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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성문 앞 샘물 곁 냇물 위에서 풍향기 폭풍의 아침 우편마차 환상의 태양 거리의 음악사 |
崔仁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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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혜는 그러나 소리 난 쪽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줄곧 그녀가 넘어진 맨땅과 잔디밭의 가장자리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우뚝 서서 그녀에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향해서 차마 고개를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미안합니다. 가만히 계세요. 제가 주워드리겠습니다.” --- p.28~29 두 사람은 등나무 밑 그늘 아래 나란히 앉았다. 솟아오르는 분수가 하늘로 솟구쳤다 떨어지는 물소리가 등 뒤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잔바람에 실려온 안개와 같은 물방울들이 동편 하늘에 아주 희미한 무지개 빛깔의 색동 띠를 떠올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다혜가 웃으면서 민우를 보았다. 그의 곁에 앉자 지금까지 느끼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은 거짓말처럼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 p.103 어릴 때부터 막연히 상상하고 홀로 꿈꿔온 공주와 왕비와 귀족으로서의 어머니 영상은 실체의 그녀를 만난 순간 무참하게 깨졌다. 그 더러운 얼굴 어디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상상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민우는 술기운이 관자놀이의 혈관을 망치질하듯 두드리는 것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치받치고 있었다. 어머니의 환상은 이제 끝났다. --- p.204 그의 몸에 숨어 있는 알 수 없는 폭력에 대한 갈망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광기를 불러일으켰다. 민우는 소리치고 울부짖었다. 흐린 흙탕물이 가라앉듯 흥분과 광기로 흐려졌던 혼미한 의식이 차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미친 말갈기처럼 휘날리던 이성의 눈이 서서히 밝아졌다. 민우는 부러진 단장을 든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민우는 한 사람이 병실 바닥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 p.212 그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면회실 앞 대기실에서 기다리며 얼마나 곰곰이 생각하고 궁리했던가. 아아, 얼마나 하고픈 말이 많았던가, 생각은 많아, 아주 좁은 구멍을 빠져나가려는 저수지의 물처럼 소용돌이치며 아우성쳤다. 그러나 막상 그를 만나고 보니 그 많고 많았던 생각들은 눈 녹듯 사라지고 모든 말들을 잊어버렸다. 그저 그의 얼굴을 보았으므로, 그가 그곳에 있으므로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 p.279 민우는 일어나 그녀 앞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순간 멈칫거리면서 물러나 앉았다. 도저히 다혜 앞으로 나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민우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잔디밭에서 그녀가 수업을 마치고 나올때까지 기다리는 자신의 꼬락서니가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민우는 행여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까 잔디밭 위에 구르는 학교 신문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마치 시간이 남아 배포된 학교 신문을 읽는 학생처럼. --- p.320 민우는 잠 안 오는 밤이면 술을 마셨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으면 홀로 마리화나를 피웠다. 술이 늘어 많이 마셔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 계속되기도 했다. (중략)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서 들판에는 푸른 녹색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얼어붙은 대지는 신생의 기쁨으로 충만했지만 민우와는 상반되는 현상이었다. 대지는 봄으로 부활했지만 민우는 점점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어 파멸해갔다. --- p.409~410 |
