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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晳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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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잘 때를 생각해봐. 온 밤내 같은 줄거리의 꿈을 꾸게 되지는 않아. 깨고 나면 몇 장면만 또렷하게 남곤 하지. 아무도 그 흐름을 미리 예상할 수는 없어요. 생이 어떤 결말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것들이 서로 끼여들지 않고는 어떤 대목이 중요했는가를 모르고 죽게 될 거야.
--- p.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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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추상화하지 마라. 뒤 마려워봐, 그 순간부터 나는 속박된다구. 돈 없이 어디서 자유를 찾아. 이들은 자신이 속했던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양보하며 나누어 누리던 자유를 타락시킨 거라구. 이쪽이 낙원이 아니듯 저쪽두 낙원이 아니었어. 이제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거야. 우리 세기의 약속들을 지켜내야만 할 거야.
--- p.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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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 p.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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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곳을 찾았나요? 윤희가 내게 묻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오,라고 나는 대답할 것이다. 인가를 찾아서 산을 넘고 언덕을 내려오는 중이라고, 멀리 마을의 불빛이며 연기나는 굴뚝이 보인다고. 당신이 살고 겪어온 길을 따라서 나는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고. 나는 젊은 내 얼굴 뒤편에 떠오른 그네의 눈길 이쪽으로 서서 중얼거렸다. 다녀올게.
--- p. 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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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짜증은 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애기엄마이고 그보다는 좀더 철이 들었다고 생각되었거든요. 그가 두꺼운 안경알 뒤에서 가늘게 눈주름을 잡고 웃고 있었어요. 뭘 숨기려고 한다든가 해 보이지는 않고 선량한 것 같기는 해도 별로 서두를 것이 없다는 투로 어딘가 여유 만만해 보였죠.
나는 하는 수 없이 돌아가달라고 딱 잘라서 말하지는 못하고 그를 그냥 응접실에다 놔두고 화실 쪽으로 돌아갔어요. 송영태란 사람이 정희와 관련이 있어서는 아니었지만 그의 아주 자연스러운 느긋함에 나도 저절로 전염된 듯이 그에게 돌아가달라고는 말하지 못했어요. 나는 학생들에게로 돌아가서도 처음엔 좀 신경이 쓰여서 자꾸만 입구쪽을 돌아보고는 했답니다. 학생들 사이로 돌아다니다가 바깥 응접실이 내다보이는 데서 아직도 있나 하면서 힐끗 들여다보니까, 글쎄 송영태는 낡은 가죽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책과 종이며 사전이며를 벌여놓고는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 p.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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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와 내 벗들의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우리가 겪은 일들을 미래나 예견에 사호잡힌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현실 변화를 끌어내오기 위한 구체적인 과정으로서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제는 시대나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물결 속에 휩쓸리며 헤엄쳐가던 하찮고 갸냘픈 개인의 나날을 통해서 세상을 보아야 한다고도. 세로운 세기에 지난 세기의 암울한 고통과 상실과 좌절을 되새기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질문이 계속되는 한 우리응 언제나 다시 출발할 것이다.
