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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2부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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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에게 여동생이 있다고 했지. 그 여동생을 전쟁에서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나?”
최대희 소령의 입에서 등장한 여동생이라는 말에 지원의 곧은 일자 눈썹이 움찔했다. 켈로 부대에 속한 탓에 중공군 점령지역에 있던 여동생을 구출해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봐준 것이 최대희 소령이었다. 지원은 침을 꼴깍 삼키고 답했다. “……이 전쟁이 끝나야 합니다.” “잘 알고 있군.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보라는 거,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나? 의심받지 않는 첩보원, 얼마나 효율적인가?” --- pp.18~19 “전쟁이 효율적인 건 좋지만, 소중하지 않은 목숨은 없습니다. 군인들을 효율로 따지지 마세요. 최대희 소령.” “그 말마따나 소중하지 않은 목숨이 없으니, 모두의 죽음은 평등합니다. 누가 죽던 그건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닙니까? 어쨌든 우리는 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목표입니다. 군인들의 희생은 유감스럽지만, 대의를 위한 희생은 전쟁에서 필수 조건이죠. 고우인 소령은 마음 약하게 굴지 마세요. 전쟁 중입니다.” “마음이 약한 게 아니라 인간적인 겁니다. 최대희 소령은 종종 헷갈리시더라고요. 전쟁을 핑계 삼아 인간성을 버리진 마십시오. 그런 건 승리가 아니라 학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pp.21~22 “제가 기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언니가 혼자 숙소 안에 있었잖아요. 그래서 저 언니랑 친해져야지 했죠! 언니는 제가 돌아오면 항상 숙소에 앉아 있을 것 같거든요.” --- p.29 “……네가 위험해.” 사실 현호가 훈련장에 끌고 왔다는 건, 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홍주도 현호의 신중함을 알기에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엔 위험한 임무가 주어질 예정인가 싶던 찰나에 이어진 현호의 뒷말은 예상하지 못했다. “네가 의심받고 있어.” --- p.43 래빗의 삶은 늘 의심받는 삶이었다. 그렇지만 대체 왜 내가 의심받게 된 거지. 한 번도 실수는 없었는데. “……이유가 뭔데?” 홍주는 늘 최선을 다했고, 사지에서 끝내 살아 돌아와 정보를 전달했다. 래빗들 사이의 크로스체크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은 것이 홍주가 아닌가. 단 한 번도, 홍주의 정보는 다른 래빗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의심이라니. 적군 기지에 갔을 때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데, 자신의 진술이 어떤 래빗들을 사라지게 만들기도 했는데. 홍주는 현호에게 당장 그 이유를 들어야 했다. 군에서 자신을 의심하는 이유라도 알아야 했다. 그리고 현호에게 돌아온 말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유였다. “……네가 매번 살아 돌아왔잖아.” 순간 홍주는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 p.45 “내가 원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에요. 그저 이 전쟁이 끝날 수 있게 하는 것이죠. 뭐, 전쟁이 끝나길 바라는 마음은 동무들도 같겠죠?” --- p.71 “너무 좋았어. 너 대단하다.” “어디가 제일 좋았어?” “춘향이가 옥중에서 이 도령을 그리워하는 장면.” “왜?” “그렇게 올곧게 기다리는 마음이 예뻐서.” “그게 뭐가 예뻐. 미련한 거 아니고?” “흔하지 않은 거잖아. 그래서 더 귀하지.” --- p.174 군번도 없고, 명단도 지워졌다. 첩보 작전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그렇게 지워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첩보는 그 이름처럼, 몰래 이뤄져야 했던 일인 만큼 아무 증거도 남지 않아야 했다. 이제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홍주가 캐비닛에 새긴 바를 정 자의 이름을 모두 잊어버린 것처럼. --- p.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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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2회 K-스토리 공모전 대상작
리디 독자 심사 최고점 1950년대 한반도에 실재했던 소녀 첩보원 ‘래빗’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이자 꿈이었던, 지금은 세상에서 잊힌 이들의 이야기! “작은 몸으로 험준한 산을 넘나드는 토끼가 전쟁터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래빗’들과 딱 맞아떨어져 고유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홍주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이 살아 움직인다.” -이미예 심사평 2022 제2회 K-스토리 공모전에서 6.25전쟁을 배경으로, 당시 활동했던 소녀 첩보원들의 삶을 생생하고 감동적이게 그려낸 『래빗』이 대상을 받았다. 2021년에 이어 올해도 심사를 맡은 이미예 작가는 “흰토끼가 시각적으로 첩보원 소녀들과 맞아떨어지면서 이야기의 고유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각인됐고, 모든 등장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생생한 영상화가 기대되는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심사에 참여한 제작사 쇼박스는 “전쟁에 불필요하게 여겨졌던 여성이 가장 중요한 키를 쥐고 있다는 설정이 빛난다.”, “작품의 깊이, 캐릭터의 입체성 모두 발군”이라고 최고점을 주었으며, 제작사 SLL은 “실제 소재인 래빗을 모티프로 한 콘셉트가 눈길을 끌”며, 특히 “여성 캐릭터 간의 유대가 잘 드러난다.”