 사람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며 살아간다. 국가를 비롯한 외부적 요인은 드러나지 않는다. 농사는 자연 환경에 철저히 의지한다. 수확물은 인간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먹을거리가 인간 생활의 룰, 인간의 조건을 정한다. 실은 이것이 정상이고, 이른바 계획 경제, 사회주의 경제다. 인구와 먹을거리의 비율을 맞춰야 한다. 자연이 주는 만큼만 받아들여야 한다. 재고가 남지 않도록 최소한으로 지구를 빌려 써야 한다. --- p.162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인의 현지인 학살을 다룬 〈기억의 전쟁〉에서 피해를 증언하는 베트남 여성은 ‘약간은 수치스럽고 뭔가 찝찝하고 머뭇거리고 불편한’ 표정과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한국 단체들에서 증언의 대가로) 돈을 받은 적은 절대 없어……. 선물 정도 받을 뿐이지.” 이 장면에 꽂힌 나는 한국의 군 위안부 운동에 대해 백 매짜리 원고를 썼다. 한 장면, 이것이 내가 영화를 보는 방식이다. --- p.30 일본의 현재를 살펴보는 것은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소중한 예술가 혹은 윤리적인 예술가인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자기 사회를 직면하고 고민을 담되, 그 상황이나 인물을 대상화하지 않고 껴안는다. 이것이 그의 영화가 지닌 소구력이며, 관객은 그가 재현하는 특정한 이미지에 얽매이지 않는다. --- p.197 〈작전명 발키리〉의 주제는 반역이 탄로 날 듯한 아슬아슬한 장면에 집약되어 있다. 관객의 심장은 쿵쾅거린다. 그때 슈타우펜베르크(톰 크루즈)는 자신의 신체를 ‘전시’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한다. 그의 몸은 압도적인 대사가 된다. 한마디로 “당신들은 나처럼 조국을 위해 눈과 팔을 잃었나? 감히 내 앞에서 할 말이 있는가?” 체포 직전에 그는 자신의 훼손된 몸으로 히틀러 측을 압도한다. --- p.205 최초의 민간인 여성 비행사로 알려진 박경원을 다룬 〈청연〉의 첫 장면은 남루한 옷을 입은 조선의 소녀가 비행기를 따라 들판을 내달리는 데서 시작한다. 내게 이 장면은 영화의 주제처럼 보였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소녀의 힘찬 달리기. 그 꿈을 재현한 듯한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 〈청연〉은 여성에게 ‘친일’과 ‘민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 여성은 민족의 주체가 아니라 민족을 재현하는 대상일 때만 유용하다. 유관순은 종종 ‘열사’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봉창 열사’에 비해서는 그 경우가 훨씬 적다. --- pp.227∼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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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어링 부부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았다. 사는 대로 생각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저항이 되는 삶을 추구했다. …… 생각하는 대로의 삶은 언뜻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생각은 미래와 지향으로 나뉜다. 우리는 이런 삶을 지향할 수 있다. 집 없이 살기, 전기 덜 쓰기, 육류 안(덜) 먹기, 낡은 옷 재활용, 물 부족 국가에 기부하기. …… 그러나 생각(계획)하는 대로 사는 삶은 원래의 생활에서 더하는, 더 나은 삶이기에 불가능하다. 그런 삶의 목표는 끝이 없다. …… 인간은 단지 자기 행위로서 구성 중(in process)인 존재다. 사는 대로 생각하자. 그것이 나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 pp.30∼33 지리상의 발견이 아니라 지리상의 발명이 맞다. 서구가 동양을 찾아 나서겠다는 의지와 생각이 없었다면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당도하는 일도 없었다. 콜럼버스가 만난 사람들은 서구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서구의 욕망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시작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의 입장과 생각의 한계 안에서 가상의 동양을 생각하는 방식이다. 당연히 현실의 동양이 아니다. 더군다나 서구(‘The Western’)에 대항하는 동양이라는 동질적 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 p.63 모든 국민이 영어 스트레스로 평생을 보낸다면, 이는 일제 강점기보다 더한 식민 상태다. 영어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영어의 의미가 커질수록 한국 사회의 지식 생산이 후퇴한다는 사실이다. ‘선진국’이 자국에 필요한 지식을 생산하고 이를 보편적 지식이라고 우길 때 우리는 영어를 공부한다. …… 두 언어를 동시에 잘하기 힘든 상황에서 피억압자만 이중 노동을 하는 구조다. 식민주의가 작동하는 간단한 원리다. --- pp.126~127 쓰기가 최고의 공부이자 지식 생산 방법인 이유는 쓰는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쓰기와 실험 외에 모르는 것을 아는 방법은 많지 않다. …… 글을 쓰다가 막히거나 진도가 안 나가는 상황이 있는데, 이는 거기서 멈추고 다시 질문해야 한다는 좋은 신호이다. 이럴 때는 글쓰기를 정지하고 모든 것을 재점검해야 한다. …… 이 과정에서 내가 모르는 것, 부족한 것을 깨닫고 쓰기를 반복해야 한다. 겪어야만 깨달을 수 있고, 이때 새로운 지식이 생산된다. 과학자는 실험을 반복하고, 글쓴이는 쓰기를 반복한다. --- pp.138~139 “통일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여럿이 되는 것이다”(둘은 적대적 공존이라는, 통치 세력 간의 ‘하나’된 상태를 말한다)는 한국 현대사에 기록될 명언이다. …… 분단 체제는 단순히 국토가 남북으로(둘로) 갈라진 상태가 아니라 적대적 공존이라는 하나의 강고한 통치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통일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라는 기존의 거대한 뭉치가 해체됨으로써 내부의 여러 개가 드러나는 새로운 사회다. --- pp.162~163 지금 세대 갈등이라고 불리는 현상은 청년과 중년의 갈등이 아니라 계급 문제다. 20대는 어떤 부모를 두었는가에 따라 계급이 달라진다. 