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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파위나 모드 나우 잠자리가 지나간 길 동선의 추억 바람이 다시 불 때 해설/ 음표로 그린 풍경의 사회화 〈문학평론가 김선주〉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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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슬픈 건 우리가 슬플 때 그 슬픔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숙화가 쿠리하라와 정말 친구 사이였고, 쿠리하라가 그녀에게 이 곡을 준 후 세상을 떠난 게 사실이었다 할지라도, 그녀가 노래를 녹음하던 당시 이미 쿠리하라는 세상을 떠난 지 몇 달이 지났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진숙화는 친구의 죽음을 생각하며 더없이 서글픈 심정으로 노래를 불렀겠지만, 노래를 부르다 설사가 나서 자주 화장실에서 끙끙거리며 냄새가 나는 물똥을 쌌을지도 모른다. 혹은 당시 불화가 있던 어떤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쌍욕을 하며 싸웠을 수도 있고, 노래를 부르느라 종일 끼니를 불렀다면 녹음 작업을 마친 후 매니저가 사온 완탕면을 후루룩 짭짭 하며 맛있게 먹었을 수도 있다. 심지어 같이 작업을 한 사람들과 경박하게 웃으며 잠시 장난을 치거나 허전해서 만두를 몇 개 더 집어먹었을 지도. 그리고 한숨을 한 번 쉰 후, 다시 슬퍼했을 것이다.
---「결」중에서 저녁에, 내가 나릴란 하고 부르면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 코를 쥐어 잡고 흔들었다. 탁한 비음 속에서 그녀의 이름은 장난스럽게 들리곤 했다. 그녀를 나릴란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녀의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나밖에 없었다. 나는 솜이라고 불렀고, 자주 나릴란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내게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밤에, 그녀는 자장가를 불러달라고 말했다. 나는 클레멘타인과 해바라기의 노래를 불러주었다. 저음으로, 모든 노래를 단조로운 리듬과 거의 구별이 가지 않는 음정으로. 그녀는 클레멘타인이란 노래를 몰랐다. 그래서 나는 후렴구의 클레멘타인을 꼭 나릴란이라고 바꿔서 불렀다. 그러면 음정이 본래의 곡에서 더 멀어지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음치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어느 노래도 정확하게 부르지 못했으므로, 내가 그녀에게 불러주는 음들은 사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노래였다. 까닦에 나는 그녀가 모르는 노래들만을 부를 수 있었다. 긴장한 목소리로 어제 부른 음과 오늘 부른 음이 정확히 일치하도록 노력하는 동안 그녀는 편하게 고개를 기대고 듣는다. 다 틀린 음정의 노래를, 그녀를 그런 노래라고 생각하며 듣는다. ---「나우」중에서 내가 음치란 사실을 알고도, 그녀는 내가 부르는 장국영 노래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들어준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장국영 노래를 불러 주리라 생각해 왔으므로, 밤이면 나는 그녀의 방으로 건너가 이불 속에서 손목을 꼭 쥔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바람이 다시 불 때를 불러주곤 했었다. 사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노래를, 분명 장국영의 몸에서 흘러 나와 내 몸으로 흘러들어 왔지만 입술에서 머뭇거리다 몸 안을 떠돌기만 하는 소리를, 지난 20여 년간 장국영이 내게 들려주었으나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음정과 박자로, 나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을 불러주었다. 사람은 언제나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에 다름 아니므로, 나를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해선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내가 살아온 삶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해야 했고, 너무 많은 순간들을 구구절절이 설명해야 했으므로 나는 그녀에게 장국영 노래를 불러주거나, 그녀와 함께 비디오 방에서 장국영 콘서트를 보곤 했다. 분위기란 말은 지구를 감싸고 있는 공기란 뜻이다. 내 몸에서 가닥가닥 흘러나오는 음(音)들에, 장국영의 콘서트를 볼 때 나와 장국영 사이에 구름처럼 떠 있던 공기들에,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들이 농밀히 스며들어 있을 것이기에. 그토록 자주 그의 노래가 내 삶의 불어왔으므로. ---「바람이 다시 불 때」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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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 작곡한 피아노소품
낯설면서도 기분좋은 전율로 가득한 소설 이상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권지예 소설가는 추천사에서 ‘언어로 작곡한 피아노 소품을 듣는 듯 하다’고 평했고 저자의 신인상 심사를 맡은 소설가 엄창석은 배매아의 소설은 낯설면서도 기분 좋은 전율로 가득하다. 그 전율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현재와 기억, 실재와 환상의 관계를 섬세하게 빚어서 발생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양한 인간 관계들이 부딪는 접점과 반향을 놀라우리만큼 탄성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평했다. 작품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선주〉는 이 소설집을 ‘언어’ 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의 존재를 통찰하는 소설들이라고 말하며 저자는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를 떠도는 현대인들을 모두 장기체류중인 존재로 묘사하고 그 내면과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나간다고 평한다. 책에 실린 6편의 소설은 각기 다른 색깔로 모나드를 이루어 마치 한 ‘몸체’ 같은 서사를 보이고 그 몸체의 전 지평을 동분서주하는 화자 ‘나’는 사랑이란 비포장도로를 질주해온 닳은 바퀴이며, 이국의 노래를 통해 화자는 자아의 지평에 그어진 숱한 접경의 흔적을 파악해 나간다. 