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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1930
옮긴이의 말 | 후대로서 답하다 |
E. M. Dela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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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접의자로 돌아가지만 《아메리카의 비극》을 마주할 기력이 남지 않았다. 방수복을 입은 사내가 내게 말한다. 거기 있으면 걸리적거려요, 아가씨. 나는 접의자와 《아메리카의 비극》을 챙겨 반대편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방수장화를 신은 사내가 내게 말한다. 거기 있으면 여기저기 부딪칠 텐데. 접의자와 《아메리카의 비극》을 챙겨 다시 자리를 옮긴다. “아가씨”라고 불러줘서 그나마 마음이 누그러지는 듯.
--- p.31 오후에 레이디 복스가 찾아온다. 혹시 내가 폐렴에 걸렸을까 봐 걱정돼서 왔나? 하고 잠시 기대하지만 그녀는 대뜸 5월 초에 열릴 바자회를 도와 달라고 한다. 좀 더 캐보니 정당의 기금 마련을 돕는 바자회란다. 내가 묻는다. 어떤 정당요? (레이디 복스의 정치관은 이미 잘 알고 있는데 내가 당연히 자기와 똑같은 정당을 지지할 거라 생각했다니 부아가 난다. 어림없는 소리.) --- p.81 내가 잠깐 집에 들어왔다 가라고 성화하자 그녀는 아이고, 아니에요, 아니야,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요, 하고는 들어온다. 로버트와 헬렌 윌스가 응접실에서 자고 있다. 목사님 아내는 잠깐만 앉았다 일어나겠다고 한다. 우리는 시골 여자들과 스탠리 볼드윈, (우리 둘 다 가본 적도 없는) 마데이라 섬의 호텔들, 그 밖의 뜬금없는 주제들에 대해 잔뜩 떠들어 댄다. 에설이 코코아를 내주지만 쟁반을 내려놓는 꼴을 보니 화가 난 게 틀림없다. 아무래도 내일은 사직서를 낼 것 같다. --- p.92 나는 황급히 로즈의 저명한 여성 운동가 모임을 언급한 뒤 내가 그 모든 여성 운동가들과 매우 친한 사이이며 그들과 이런 주제에 관해 자주 논의한다는 듯이 말한다. 레이디 복스는 (세탁한 게 아니라 새로 산 듯 희고 우아한 염소가죽 장갑을 낀) 손을 저으며 단호하게 말한다. 다 좋은데, 그 사람들도 남편이 있었다면 여성 운동가가 되지 않았겠지. 나는 그들 모두가 남편이 있거나 있었다고, 몇몇은 두 번, 세 번 있었다고 반박한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때보다도 강한 살인충동에 휩싸인다. --- p.129 이런 위기 상황에서 로버트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지독히 가부장적인 태도로 “모두가 별것도 아닌 일에 수선을 피우고” 있으며 마치 이 모든 상황이 자기를 불편하게 하려고 꾸민 일이라는 듯이 말한다. (하루 종일 나가 있다가 평소와 똑같은 시간에 들어와 꼬박꼬박 저녁을 먹으면서 대체 무슨 불편을 겪는다는 건지 모르겠다.) --- p.139 나는 정정해 보이는 노신사와 한 팀이 되어 뿔테 안경 청년과 값비싼 프랑스제 실크 옷을 입은 날렵한 젊은이의 팀과 겨룬다. 대번 깨달은 사실이지만 셋 다 나보다 테니스 실력이 월등하다. 게다가 그들 역시 이미 그 사실을 깨달은 눈치다. 경기가 막 시작되려 할 때 내 파트너가 진지하게 귀띔한다. 아무래도 자신이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내게 알려줘야 할 것 같다고. 도무지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잠시 고민하다가 내 입에서 어이없는 대답이 나온다. “굉장하네요.” --- p.174 요리사가 굴뚝 청소를 부르지 않으면 화덕이 어떻게 되든 책임질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나는 얼마든지 굴뚝 청소를 부르라고 대꾸한다. 요리사는 내 말을 무시한 채 앞으로 어떻게 되어도 자기는 모른다고 다시 으름장을 놓는다. 나는 당장 굴뚝 청소부를 부르겠다는 확고한 의사를 거듭 표하지만 요리사는 계속 내 말을 무시하며 굴뚝 청소를 부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어째서인지 이 대화 때문에 하루 종일 열불이 난다. --- p.178 날이 춥고 으스스하다. 내가 불평하자 로버트는 꽤 따뜻한 날씨인데 내가 충분히 움직이지 않는 탓이라고 단언한다. 자주 깨닫듯 남자들은 삶의 소소한 문제에 절대 공감해 줘선 안 된다는 이상한 규칙을 갖고 있는 것 같다. --- p.212 변명하려는 헨리와 로빈을 간신히 말려 침대로 보낸다. 복도를 지나 내 방으로 돌아갔을 때 비키가 깨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도 가면 안 돼?” 하며 떼를 쓰기 시작한다. 본능(뭐라고 집어 말할 순 없지만 모성 본능보다 더 강한 본능)이 내게 지시한다. 그냥 마드무아젤에게 맡기고 잠을 자라고. 나는 망설임 없이 그 본능을 따른다. --- p.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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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발 대공황이 세계 경제에 그늘을 드리우고 여성의 참정권을 위한 투쟁이 막 결실을 보기 시작한 1929년 말 잉글랜드의 지방 소도시. ‘나’는 지적이고 현대적인 여성의 삶을 꿈꾸지만 작은 시골 마을의 궁색한 생활은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무뚝뚝한 남편은 신문을 끼고 잠이 들지 않으면 투덜거리기 일쑤고, 말썽꾸러기 아들과 딸은 손님만 오면 더욱 창피한 상황을 연출한다. 부모 눈에는 자기 자식이 최고라는데 남의 집 아이들이 더 얌전하고 똑똑하고 예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도 나에겐 누구보다 소중한 아이들이기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현대적인 엄마가 되려고 발버둥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쪼들리는 살림 때문에 독촉장은 쌓여 가는데 명색이 상류층 지식인이라 체면을 구길 수도 없는 노릇. 