세대 갈등의 실상은 ‘부모가 가난한 젊은이’ 대 ‘50대 부자’의 싸움이다. 전문직이나 부동산 부자 빼고는 대부분 50대 국민은 나이 들수록 취업 기회, 자신감, 건강 같은 자원을 잃고 가난해진다. 그러므로 세대 갈등은 어리석다. 나이와 관계없이 가난한 사람들끼리 연대해야 한다. …… 우리는 각자 나이를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가난하고 나이 든 이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없다고 간주되는 이들을 존중하자. 이것이 공정이다. --- pp.176~177 꿀벌의 꽃가루받이 활동은 자연 전체를 포괄하는 경제 활동으로서 그 누구도 지구의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생의 원리를 일깨워준다. 여기서 기본 소득의 당위가 나온다. 기본 소득은 지구의 일원이자 환경의 일부로서 누구나 들이마실 수 있는 공기와 같다. 기본 소득은 지구 전체의 긍정적인 상호 작용을 위한 생명 자체의 권리이다. 기본 소득은 자본 중심이 아니라 자연 중심 글로벌주의의 일례다. --- pp.194~195 영어권의 다른 공항에 갔을 때 출입구를 ‘거주자(residents)’/ ‘방문자(visitors)’로 구분하는 것을 보고 ‘마음의 평화’를 느낀 적이 있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지구인으로서 평등하다. 지금 이 순간, 숨 쉬는 공간이 다를 뿐 어디든 이동할 자유가 있다. ‘내국인과 외국인’보다 ‘거주자와 방문자’가 훨씬 덜 위압적이다. 거주자와 방문자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말이다. 도착한 장소는 특정 ‘국민’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현장이다. --- pp.203~204 집의 크기와 구조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정해지는 시대다. 지금 한국 사회는 부동산 문제를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집이 교환 가치가 된 현실도 기가 막힐 판인데, 최고의 재산 증식 수단이라니. 인간은 공간을 차지하는 주체가 아니다. 우리가 소유와 인권을 분리하는 사회를 지향한다면, 집은 누구에게나 평생 임대 개념의 주거 공간이 되어야 한다. …… 집은 사는 곳이지 소유하는 물건이 아니다. --- p.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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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가 이 세상과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글쓰기 죄의식 없이 누가 더 뻔뻔한가를 경쟁하고, ‘가해자’의 마음이 평화로운 사회.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에게 “왜 그렇게 분노가 많냐.”고 말하는 사회. 자녀를 잃은 슬픔을 국가 체제의 위협으로 간주하는 사회. 이런 시대에 약자가 지닐 수 있는 무기는 무엇인가? 정희진에게 무기는 바로 ‘글쓰기’다. 그에게 글쓰기는 약자의 시선으로 타인과 사회를 탐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과정이다. 내 안의 소수자성을 자원으로 삼아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는 것, 나보다 더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과 연대하면서 세상을 배우는 일이다. 이것이 정희진이 말하는 시대에 맞서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으로서 글쓰기다. 품위는 약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약자에게는 폭력이라는 자원이 없다. 이런 세상에서 나의 무기는 나에겐 ‘있되’, ‘적’에겐 없는 것. 바로 글쓰기다. ‘적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사고방식. 사회적 약자만 접근 가능한 대안적 사고, 새로운 글쓰기 방식,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내게만 보이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 내 비록 능력이 부족하고 소심해서 주어진 지면조차 감당 못하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내 억울함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나보다 더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러면서 세상을 배워야 한다. - 머리말·14쪽 “글을 쓰는 이유에는 네 가지가 있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욕망, 미학적 열정, 역사에 무엇인가 남기려는 의지, 정치적 목적. 나는 모두 아니다. 나는 승부욕이다. 나는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의 첫 번째 책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에는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여성학자 정희진의 ‘글 혼’이 담겨 있다. 이 책에 실린 63편의 글에서 저자는 글쓰기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글쓰기의 윤리에 관해 끊임없이 성찰한다.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에서 저자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한 사람에게 글쓰기의 어려움과 ‘쉽게 쓰기’는 모순되지 않음을 발견한다. “글쓰기의 핵심은 정치학”이라는 연암 박지원의 말에서 상대를 설득하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려면 독자, 주제, 나의 위치를 다각도로 고려해 모든 힘을 쏟는 것이 글쓰기의 과정임을 배운다. ‘세월호’를 쓰면서는 고통을 견디는 능력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사회에서만 가능함을 깨닫는다. 