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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거리
파경(破鏡) 우울한 사람 희생자 회한(悔恨) 사랑과 죄 명암(明暗) 애욕지옥 해설: 이종명과 장편 연재 소설 『애욕지옥』(김정화, 선문대 인문미래연구소 전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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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지의 분위기는 젊은 남녀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애라와 사나이는 어느 사이에 눈웃음으로 인사를 교환하기도 하며 혹시 동행이 되었을 때는 그날의 날씨에 대하여서나 또는 허물없는 이야기에 소리를 내어 웃을 만치 친밀해졌다.
그것이 그 사나이와 처음 만나서부터 불과 칠팔일 뒤의 일이었다. 생각하면 작은 우정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사이에 상대방이 오지 않는 것을 ‘겁낼’ 만큼 발전했다는 것은 그들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 p.28 “이름은?” 영호가 다그쳐서 묻자 애라는 순간 “김숙희”라고 대답했다. “김. 숙. 희. 씨.” 영호는 마치 맛있는 음식을 씹듯이 그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되풀이했다. 그러나 실상 놀란 것은 애라 자신이었다. 설사 이름을 알려 준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이름이 있건만 어째서 하필 김숙희의 이름을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숙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보다도, 한순간 무심코 흘러나온 이 말에 자신도 몹시 놀랐으나 이미 영호가 그 이름을 되풀이한 뒤였다. --- p.34 “사회면 마감!” 이 소리가 들리면 사회부에서는 갑자기 해방된 것 같은 환성이 일어난다. 점심을 시켜 먹는 사람, 담배를 피우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혹은 염치 좋게 책상 위에 두 발을 올려 놓는 사람……. 이런 와중에 그들은 제각기 뽐내며 잡담을 내놓기 시작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개 먹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다음에는 여자의 이야기로, 그리고 나중에는 돈 이야기로 들어가는 것이 순서였다. 매일같이 이런 순서는 변함이 없었다. --- p.69 숙희는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석진 씨! 석진 씨는 그런 알지 못하는 사람의 풍문은 믿으면서 이 숙희의 말은 못 믿으시나요?” 마지막으로 용기를 다해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네. 나는 아무것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석진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듯 두 손으로 머리를 짚고 테이블에 엎드리더니 부르짖었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으려 합니다.” --- p.83 휘황찬 아크등 아래 뚜렷이 드러난 그 얼굴은 예상 밖에도 삼방에서 만났던 그 여자, 숙희라고 자칭하던 그 여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이것이 무슨 까닭일까? 최 의사는 그것이 도리어 놀라웠다. 이름이 같고, 나이가 같고, 만났던 장소가 같고, 모든 것이 부합됨에도 불구하고 단지 얼굴만 다른 사람이라니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나마 지금 수술대 위에 드러누워 있는 그 여자의 얼굴은 어디서 언제인지 본 듯한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아리송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잠깐 놀란 것이었다. --- p.110 애라는 그만 무슨 진저리칠 만한 것을 바라본 것처럼 몸을 돌려 걸음을 빨리했다. 그녀는 헐떡거리며 걸어가 면서 속으로 ‘그 사나이도 분명 나를 알아본 것이다. 아아……’ 하고 부르짖었다. 그녀는 그만 가슴이 떨리고 겁이 나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 무슨 기막힌 우연인가? 숙희의 무덤을 찾아갔다 오는 이 길에서 하필 그 사나이를 만나게 되다니. --- p.128 “오늘 밤은 눈도 오고 하니 눈을 맞아 가며 걸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그럼 그래 볼까요.” 그래서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시 종로를 향해 올라갔다. 밤이 그리 으슥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드물었다. 가끔 큰길에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거리고 지나갈 뿐 그다음 순간부터는 소리 없는 흰 눈만이 이 세상에 모든 더러운 것을 덮어 주려는 듯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눈 오는 깊은 밤에 쓸쓸한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 같았다. 더구나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까닭 없이 센티멘털해졌다. --- p.163 “오늘 애라 씨를 나오시라 한 이유는 이겁니다. 나는 애라 씨를 사랑합니다.” 영호는 미친 것처럼 이렇게 부르짖으며 불이 붙는 것 같은 입술을 애라의 얼굴 위에 더듬었다. 애라는 놀랐다기보다는 거의 본능적으로 반항했다. 그녀는 필사의 힘을 다해 사나이의 두 팔에서 몸을 빼려고 허우적거렸다. 이렇게까지 영호가 야폭(野暴)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애라는 입술을 깨물고 압박해 들어오는 사나이의 가슴을 떠밀었다. 그 순간 영호의 입에서 “앗!” 하는 날카로운 비명이 흘러나오자 그의 몸은 허공을 끌어안은 채 그들의 발밑에 있는 너덧 길이나 됨직한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 p.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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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뛰어넘는 파격적이고 섬세한 표현 기법과 문체!