철마다 만찬과 무도회에 입고 갈 옷을 마련하느라 소중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전당포에 맡겨 놓고 전전긍긍한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의 고용주인 대지주 레이디 복스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염장을 지른다. 하지만 어쩌랴, 속으로만 복수의 칼날을 갈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일기를 쓴다. 가진 것도 배짱도 없는 보통 여자로서 소심하게나마 고정관념과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2017년에 시작된 미투 운동을 계기로 여성 작가의 숨어 있는 고전 작품을 발굴하는 열기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1930』 역시 이런 흐름을 타고 처음 국내에 상륙했지만 놀랍게도 이 100여 년 전 영국 여인의 이야기는 고전으로 분류하기 어려울 만큼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다. 얼핏 보기에는 별 일 없는 지방 소도시의 일상을 담고 있지만 작가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풍자적 유머는 그저 그런 일상마저도 생동감 있게 채색한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까지 금방이라도 책에서 튀어나올 듯 현실감이 넘친다. 무뚝뚝한 남편과 말썽꾸러기 아이들, 늘 지나친 겸손으로 상대방을 난처하게 하는 블렌킨솝 노부인, 이야기를 시작하면 도무지 멈출 줄 모르는 수다쟁이 목사님 아내, 과격한 페미니즘으로 모두를 피곤하게 만드는 미스 팬커톤, 남의 사정 따윈 안중에도 없는 거만한 대부호 레이디 복스, 세상 모든 일이 슬프지 않으면 감동적인 호들갑의 여왕 마드무아젤, 그 밖의 많은 인물이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 마주친 누군가와 겹쳐진다. 마치 소소한 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트콤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의 매력은 그뿐만이 아니다. 팍팍한 육아맘의 일상 기록 속에서 100여 년 전의 시대상과 영국 지방 소도시의 생활상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정치 문제, 미국발 대공황의 여파, 여성운동, 하인 문제 등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버지니아 울프의 정신적 연인으로 유명한 작가 비타 색빌웨스트와 H. G. 웰스, 버나드 쇼 같은 당대 거장들이 심심찮게 언급되기도 한다. “이 여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이 지독히도 현실적으로 와닿는 까닭은 그녀가 우월한 위치에서 타인을 관찰하고 냉소하기보다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신이 속한, 한없이 부족한 ‘인간 종족’을 자조하고 연민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써 그녀는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이 되어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해 버리는 인간의 흠절을 끊임없이 각성하게 한다. 정작 자신은 바쁜 현실에 치여 숙고해볼 시간이 나지 않거나 괴로워서 모른 체하고 싶은 문제들을 우리에게 던져주기도 한다. 아울러 이 여인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를, 특히 여성을 괴롭히는 구태를 꾸준히 건드린다. 표면적으로는 가부장제에 순응하고, 고정관념을 깨지 못하는 다른 여성들에게 동조하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개탄하기를 잊지 않는다. 남편의 고용주인 듯 보이는 레이디 복스의 무심한 언행에 속수무책 당하면서도 뒤에서 반기를 들거나 복수를 꿈꾼다. 가진 것을 모두 내팽개치고 나설 용기도 없고 그럴 형편도 되지 않는 ‘보통’ 여성들에게 그녀는 소심하게나마 저항하는 방법을 일깨운다. 이 작품이 처음 연재된 [시간과 조수]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맥락을 제공했지만 이 여인의 페미니즘은 소심하되 무해하고 유효 기간이 길다. 한 영문학자는 ‘일상 페미니즘(Everyday Feminism)’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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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더 널리 알려지고 읽힌다면 좋겠다. 힘든 시기에는 우리의 일상이 계속 이어질 거라는 사실을 확인하기만 해도 큰 위안이 되니까. -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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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30년에 처음 출간됐지만 여전히 참신하고 예리한 최고의 코믹 소설이다. 익살스럽게 그린 가정의 삶이 공감과 웃음을 끌어내고 그 안에 담긴 역사적 기록은 시간이 흘러도 결코 빛을 잃지 않는다. - 인디펜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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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짓의 엄마보다도 먼저 태어난 ‘어른 맛’ 브리짓 존스. 주인공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문제들에 시달린다. 그녀는 지금껏 탄생한 모든 소설 속의 주인공 ‘엄마’들의 대모다. - 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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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앉은 자리에서 이 책을 다 읽었다. 아이들 목욕도, 개들 산책도, 남편의 식사 준비도 잊은 채. - 질리 쿠퍼 (영국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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