정희진은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쓰려면, 나부터 ‘나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나를 검열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동반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나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찾아가는 여정이어야 한다. 흔히 말하는 글의 문장력과 상대를 설득하는 기술은 이 ‘몸부림’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이처럼 정희진에게 글쓰기는 쾌락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는 일이다. 그는 이런 괴로움 속에서 ‘최선의 올바름’, ‘아름다운 문장’이 나올 수 있다고 믿으며 묵묵히, 치열하게 글을 쓴다. “페미니즘을 만난 나는 운이 좋았다.” 정희진은 비평, 칼럼, 논문 등을 통해 ‘남성 언어’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통념과 상식을 뒤흔드는 논쟁적인 글을 쉬지 않고 써 온 필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는 글쓰기의 어려움에 관한 저자의 솔직한 고민을 만날 수 있다. 머릿속 생각이 손에 이르러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고통스러운 과정, 처음 쓴 글의 망신스러움 등 글쓰기의 어려움에 관해 털어놓는 저자의 고백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다.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칼럼이든 논문이든 쉬운 글쓰기는 없다. 특히 젠더를 주제로 삼은 글은 더욱 그렇다. 문제는 ‘작가’가 다소 시끄러운 직업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글쓰기에는 사회적 책임이 따르고, 나의 관심사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온갖 논쟁적인 주제가 대부분이다. 젠더 관련한 글은 여성도 남성도 불편하게 한다. 당파성이 뚜렷한 글이라 당파성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틀리면 틀리는 대로’ 욕을 먹는다. 격려보다는 비판이 많을 수밖에 없다. - 머리말·12쪽 “글쓰기의 윤리와 두려움을 잊지 않는 필자이기를 소망한다.” 정희진, 글쓰기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말하다 정희진은 글쓰기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더 아찔한 절벽’인 글쓰기의 두려움도 말한다. 정희진에게 글쓰기는 “책임과 윤리를 동반하는 두려운 일이고 두려워해야 하는 일”이다. 글쓰기의 ‘3대 요소’는 정치학(입장), 윤리학(방법), 미학(문장력)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정희진에게 글쓰기의 핵심은 바로 ‘윤리학’이다. 나는 글쓰기의 ‘세 요소’가 정삼각형 같은 형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상호 보완적이거나 대립하지 않는다. 핵심은 윤리다. 소재에 대한 태도와 글쓰기 방식이 정치적 입장과 미학을 결정한다. …… 누가 말하는가. 누가 듣는가. 누구의 목소리가 큰가. 누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사람들이 듣기 싫은 말은 무엇인가. 사회는 누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이러한 권력 관계의 동학은 교육 현장, 출판 시장, 미디어 같은 구체적인 장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 글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결정하는가. - 머리말·15쪽 윤리적인 글쓰기란 무엇일까? 글쓰기에서 왜 윤리가 중요할까? 글쓰기의 윤리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정희진에게 윤리적인 글쓰기란, 타인의 이야기에 반응하고 공감함으로써 나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 나를 타인과 연결하여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반응하지 않고 ‘감정 이입’이 없는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타인의 속으로 들어가야만 타인의 현실을 알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글쓰기에서 윤리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월한 자신’을 재생산하는 글쓰기, 지배와 보편 규범을 재생산하는 글쓰기가 나올 뿐이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함께 느끼고, 상대를 위해 느낀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감정 이입하는 경청은 나도 당사자가 되는 ‘엄청난’ 일이다. 감정 이입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나와서 여행하는 과정, 자신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이다. 감정 이입을 두려워한다면 성장할 수 없다. - ‘감정 이입’·14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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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글이 바로 ‘나’다.”