2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잃어버린 순수와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
최인호 소설가 10주기 기념 뮤지컬 〈겨울나그네〉 원작소설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자 한국 현대문학의 거장, 최인호 소설가의 『겨울나그네』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1984년 동아일보에 일 년여를 연재하였던 것으로, 같은 해 첫 출간 이후 100쇄 이상 중쇄될 정도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젊은 날 누구나 한 번쯤 꿈꾸어봤을 아름답고 비극적인 사랑과 젊은 날의 방황, 고통의 시간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문화장르와 결합해온 이 소설은 1986년 영화화한 것이 대성공을 거두며 지금까지 청춘영화의 고전으로 불리고 있고, 1989년에는 드라마로 방영되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1997년에는 뮤지컬로 공연되기도 했다. 2023년, 작가의 10주기를 맞아 다시 한번 뮤지컬을 공연하고 개정판을 출간한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그 비극적 정조를 소설 속으로…… 최인호 소설가가 들려주는 러브로망의 고전 성문 앞 샘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보았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겨놓고서 (중략) 그대여, 이곳에 와서 안식을 찾아라 성문 앞 샘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보았네 작가는 40년 전 소설을 처음 신문에 연재하며 그 제목을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에서 빌려왔다. 〈보리수〉〈거리의 악사〉와 같이 소설에 등장하는 소제목들 역시 〈겨울나그네〉 속 연가곡에서 가져왔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는 잘 알려진 것처럼, 현실과 사랑의 환상 사이에서 방황하다 마침내 미쳐버린 청춘의 절망과 고뇌를 섬세하게 표현한 연가곡집이다. 〈겨울나그네〉의 절절한 사랑 노래처럼 “가슴 아픈 청춘의 방황과 참혹한 젊은 날의 슬픔을 그리고 싶은” 작가적 욕망을 제목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에서 영감을 얻어 아름답고 순수한 청년의 사랑을 그리고 싶다는 작품의 모티프”로 “‘민우’라는 주인공을 탄생”시켰다. 전도유망한 의대생 ‘민우’와 병약하지만 불꽃같은 열정을 품은 ‘다혜’를 통해 변치 않는 사랑의 원형과 순수한 청춘의 초상을 일깨워준다. 통속적이고 가벼운 세태 속에서 지고지순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독자들로 하여금 풋풋하기에 더욱 아름다웠던, 한없이 빛나고 가슴 설레었던 지난날을 추억하게 한다. “기쁜 우리들의 젊은 날은 저녁놀 속에 사라지는 굴뚝 위의 흰 연기와도 같았나니……” 이루어지지 못해 더욱 아름다운, 모두에게 찬란했던 젊은 날의 초상 민우와 다혜가 처음 만난 것은 설렘으로 가득한 개강 첫날, 봄날의 오후였다.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다혜를 사랑하게 된 민우는 친구 현태의 도움으로 다혜와의 만남을 이어간다. 그러나 술집 여인의 아들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민우는 뜻하지 않게 전과자가 되어 대학을 떠나게 되고, 기지촌으로 흘러들어가며 이후 그의 삶은 점점 타락과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다혜가 속한 세상과 멀어져만 간다.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옛날을 말하던 기쁜 우리들의 젊은 날은 어디로 갔는가. 이제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기쁜 우리들의 젊은 날은 저녁놀 속에 사라지는 굴뚝 위의 흰 연기와도 같았나니. 기지촌에서의 생활과 전과로 인해 다혜의 곁을 떠나려는 민우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를 기다리는 다혜. 현태의 도움으로 둘은 재회하지만 민우는 기지촌과 그곳에서 만난 은영에게서 헤어나지 못하고, 다혜는 점점 현태에게 의지하기 시작한다. 민우가 또 한 번 오랜 감옥 생활을 마치고 출감했을 때 은영은 그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현태와 다혜는 서로 의지하며 차츰 민우를 잊어가고, 몇 년 후 불현듯 찾아온 은영에게서 민우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지고지순한 민우와 다혜의 사랑은 찬란한 빛 속에서 흘리는 한 줄기 눈물처럼, 우리에게 소중한 카타르시스로 다가온다. “‘옛날을 말하던 기쁜 우리들의 젊은 날은 저녁노을 속에 스러지는 굴뚝 위의 흰 연기와 같았나니’ 내가 단꿈을 꾸었던 내 마음의 성문 앞 샘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가지에는 아직도 젊은 시절 내가 새겼던 희망의 말이 새겨져 있음을 알았다. 나는 이제 눈을 감고 손을 내밀어 나뭇가지에 새겨진 희망의 말을 더듬어본다.” _「머리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