--- pp. 318-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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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황석영의 신작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 방북사건 이후의 독일 체류와 귀국 후 옥중생활 속에서 구상된 이 작품은 지난 1년 2개월간 일간지에 연재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출간에 앞서 작가의 세심하고 대폭적인 수정 정리를 거쳤다. 80년대 이후 격동했던 한국사회와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사적 변화를 배경으로 젊은 두 남녀의 파란많은 삶과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작가가 『무기의 그늘』(1988) 이후 12년 만에 내놓는 역작으로서 그 미학적 성취와 튼실한 사회성을 통해 한국 소설문학의 새 자산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작품은 기본 서사구조에서 회상과 편지글, 비망록과 기록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두 주인공 오현우와 한윤희의 교차적 서술방식을 통해 박진감 넘치면서도 서정적으로 전개된다. 70년대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지하조직 활동을 한 오현우는 광주항쟁 이후 수배가 되자 기약없는 도피생활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은거를 도와준 시골학교 미술교사 한윤희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한적한 시골 갈뫼의 외딴 마을에서 3개월여 둘만의 따뜻하고 오붓한 시간을 갖지만, 오현우는 다시 동지들을 규합하여 투쟁의 길로 나서는 과정에서 검거되고 만다. 그는 지하조직의 수괴로 몰려 무기형을 선고받고 18년이란 오랜 세월을 장기수로 지내며 옥중의 투쟁을 거듭하는 한편 신산한 여러 인생사와 맞물리며 내면적으로 성숙해간다. 만기출옥 이후 전해진 한윤희의 편지를 통해서 오현우는 그녀가 불치의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된다. 오현우는 한윤희에 대한 추억을 찾아 과거에 둘이 함께 지냈던 갈뫼의 `오래된 정원`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한윤희가 남긴 기록을 통해 험난했던 80년대 이후를 뜨겁게 살아온 그녀의 삶과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오현우와 헤어진 후 미술대학원에 진학한 한윤희는 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한 채 송영태라는 학생운동가가 주도하는 반정부운동을 음양으로 돕다가 독일로 유학을 떠나 그림공부를 계속한다. 한윤희는 그곳에서 또다른 인물 이희수를 만나 그의 환경친화적인 생각에 공감하고 결국 뜻하지 않은 사랑에 빠지지만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다. 다시 실의에 빠진 그녀는 작품활동을 하다가 귀국한다. 한편, 오현우는 한윤희의 기록에서 그녀가 자신의 딸아이를 낳고 키워왔음을 알게 된다. 오현우는 갈뫼에서의 여정을 정리하고 새로운 삶의 시작을 준비하면서 딸과 만나게 될 설렘을 간직하며 서울로 올라온다. `오래된 정원`은 한편으로는 오현우와 한윤희가 달콤한 사랑을 나누며 함께 지냈던 갈뫼의 시골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혁명가들의 이상향인 동시에 남성 위주의 물량적 혁명주의 대신 모성의 따뜻한 인간애가 넘치는 새로운 가치가 잉태 발현하는 모태이기도 하다. 오현우가 이곳에 내려와 자기 반평생의 역정을 돌아보며 새출발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것은 한윤희의 자취를 더듬는 과정에서 이러한 새로운 각성을 얻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8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변혁을 꿈꾸고 투쟁해왔던 이들의 삶과 사랑을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황석영 특유의 세련되고 힘있는 문장이 뿜어내는 재미를 갖추고 있다. 특히 헌신적인 운동가들의 정서 심층에 잠재된 사랑의 음영, 계절과 시각에 따른 자연풍광의 미묘한 변화를 이처럼 절묘하게 포착한 소설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며, 작가의 체험이 녹아 있는 감옥생활이나 한윤희가 독일 유학중에 체험하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대한 묘사는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살아 있다. 진중하고도 묵직한 주제를 깔면서도 세월을 뛰어넘는 두 남녀의 애절하고 순수한 사랑이 잘 그려진 이 작품은 거대한 역사의 물결을 헤엄쳐가는 가냘픈 개인의 눈을 통해 시대의 영광과 상처를 조명함으로써 앞으로 새롭게 전개될 황석영 문학의 방향을 가늠하게 해준다. 이 작품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이 시대를 헤쳐온 작가 황석영이 다양한 기법과 섬세한 문체로 작성한 지난 20년간의 문학적 연대기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북한방문과 해외망명 등을 통해 더욱 넓어진 시야와 옥중생활 동안 예민하게 다듬어진 감각,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사색적 깊이가 녹아들어 있다. 「객지」「삼포 가는 길」「한씨연대기」『장길산』『무기의 그늘』에서 맛본 감동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이 작품을 통해서, 잊어서는 안될 한 시대의 진실을 작가 황석영의 녹슬지 않은 솜씨와 함께 만나는 보람은 한층 각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