글쓰기란, 평생에 걸쳐 자신을 알아 가는 일이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의 두 번째 책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는 정희진이 읽은 64권의 책과 글을 쓰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글쓰기는 삶이자 생계라고 담담하게 털어놓는 저자가 서가를 기웃거리고, 책상에 앉아 괴로워하며 자신을 알기 위해 치열하게 쓴 글과 글쓰기 여정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정희진은 “글쓰기는 삶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글쓰기는 ‘말하기’이고, 말하기는 곧 ‘사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평생에 걸쳐 자신을 알아 가는 일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자기 내부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앎의 이유와 목표는 자신을, 우리 자신을 아는 데 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내가 아는 지식을, 내가 쓴 글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는 ‘나’를 알기 힘들다. 이 질문은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탐구로 바뀌어야 한다. …… 내가 알고 싶은 나, 내가 추구하는 나는 협상과 성찰의 산물이지 외부의 규정이어서는 안 되므로/아니므로 우리는 늘 생각의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글은 그 과정의 산물이다. - 머리말·13, 14쪽 “‘내가 먹는 것이 나다’, ‘내가 행하는 것이 나다’라는 진리처럼 나는 ‘글은 곧 글쓴이다’라고 생각한다. 아니, 글만큼 그 사람 자체인 것도 없다.” 정희진은 《침묵의 세계》에 관해 쓰면서 침묵이란 자기와 나누는 대화이며, 자신과의 만남이 존재를 뒤흔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근대초극론》을 읽으며 약자의 자기 찾기는 비서구, 여성, 장애인 등 나를 만든 이들을 모두 거쳐야 하는 멀고 복잡한 과정임을 떠올린다. 《제2의 성》을 읽으면서 여성주의란, ‘인간’과 ‘인간의 여자’로 나누는 권력에 대해 질문하는 인식론임을 깨닫는다. 프랑스혁명기의 페미니스트 올랭프 드 구주의 전기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에서는 위대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역사는 ‘없는 역사’이며, ‘있었다’는 결국 ‘없었다’는 뜻임을 깨닫는다.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글은 글쓴이 자신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쓰는 형식이 다를 뿐이다. 영화든 소설이든 논문이든 신문 기사든, 모두 그 글을 쓴 사람의 이야기다. ……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과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일이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산을 넘는 일이다. - ‘심리적 허기’·246, 247쪽 “살아내는 대로 쓴다” ‘나’에게 돌아오는 글쓰기 글을 쓰고자 하는 많은 사람이 흔히 하는 고민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다. 이 질문에 대한 정희진의 답은 ‘살아내는 대로 쓴다’이다. 이는 ‘몸으로 쓴다’는 표현과 가장 가깝다. 그에게 ‘몸으로 쓰는 글쓰기’란, 자신이 겪은 경험과 이야기를 자기만의 언어로 보여주는 것이다. 《나를 알기 위해 쓴다》에는 정희진이 읽고 만난, 자신에 대한 의문 속으로 뛰어들어 글을 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글쓰기는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뇌성마비 장애 여성운동가 해릴린 루소, 생사를 넘나드는 우울증 경험을 씀으로써 고통받는 몸에 대한 새로운 사유로 나아간 작가 엘리자베스 워첼, 인종주의·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뚱뚱한 흑인 여성이 겪는 일상에 관해 기록한 작가 록산 게이, 쓴다는 것에 대한 막막함과 아득함, 그리고 그 고통이 글쓴이에게 오히려 위안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 소설가 정찬……. 글은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이다. 앎이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지식을 다르게 배치하는 것이다. 지식이 자료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래서 진보(進/步)의 방식은 계속 걷기고, 보수(保/守)의 도구는 과거를 지키는 익숙함(진부함)이다. 쉬운 말은 지배자, 사기꾼, 게으른 이들의 언어다. 한국 사회처럼 스트레스가 많은 곳에서는 선호될 수밖에 없다. 생각은 엄청난 노동이기 때문이다. 자기 모순은 언어를 빼앗긴 이들의 운명이다. 이것이 지배와 피지배 관계의 핵심이다. 강자의 삶과 기존의 언어는 일치하지만 약자의 삶과 언어는 불일치한다. -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다’·165쪽 우리 사회에는 장애, 성별, 이성애 제도에 대한 지식이 없다. 나는 ‘정상인’들의 무지가 차별의 엔진이라고 생각한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매번 대응할 수도 없고, 교정을 요구할 수도 없는 고단한 삶이다. 무지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해결하기 어려운 권력은 ‘몰라도 되는 권력’이다.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글쓰기 중 하나는 사회적 약자의 자기 재현이다. - ‘무지는 어떻게 나댐이 되었나’·178, 179쪽 ‘여성주의’와 글쓰기 저자는 이 책에서 ‘여성주의’를 틀로 삼아 기존의 인식 체계를 질문하는 ‘여성주의 글쓰기’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정희진은 “내게 ‘여성’은 고통이자 자원”이라고 말한다. 여성에 관해서, 여성의 삶에 관해서 쓴다는 것은 때로는 그를 자기 혐오와 연민, 피해의식, 분노로 가득 차게 한다. 하지만 그는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 여성에 관해 쓴다는 것은 나 자신을 아는 일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나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타인에게 어떻게 설득할까.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봐 경미한 사례만 간략하게 인용하고 분석에 집중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과장이 심하다.”, “〈주부생활〉 표절한 거 아니냐.”