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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신 배경과 어릴 적 학업
2. 초기 관직 생활과 효종에게 올린 첫 상소문 3. 조정에 나아가 효종의 자문에 응함 4. 관직 임명과 거듭된 사퇴 5. 남강(南康)에서 선정을 베풂 6. 백성들을 위해 상소를 올림 7. 궁중에서 효종의 자문에 응함 8. 목민관으로서 애민(愛民) 정치를 실시함 9. 무신년(1188) 연화전(延和殿)에서 효종에게 올린 주차(奏箚) 10. 무신년(1188)에 효종에게 올린 봉사(封事) 11. 이단의 학문을 경계하고 백성의 교육에 힘씀 12. 입대(入對)한 후에 영종의 깊은 신임을 얻음 13. 영종에게 강의를 함 14. 조정에서 예법을 논쟁함 15. 관직에서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작고함 16. 학문적 탄압과 복권 17. 나라 사랑과 정치적 처신 18. 스승 : 학문 연원 19.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지경(持敬)의 공부 20. 도학(道學)의 실천 21. 평상시의 행동과 인품 22. 경전 연구 23. 성리 사상 연구와 도학 선양 24. 강학 방법과 학문적 우월함 25. 마지막 유언 26. 남긴 저술 27. 유족 28. 도통(道統)의 계승 29. 부록 : 《행장》 저술과 관련한 몇 가지 변명 부록 본문에 등장하는 관직명 참고 문헌 주희의 저작 목록 주희의 주요 연표 주희 화상(?像) 주희의 유묵(遺墨)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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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건염 4년(1130) 9월 15일 정오 무렵에 남검주 우계의 부모가 거처하던 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행동이 장중했다. 겨우 말을 할 무렵에 아버지 위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것이 하늘이다”라고 하자, “하늘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위재는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스승에게 나아가 《효경》을 배웠는데, 한 번 본 후에 책을 덮어 놓고는 그 위에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썼다. 언젠가 여러 아이들과 함께 모래 위에서 놀게 되었다. 선생은 혼자 단정하게 앉아 손가락으로 모래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살펴보니 팔괘였다. 조금 더 커서는 성현의 학문에 뜻을 돈독하게 두었으며 과거 공부에는 처음부터 마음을 두지 않았다. ---「1. 출신 배경과 어릴 적 학업」중에서 순희 5년(1178, 48세)에는 발견남강군사(發遣南康軍事)에 임명되었으나 네 번을 사퇴한 끝에 비로소 임지로 갔다. 선생은 동안(同安)에서 돌아와 봉사직으로 집에서 거처한 지가 거의 20년이 되었는데, 비록 형편이 어렵고 빈곤했지만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수양을 많이 쌓아 이치가 밝아지고 의리가 정밀해져서 일을 처리하는 데에 드러나는 것이 더욱 거침이 없었다. 군(郡)에 부임해서는 측은한 마음으로 백성 사랑하기를 마치 자신을 근심하는 것같이 했으며, 이로운 일을 진작하고 해로운 일을 제거했는데, 오직 힘이 닿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속읍(屬邑)인 성자(星子)는 토지가 척박하고 세금이 과중해 백성의 세금을 감면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모두 대여섯 번이나 올렸다. 그해에 비가 오지 않아 구황책을 강구했고, 무릇 조정에 청원할 때는 하지 않은 말이 없었다. 관물(官物)의 피해를 살펴 조세를 면해 주거나 탕감하거나 분납하거나 연장해 주었고, 추묘하세(秋苗夏稅)·목탄월장(木炭月?)·경총제전(經總制錢) 등은 각각 그 고을의 항목에 따라서 조목조목 상소를 올렸다. 간혹 서너 번까지 올리기도 했으며,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다. ---「5. 남강(南康)에서 선정을 베풂」중에서 선생의 학문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해[窮理] 앎을 지극히 하며[致知], 자신을 돌이켜 반성함으로써[反躬] 실천하는 것이다. 거경(居敬)이란 성학(聖學)의 처음과 끝을 이루는 원리다. 그래서 선생은 앎을 지극히 하되 경(敬)하지 못하면 마음이 혼미해지고 분란이 일어나 의리의 귀결처를 살피지 못할 것이며, 실천궁행하면서도 경(敬)하지 못하면 마음이 태만하고 방자해져서 의리의 실상을 지극하게 할 수 없다고 했다. 경을 지키는 방법[持敬]으로는 주일(主一), 즉 하나를 위주로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선생은 잠언(箴言)을 지어 스스로 경계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써 두기까지 했으며, 《소학》과 《대학》이 모두 여기에 근본을 둔다고 여겼다. ---「19.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지경(持敬)의 공부」중에서 선생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또한 어찌 일반 사람들과 비교해 일반적인 체계에 따라서 논의할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사람 중에는, 임금께 아뢰는 선생의 상소가 지나치게 곧고 또한 다른 사람의 과실을 기술함이 너무 노골적이라고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신하가 임금에게 어려운 일 곧 인정(仁政)을 하도록 권면하고, 임금에게 선언(善言) 곧 인의(仁義)의 도리를 진술하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대의(大義)다. 임금이 앞에서 용인한 것을 신하가 도리어 뒤에서 숨기려 한다거나, 선생이 당시에 과감하게 말한 것을 후세 학자들이 도리어 감추려 하면 되겠는가? 사람들의 과실을 판결서에 기록하거나 상주문(上奏文)에 진술한 것은 천하 후세 사람들이 모두 다 알 수 있는 일인데, 이것을 덮어 버리려 한다면 옳다고 하겠는가? 또 어떤 사람은 상주한 소장의 글을 기술한 것이 지나치게 번잡하고, 청원한 사실에 대한 기사를 그토록 세밀하게 언급한 것은 행장의 체제에 맞지 않는다고 비평했다. 옛사람 중에 임금이 도를 행하게 되어 사실을 기록할 만한 것이 있다면 상소문의 내용은 기술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지만 선생은 관직에 나아갔으나 세상에 쓰이지 못했고, 알 만한 것이라고는 다만 그 언론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곧 선생의 정치 규범의 바탕이었으니, 그 언론과 행실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29. 부록 : 《행장》 저술과 관련한 몇 가지 변명」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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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 삶의 간명한 기록