고 심사평을 남겼다. 또, 백여 명의 독자 심사 위원에게도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수작임을 증명했다.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고 적진을 돌아다닐 첩보원이 필요합니다. 누가 전쟁 중에 어린 여자애들을 의심합니까?” _본문 중에서 『래빗』은 6.25전쟁을 배경으로, 당시 작전을 펼쳤던 첩보원 ‘래빗’들의 활동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적에게 의심받지 않는 효율적인 정보원이 필요해 시작된 작전명, 래빗. ‘전쟁 승리’라는 국운을 건 중대한 사명 아래, 힘없는 개개인의 운명은 손쉽게 스러지고 묻힌다. 무기는 피아를 가리지 않으므로, 아군의 지뢰, 미사일, 총칼에 희생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심지어 첩보원인 래빗은 작전 중에 적군에게 회유되어 변절하지는 않았는지 늘 아군의 의심을 견뎌야 한다. 적군의 총칼 앞에서 살아 돌아와도 아군의 의심을 피하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태로운 존재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나오는 래빗들은 철두철미하게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인간성과 다정함을 잃지 않는다. 누군가를 의심하고, 죽이는 게 당연해진 상황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고, 비겁하고 비정한 마음에 전쟁이라는 핑계를 대고 싶지 않다는 그들의 꼿꼿한 마음이 귀해서 더 빛난다. 더욱이 총상을 입은 동료를 포기하지 않고 함께 돌아오는 강인한 생명력도 지니고 있다. 장편 시나리오 작업을 계속해 온 고혜원 작가는 뛰어난 캐릭터 설정과 철저한 사전조사를 거쳐 한편의 웰메이드 영화를 보는 듯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전장에서 교차하는 두 소녀의 운명 폐허가 된 마음에서 피어나는 한 줄기 희망 여기 갓 스물이 된 두 명의 여성 첩보원, 홍주와 유경이 있다. 홍주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폭격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살고 싶지 않았기에 고향을 떠나 첩보 부대에 입대했다. 또 다른 래빗, 유경은 첩보원 활동을 하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거래에 응했다. 또,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두 가지 모두 유경에겐 꿈같은 일이었다. 3년 후, 홍주와 유경은 적군 점령지에서 마주친다. 우연히 두 사람 다 래빗이라는 걸 알게 되어 함께 지내면서, 전쟁이 시작되고는 처음으로 사귄 벗이 된다. 홍주는 유경 덕분에 전쟁이 끝난 뒤의 미래를 꿈꾸고, 유경은 홍주 앞에서 〈옥중화〉 연극을 선보이며 배우라는 제 꿈을 펼쳐 보인다. 그렇게 유경의 꿈과 미래는 잃어버린 과거를 붙잡고 있던 홍주에게로 전해진다. “이 전쟁이 곧 끝나면 너는 뭘 하고 싶어? 나는 무대에 설 거라고 이미 말했잖아.” “……모르겠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럼 이제부터 상상하고 생각해. 전쟁이 끝나면 너는 무엇을 할지.” _본문 중에서 첩보 부대 켈로(KLO)에서 적진으로 향한 래빗들은 열에 아홉이 죽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죽음은 특별하지 않다. 가장 오래 살아남은 홍주는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의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해 캐비닛에 바를 정 자를 새겨 그 숫자를 기억한다. 다시 만날 수 없는 동료들의 빈자리를 보며 홍주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죽고 싶어서 왔는데, 아군으로부터 변절을 의심받으면서도 왜 나는 필사적으로 살아남고 있나.’ 자기모순에 갇힌 홍주에게, 전쟁이 끝나면 무엇을 할지 상상해 보라는 유경의 말은 이렇게 들리지 않았을까.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으려는 데는 이유가 없으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걸 찾아.’ 언제나 앞을 보고 걷는 유경은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제자리걸음 중이던 홍주의 손을 이끈다. 래빗들이 켈로 부대에 들어온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막 해방된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또 누군가는 소중한 것을 앗아간 적군에 대한 복수심으로 자원하여 입대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사라져 가고, 래빗들은 저마다 생존의 이유를 찾는다. 내일을 기대하기 어려운, 모든 게 망가지고 소실된 전쟁터. 하지만 보도블록 깔린 길에서도 틈새를 비집고 새싹이 피어나듯, 래빗들은 미제 초콜릿을 나누고, 공기놀이를 하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폭격으로 공포에 질린 동료를 감싸 안아준다. 이렇듯 작가는 가볍지도, 너무 비장하지도 않게 래빗들의 삶을 올곧고 따뜻한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한국전쟁 뒤에 사라진 이야기들을 재조명하고 싶다는 마음에 이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중략) 전쟁 중이기에 모든 것들이 쉽게 사라지던 시대를 되돌아보며, 그 시대여서 잃어버린 것들을 고민했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시대를 한 가지 단어로 정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제 마음은 미래를 택했습니다. (중략) 우리는 늘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홍주가 끝내 상상하고 찾아내었던 미래처럼.” _작가의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