는 독후감을 말할 때 두 번째 좌절이 왔다. “어머니가 맞고 사시냐.”, “매 맞는 남편도 있다.”, “폭력 가정은 극소수다.”처럼 여기 다 적을 수 없는 내용이 세 번째 좌절이다. 왜 여성의 경험을, 말을, 생각을 믿지 않을까. - ‘임신 중 구타가 유아 사망의 주원인’·212쪽 단도직입적으로 여성주의만큼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학문은 드물다. 아니, 글쓰기와 여성학의 인식론, 방법론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문학은 언어의 역사이고, 여성주의는 언어의 역사가 형성된 과정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자명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개입된 권력 관계를 질문한다면, 기존 여성주의를 포함해 세상의 모든 언어는 상대화와 붕괴(의미의 다변화)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주의와 글쓰기 공부는 별개의 실천이 될 수 없다. - 머리말·15, 1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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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은 독자적인 창작이자 새로운 글이다.”
육화된 책의 내용을 몸속에서 뽑아내는 일 정희진은 자신이 ‘페미니즘’이라는 특정한 사고방식에 집중하는 필자이자, 고통과 몸, 권력과 지식, 젠더와 관계 등 논쟁적인 주제에 관심 있는 독자라고 털어놓는다. 이 책은 페미니즘을 인식틀로 삼아 온몸으로 견디고, 통념을 부수고, 질문을 던지며 써내려 간 그의 독후(讀後)의 기록이다. 페미니즘은 다른 세계, 몰랐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그 충돌에서 최대한 심각한 부상을 입는 과정이 바로 글쓰기이며, 그것이 자신을 진전시키는 힘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렇게 글을 쓰는 과정에서는 깊은 여운이 남고, 괴롭고 슬프고, 다양한 차원의 변화를 이끄는 고통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가 글을 계속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여성주의적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가 ‘공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페미니즘을 ‘열심히 공부한다’. 내가 아는 한 페미니즘은 인류가 만들어낸 그 어떤 지식보다 수월(秀越)하다. 정치적, 이론적, 학문적으로 다른 어떤 언설보다 세련되고 앞서 있으며 상상력조차 뛰어넘는 참신한 문제의식과 질문을 던지는 사상 체계다. 지식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행위라면, 또 지식이 윤리적이어야 한다면, 그리고 지식이 사유 능력을 의미한다면 최소한 페미니즘을 따라올 지식은 없다. - ‘세상의 모든 페미니즘을 나의 것으로’·146쪽 정희진은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에 실린 책이 모두 자신이 선호하는 책, 가장 도움이 되었던 책은 아니라고 말한다. 동의하지 않는 책, 비판받아야 할 책도 있다. 정희진에 따르면 어떤 책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독자의 반응과 평가라는 ‘비평’의 과정이 있어야 책은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희진이 말하는 다양한 시각의 서평이 나와야 하는 이유다. 공동체에 책과 서평이 필요한 이유는 사유의 방향을 틀기 위해서이다. 서평이 없다면 텍스트는 맥락 없이 부유한다. …… 해제가 필요한 이유는 책을 쉽게 읽기 위한 풀이라기보다 로컬의 상황, 즉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서다. 맥락 없는 책 읽기처럼 위험한 일도 없다. - 머리말·20쪽 내용 구성 1장 아픔에게 말 걸기 _ 온몸으로 견디며 쓴다 1장에는 정희진이 “내 인생과 공부의 평생 주제”라고 밝힌 ‘고통’과 ‘몸’에 대해서 쓴 글이 실려 있다. 고통과 몸에 관한 연구는 곧 글쓰기의 문제와 연결된다. 군 위안부 여성의 고통스러운 경험, 성폭력 피해자가 받는 모욕감, 정신 질환자와 암 환자의 통증, 장애인이 감내해야 하는 불편…… 고통받는 몸과 사람에 관한 글쓰기는 자기 연민과 호소, 고통을 들어주지 않는 이들을 향한 분노와 절망 등 수많은 사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정희진은 고통과 몸에 관해 쓰면서 사회의 ‘크기’는 고통을 대하는 태도와 고통을 품을 용량에 의해 가늠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자신을, 몸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란 혁명에 준하는 발상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러한 발상의 전환을 위해서는 몸에 대해 쓰기, 말하기, 듣기가 필수적이다. …… ‘사회적 약자’는 평생을 자신을 사랑하는 문제와 투쟁해야 하는 이들이다. 성별, 인종, 계급, 나이는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해석이다. 몸의 영역에는 쉽거나 작은 실천이 없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알고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가장 어려운 혁명, 내 몸 긍정하기’·48쪽 모든 글에는 발신 주소(address)가 있지만, 특히 고통에 관한 글은 발화자가 명확하지 않으면 문제가 된다. 글쓴이의 위치성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면 남의 고통을 팔거나 나의 고통만 중요한 글이 된다. 고통의 공감 불가능성 때문이다. 물론 고통받은 당사자만이 쓸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의 고통은 내 몸 안에 있지만 ‘나’라는 자아는 내 몸 밖,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한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가 이것이다. - ‘두려운 것은 죽음보다 고통이다’·85, 86쪽 2장 우리에겐 불편한 언어가 필요하다 _ 통념을 부수는 글쓰기 2장에는 자신의 경험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여성의 현실에 대한 정희진의 치열한 고민이 담긴 글을 모았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경험은 강자인 남성의 시각에서 해석된다. 