당대 인습의 폐해를 고발하고 나아가 인간중심주의 문학을 시도하다 그러나 『애욕지옥』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중 문학적 속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소설 초반부에 숙희로 가장한 애라와 영호의 에로틱한 장면부터 중반부에 죽은 숙희가 처녀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병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기괴함, 처음에는 순진한 청년이었던 영호가 악인으로 변해 애라를 스토킹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미스터리와 스릴러적 요소까지 요즘 소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또한 심리적 불안감과 소리를 통한 청각적 공포를 전달하는 문체는 소설이 발표된 시기를 감안하더라도 세련된 표현 기법이다. 이외에 석진이 근무하고 있는 신문사 등의 배경에 대한 묘사도 훌륭하다. 구인회 구성원들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거장의 반열에 올라 있는 반면 같은 시대에 문학 활동을 펼쳤던 이종명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연애, 결혼과 관련한 전통, 새 풍조를 보여 주는 동시에 인습의 폐해를 조명한 『애욕지옥』을 보더라도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대중 문학 작가였다. 나아가 인간과 인간 사이를 탐구한 ‘인간중심주의’ 문학을 시도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 〈한국근대대중문학총서 틈〉 소개 한반도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언어공동체이면서 독서공동체이기도 하다. 우리는 같은 작품을 읽으며 유사한 감성과 정서의 바탕을 형성해 왔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면 우리 독서공동체를 묶기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누군가는 『만세전』이나 『현대 영미시선』 같은 책을 읽기도 했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장터거리에서 『옥중화』나 『장한몽』처럼 표지는 울긋불긋한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고 책을 펴면 속의 글자가 커다랗게 인쇄된 책을 사서 읽기도 했다. (…) 그중에는 우리 문학사에서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던 소설책들도 적지 않다. 전혀 알려지지 않은 낯선 작가의 작품도 있고 유명한 작가의 작품도 있다. 본격문학으로 보기 어려운 이 소설들은 문학사에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것들이다. ― ‘발간사’ 중에서 발간사에서 이렇게 밝혔듯 〈틈〉 총서는 그간 한국 문학사에서 제대로 다뤄지거나 거론된 적이 별로 없었던 대중소설을 주로 소개할 계획이다. ‘본격문학’의 큰 흐름들 사이에서 그간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잊혔던 작품들 중 오늘날 독자들에게 소개할 만한 것을 가려 재출간함으로써 근대문학사의 군데군데 빈틈을 채워 넣으려 한다. 특히 일제 강점기와 그 전후를 아울러 민중들에게 읽히고 상상력을 자극했던 작품들을 발굴한다. 과학소설, 탐정소설, 연애소설, 무협소설 등 그 장르도 다양하게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작품들이다. 일찍이 학교에서 배우거나 들어 본 적 없는 소설들이지만 당대 대중들의 정서에 가장 가까운 욕망과 상상력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이야기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본 총서를 통해 근대 독서공동체의 모습이 조금 더 실체적으로 드러나리라 기대한다. 또한 〈틈〉 총서는 다양한 시각자료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친절히 소개하고자 한다. 소설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판을 본문 사이사이에 배치한다. 시대사적 의의를 짚어 주는 해제 작업 또한 본 총서의 중요한 부분이므로 책의 후반에는 문학연구자의 해설이 함께한다. 현장에서 한국문학을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연구자, 교육자들로 구성된 기획편집위원회가 선정부터 해제, 주석 작업까지 책임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