음표로 그린 풍경의 사회화 같은 소설 ‘사랑할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방인이다. 언어에 삶이 빠짐없이 담기지 못한다는 이치와 같이 그 언어란 사랑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삶은 사랑으로 가득하며, 사랑엔 삶의 갖가지 풍경이 도사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본질적으로 모두 이방인이다. 배매아는 이러한 본래적 인간성을 외국이란 시공간성을 통해 제시한다. 화자는 항상 ‘외국어 발신자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곳에서 손짓 발짓 다 섞은 원초적 언어를 발휘한다. 이른바 “언어의 원시시대”(〈나우〉)를 형성한다. 또한 그곳에서 사랑을 나누는 풍경, 혹은 관계의 형상이 “연인들의 원시시대”(〈파위나 모드〉)를 불러온다. - 문학평론가 〈김선주〉 작가의 말 오래전 사랑했던 한 친구는 나를 떠나면서 ‘사람은 만나서 딱 인사를 하고 안부를 나누는 정도가 적당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만큼 슬프고 간절한 일은 없을 테니깐. 살아가는 일은, 때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가는 일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세상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서로가 제각각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또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항상 그것이 기적처럼 생각되곤 했었다. 어쩌면 인연이란, 우리가 같은 인간이란 몸을 입고 그러나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다는 이 놀라운 불일치를 넘어 가까워지고 싶었던 인간들의 가련한 몽상 같은 것이 아닐까? 저마다 가없이 사라지고 말 만남들에 아름다운 악보를 그리고자 했던, 가련하나 도무지 멈출 수 없었던 꿈을 향한 이토록 소박한 의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친구가 내 곁을 떠나기 전 말했던 몇몇 단어들을 기억하고 있다.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말들이었다. ‘밤, 담배 연기, 목이 긴 맥주, 편도선, 손톱, 형에게 남겨 주고 싶었어요, 창으로 흘러드는 하수구 냄새, 컴컴한 이비인후과, 밤하늘, 빨간 우체통, 그리고 편지와 수많은 눈송이들.’ 슬픔은, 슬픔이란 명사가 아닌 까닭에 우리는 모든 언어를 통해 슬프다고 말할 수 있다. * 음(音)은 물질에서 나오나, 그 어떤 경우에도 물질로 남지 않는다. 음은 부피와 질량이 없고 다만 공간에 어떤 면적을 차지한 채 그냥 그 자리에 계속 존재해 있다. 가령 당신의 방이 3층에 있고 당신이 방의 공기를 한 꺼풀 뜯어 귀에 대본다면, 당신은 천년 전부터 거기에 있어 왔던 어떤 음 한 조각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모든 공간은 폐사지와도 같다. 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곳에 있던 물질은 사라졌지만 그 물질이 차지하고 있던 면적은 그대로 남아있다. 어쩌면 우리는 무너진 고대의 탑이 면적을 차지하고 있던 공간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내겐 오래된 믿음이 있다. 유치하고 어처구니없는 믿음이다. 난 늘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서 글을 쓰곤 했는데, 소설이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되리란 믿음 때문이었다. 이제 그 믿음이 희박해져 가고 있다. 희박해지는 만큼 그건 더 아름다운 꿈처럼 생각된다. 이 단편집을 누구에게 선물할까 오래 고민했다. 과연 이 하찮은 선물을 누구에게 줘야 미소를 지으며 받아줄까? 오래전 유치한 글들을 써서 얇은 문집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비용을 대주셨는데, 어머니는 문집이 나오고 한해가 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다. 하관식을 하던 날 난 그 싸구려 문집을 어머니의 곁에 묻어주었다. 그러면서 자못 비극적으로 울었는데, 난 눈치가 없는 사람으로 항상 분위기 파악을 못 해 따돌림을 당해 오곤 했으므로, 어머니를 잃은 자식으로서 더 엉엉 울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그러나 내 비극적 몸짓은 내 슬픔을 대신하지 못했다. 나의 슬픔은 나의 비극적인 몸짓에 입이 가린 채 울지도 못했다. 그 시절 슬퍼하기 위해 애쓰느라 돌보지 못했던 나의 슬픔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 첫 번째 작품집을 어머니에게 바친다. 그녀가 존재했던 부평 어딘가에 있을, 여전히 텅 비어있는 그녀의 면적(面積)에 바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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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매아 소설의 내용은 건조하지만 문장은 아름답고 시적이다. 그는 언어의 음악성과 이미지에 민감하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마치 언어로 작곡한 피아노 소품을 듣는 듯하다. 진숙화의 〈결〉이라는 노래를 소재로 한 〈결〉이라는 단편은 그가 얼마나 언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풍성하게 다루는지 잘 보여준다. 닫힌 텍스트에서 열린 텍스트로, text에서 texture로 전환되는 소설의 질감을 독자들에게 선사할 것이다. 배매아 소설의 결이 좀 색다른 이유다. - 권지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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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매아의 소설은 낯설면서도 기분 좋은 전율로 가득하다. 그 전율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현재와 기억, 실재와 환상의 관계를 섬세하게 빚어서 발생되는 것으로 보인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다양한 관계들이 부딪는 접점과 서로 조응할 때 일어나는 반향을 놀라우리만큼 탄성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런 것들을 탄주되는 노래처럼 문장에 싣는다. 마치 태고의 사랑이 우리에게 여전히 현존하듯이 어떤 먼 곳으로부터 발화된 음향이 그의 문장으로 번안되는 듯한 깊은 매혹을 품고 있다. 요즘 소설에서 보기 드문, 이채로운 작풍을 보여주는 배매아의 첫 소설 집에 큰 갈채를 아낌없이 보낸다. - 엄창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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