저자는 자신이 페미니즘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바로 ‘쾌락’에 있다고 말한다. 지적인 쾌락, 분노가 선사하는 쾌락, 통념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의 쾌락이다. 지식으로서 페미니즘의 매력은 사회적 약자가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준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그는 글을 쓰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여성의 현실이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왜 사회는 여성의 경험을 믿지 않는가? 왜 우리는 언제나 이 문제가 “사소하지 않다”고 외쳐야 하는가? 여성이 모르는 남성에게 집 밖에서 죽으면 충격적인 사건이고, 집에서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맞으면 사소한 일인가. …… 장소는 중요하다. 사회는 남성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장소인 집 안에서의 폭력을 관용한다. 하지만 공권력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길거리에서 일어난 살인은 문제적이다. 남성 권력의 무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의 인권보다 ‘어디서 죽었는가’가 중요한 이슈가 된다. - ‘자기 경험을 믿지 못하는 여성들’·104, 105쪽 어떤 관계든 간에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노동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냥 인간사다. 공적 영역에서는 그러한 노동이 위계화, 분업화, 분담화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계급 문제라고 부른다. 그러나 ‘집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재생산 노동(육아)과 의식주 생활은 몸이 불편한 사람이 아닌 한 각자가 해결해야 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다. 자기가 먹은 밥그릇은 자기가 치우는 것이다.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개인) 미달’이다. 그러므로 ‘주부’나 ‘아내’는 정체성도, 직업도, 지위도 될 수 없다. - ‘저출산의 간단한 이유, 노동하지 않는 남성’·112, 113쪽 3장 몸의 평화가 깨지는 순간 _ 질문하고 해체하는 글쓰기 3장은 익숙한 논리와 상투적 언어에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사유로 나아간 사람들과 책에 관한 글을 모았다. 정희진에 따르면 익숙함은 사고를 고정시킨다. 쉽게 읽히는 글은 실제로 쉬워서가 아니라 익숙하기 때문에 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폐쇄적인 한국 지식인 사회 바깥에서 독창적인 목소리를 냈던 탈식민주의자 리영희,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해체하는 글쓰기를 보여준 소설가 트루먼 커포티, 페미니스트이자 성산업 종사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대담하게 글로 쓴 레이첼 모랜은 주류와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는 글쓰기가 창의력과 상상력의 원천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가 시대를 이끈 사상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류 학문 밖에서 스스로 훈련했기 때문이다. ‘썩어 있는’ 현재의 제도화된 학문 환경의 변화가 없다면 당분간 리영희 같은 독창적이고 진정성 넘치는 탈식민주의 지식인은 탄생하기 어려울 것이다. 리영희는 보편과 초월을 욕망하는 여느 남성 지식인들과 다르게 ‘목소리(text)’는 ‘관계(con/text)’ 속에서만 들린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을 역사 ‘너머’가 아니라 철저히 역사 속에 위치시킨다. - ‘가장 글로컬했던 근대인’·178쪽 저자는 7년 동안 성산업에 종사했다. 글쓴이의 포지션, 누가 말하는가는 페미니즘의 중요한 이론적 주제이다. 경험은 정치적, 인식론적으로 선택되고 구성된 기억이다. 당사자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글도 있지만, 실은 당사자이기 때문에 쓸 수 없거나 쓰기 어려운 글이 훨씬 더 많다. …… ‘특별한 경험’을 겪은 당사자의 글쓰기는 이토록 어렵다. 오해와 낙인으로 가득한 고통스런 경험에 대한 글쓰기는 더욱 그렇다. 고립감, 자기 연민, 자기 방어, 자의식을 지양하는 글쓰기는 “죽었다 깨어났다”고 말하는 환골탈태, 재탄생의 과정이다. - ‘당사자의 글쓰기’·211, 21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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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나에 대한 이야기다 나 역시 내 인생의 영화가 있고, 영원히 각인되는 장면이 있다. 내 인생의 영화는 바뀌는 편이지만, 한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이 책은 내가 영화를 볼 때 어느 지점에 착목하는가에 관해 말한다. 처음 영화를 볼 때 이런 관점으로 보겠다고 작정하고 보는 경우는 없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내가 “이 영화를 이렇게 봤구나” 하고 어렴풋이 되새기고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그 영화에 대해 쓰는 과정에서 조금 더 윤곽이 드러난다. …… 영화의 주장은 감독이나 다른 관객 혹은 평론가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정한다. 각자가 정한 그 생각들이 모여 바람직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 ‘머리말’에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의 경험, 위치, 동일시한 부분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하면 영화보다 더한 나의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4권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는 우리 시대의 가장 독창적인 비평가 정희진이 영화와 드라마라는 텍스트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치열하게 써 내려간 18편의 글을 담고 있다. 논쟁적인 다큐멘터리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기억의 전쟁〉에서부터 천만 영화 〈부산행〉 2022년 화제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까지, 모든 영화와 드라마는 정희진을 거쳐 ‘나’에 대한 글쓰기로 재구성된다. 정희진에게 영화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중요한 영역’이자 ‘삶의 방도’다. 개인이 결코 다 알 수 없는 드넓은 현실을 비록 일부일지라도 영화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감상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리를 분명히 할 때에만 무엇을 모르는지 가늠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앎의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영화나 드라마 자체의 내용보다 감상자의 위치와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키운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문장에 살아 숨 쉬며 책 전체를 지배한다. 영화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현실보다 더 현실을 정확하고 넓게 드러낸다. 영화의 힘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모르는 현실을 알 수 있는 강력한 매체 중의 하나다. 그래서 영화 감상이나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삶의 중요한 영역이요, 삶의 방도다. - 26쪽 “글쓰기 과정이 ‘공개되는’ 글, 필자의 사고방식을 독자가 파악할 수 있도록 쓰인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정희진은 영화 비평을 비롯해 ‘독창적’ 글쓰기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는 부분적 관점(partial perspective)이라고 말한다. 부분적 관점은 모든 사람의 생각을 똑같이 ‘여럿 중의 하나’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의 정치학을 분명히 하면서 인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실천”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영화에 대해 쓰며 여성주의, 마르크스주의, 생태주의, 탈식민주의 등 자신을 이루는 정체성, 사고방식을 적극적으로 공개한다. 자신을 있는 힘껏 설명할 때 타인과의 의미 있는 대화도 가능하다고 저자는 믿는다. 독창성은 벼랑 끝이라는 맥락, 부분적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부분적 관점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인 객관성 개념에 나의 목소리를 보내고 조율하고 틈새를 내는,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중요한 실천이다. - 21쪽 1장 갈증의 언어 “언어는 언제나 현실보다 늦게 당도한다” 1장에는 여성주의적 관점이 두드러지는 영화 비평들을 모았다. 가부장제의 논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성의 자기 분열적 텍스트 〈비밀은 없다〉, 피해와 피해자에게 공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암수살인〉과 〈스톱〉, 사회적 약자가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문제적 감독’ 김기덕과 할리우드 미투 운동에 ‘연루된’ 배우들을 향한 날카로운 비평들이 흥미롭게 서술된다. 2장 통증의 위치 “나는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가” 2장에는 우울과 외로움을 비롯한 몸의 통증을 사유하는 글들을 실었다. 정희진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드러내는 장면을 결코 놓치지 않는 관객이다. 〈피고인〉에서 성폭력을 당한 조디 포스터가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과 〈화양연화〉 속 ‘유명한’ 앙코르와트 장면을 통해, 저자는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든 털어놓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외로움’에 대해 깊이 사유한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는 정희진에게 ‘내 인생 치유 영화’다. 정희진은 우울증 증상을 무중력 상태에 빗대 영화 속 우주 공간을 새롭게 창조해 나간다. 이외에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먀 부시코〉 등 거장의 명작들이 그만의 독창적 시선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3장 ‘타자의 목소리, 나의 목소리 “다름은 진실을 해체한다” 마지막 3장에는 사회와 공동체의 역할을 성찰하는 다소 ‘무거운’ 비평들을 실었다. 일본 사회의 그늘을 비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이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만행을 증언하는 〈기억의 전쟁〉이 한국인의 잘못을 반성하는 ‘착한 텍스트’로만 읽히는 것이 왜 두려운 일인지, 일제 강점기 한국인 최초 여성 비행사 박경원을 다룬 〈청연〉을 ‘친일’ 영화로 낙인찍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흔히 비장애인의 몸으로 비유되곤 하는 ‘정상 국가’의 모습을 〈작전명 발키리〉가 어떻게 전복하는지, 통렬하고 담대한 저자의 물음들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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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언어가 나의 삶을 삼켜버릴 때,
현실이 교착 상태에 빠져 공동체가 고통받을 때 새로운 말을 찾는 과정이 융합이다.” 융합은 지배적 담론에서 벗어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공부법이다.《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에는 새로운 앎을 생성하는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와 그 예시를 보여주는 29편의 글이 실려 있다. 새로운 언어를 창안하는 융합적 사고는 단순히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가에 따라 공동체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새로운 앎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정희진은 기존의 논리를 답습하는 정의롭지 않은 지식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 융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당파성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융합은 약자와 지구에 봉사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일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작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내 글을 읽는 독자가 적더라도 최선을 다해 다른 세계를 만들고 싶다. 자본에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많은 글 쓰는 이들의 고민일 것이다. …… 나는 내 글이 ‘보편적인 독자’를 초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안다. 내 글은 당파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장에서 실패한다면, 그 또한 쓸 이유가 없다. 나는 이 문제에 융합으로 ‘대응’해 왔고 이 책에서 독자들과 공유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 ‘머리말’ · 13, 14쪽 1장 생각대로 살지 않으려면 1장은 융합적 사고를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에 관한 글을 모았다. 흔히 공부라고 하면 플라톤과 공자로 대표되는 고전을 공부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도 부분적 지식에 불과하다. 정희진은 새의 위치에서 전체를 보겠다는 조감도로는 건물 내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대상 전체를 포괄하고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보편 지식이란 없다고 말한다. 중요한 건 모든 지식은 누군가의 위치에서 출발했음을 깨닫고 세상이라는 지도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다. 새로운 지식을 만들려면 자신이 뿌리 내리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2장 파국의 시대, 공부란 무엇인가 2장은 융합적 사고로 공부하는 법을 다룬 글을 모았다. 왜 고학력자가 ‘범람’하는데도 문해력은 ‘최하위’ 수준에 머무르는가? 정희진은 입시나 취업 준비같이 천편일률적인 공부만 지속하는 사회를 문제 삼으며 그 대안으로 새로운 공부법을 제시한다. 공부는 사유라는 외로운 노동을 혼자서 감당하며 자신의 몸을 변환하는 과정이다. 저자는 읽기, 여행, 경험 등 여러 공부법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쓰기가 최고의 공부법이라고 말한다. 글을 쓰면서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 수 있고, 그 과정을 반복하며 새로운 지식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이를 메우는 과정이 곧 공부이며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앎을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3장 다른 것을 다르게 보기 3장은 다양한 대상을 한 단어로 뭉뚱그려 설명하는 게으름을 비판하고 다른 것을 다르게 바라보는 방법을 다룬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차이의 교차로에 놓여 있다. 하지만 차이는 필요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왜 같은 ‘국제 가족’이어도 외국인 배우자가 ‘미국 신랑’이면 글로벌 패밀리, ‘베트남 신부’면 다문화 가족으로 불리는가? 남성 중심주의와 인종주의가 반영된 이러한 인식은 ‘다문화’를 둘러싼 논의를 납작하게 만든다. 정희진은 각자 자기 입장이 있는 이질적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세상 모든 가족은 다문화 가족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국가, 젠더 따위를 기준으로 삼아 일방적으로 그어진 경계를 허물고 자신이 직접 관계를 구획하는 작업이 곧 새로운 사유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4장 고정된 프레임을 넘어서 4장은 대상을 바라보는 고정된 시선을 허무는 방법에 관한 글을 모았다. 세상은 한 화면에 담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팬데믹 시대,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은 집은 안전한 공간이라는 프레임에서 시작되었다. 주거가 불안정한 사람,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집이 지옥인 사람도 있지만 이들의 존재는 프레임 밖에 놓여 있다. 정희진은 어떤 현실에 집중할 것인지 선택하는 능력과 안목이 개인과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현실은 우리가 고른 프레임에 맞춰 재구성된다.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새로운 언어는 기존의 프레임을 해체하는 작업에서 출발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