《주자 행장》이란 주희(朱熹, 1130∼1200)의 생애와 행실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글이다. ‘행장(行狀)’이란 한문 문체의 하나로서, 역사 편찬이나 개인의 전기(傳記)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기록한 글을 말한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고인의 세계(世系), 성명, 관향(貫鄕), 자호(字號), 관작(官爵), 생졸 연월일, 자손록(子孫錄)과 같은 생애적 사실 및 평생의 언행이 포함된다. 행장은 전기(傳記)보다는 단순하며, 여기에 잡다한 내용의 글이 포함되지 않는다. 이것은 비슷한 성격의 글인 행록(行錄), 가장(家狀), 묘지명(墓誌銘), 묘갈명(墓碣銘) 중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형식의 문체다. 주자학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자료 《주자 행장》은 주자학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료다. 이것은 주희 사후 20년 되던 해에 막내아들인 주재(朱在)의 요청에 따라 주희의 제자이자 사위인 황간(黃?)이 찬술한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주희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가장 권위 있고 깊이 있는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황간은 《주자 행장》 ‘부록’에서 행장 저술과 관련해 “내가 선생의 행장을 지은 것은 어쩔 수 없어서인데, 선생의 도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후세에 이것을 전하는 이들이 잘못 전할까 두려워해서다”라고 했다. 한마디로 말해 행장 찬술의 목적이 주희의 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주자학 최고의 권위자, 퇴계 이황의 주석 《주자 행장》과 관련해 특별한 인연을 지닌 조선의 학자가 있다. 바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다. 이황에게 주희는 이론적 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성인의 경지로 이끌고 갈 수 있는 위대한 스승이었으며, 전인격적으로 닮고 싶은 인물이었다. 이황은 주자학 연구에서 당대 최고의 권위자였다. 그는 황간이 찬술한 주자의 행장만으로는 그의 행적을 온전하게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송사(宋史)》에 기록된 주희 전기, 주희의 제자인 이방자(李方子)가 쓴 《연보(年譜)》, 이유무(李幼武)의 《황조도학명신외록(皇朝道學名臣外錄)》 등과 《연평답문(延平答問)》,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 등 당시 수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자료를 참고하고 고증해 주희의 생애를 재구성했는데,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주자행장집주》다. 주희 전기 자료의 전문가인 천룽제(陳榮捷, Wing-tsit Chan, 1901∼1994)는 이 책이 이황의 시대와 그 이후에도 가장 권위 있는 주희 관련 전기 자료라고 평가했으며, 일본 기문학파(崎門學派)의 강의록인 《주자행장강의(朱子行狀講義)》에서는 “이퇴계는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는 주자의 학맥을 완전히 터득한 사람이다. … 그는 조선 제일의 학자다. 퇴계가 주자학을 터득한 증거는 이 주해 작업에서 알 수 있다. … 퇴계의 주해는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바로서, 퇴계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작업이다”라고 평했다. 성리학자들의 교본 《주자 행장》은 한국, 중국, 일본에서 초학자들의 교재로 활용되기도 했는데, 주희의 인품과 기본 행적을 이해하는 훌륭한 자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중국에서는 《주자 행장》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나 주석 작업이 주목되는 바가 없는 반면, 한국과 일본에서는 《주자 행장》과 이황이 편집한 《주자행장집주》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개인적 독서나 집단적 강의 모임에서 자주 《주자 행장》을 강독했다. 특히 일본에서는 《주자행장집주》를 강조했는데, 아사미 게이사이(淺見絅齋)는 이 책을 최소 네 번은 강의했고, 그의 제자인 와카바야시 교사이(若林强齋)는 학당의 교과목에 포함시키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에서 《주자 행장》의 번역은 1975년에 ‘강호석’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다[강호석 옮김, 《주자행장》, 을유문화사(을유문고 189)]. 이 책은 오역도 상당수 발견되고, 원문의 경우 고판본 자료를 영인해서 그대로 첨부했기 때문에 교감(校勘) 작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옮긴이 장윤수 교수는 이러한 점을 보완했으며, 특히 이황의 《주자행장집주》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반영했고, 주희의 전기와 연보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물을 참고해 주해를 추가했다. 그리고 《주자 행장》에 수록된 각종 봉사(封事)류의 글은 원문을 발췌한 것이어서 문장의 의미가 명료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경우에는 전체 원문을 참고해 보완 글귀를 첨가함으로써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의 자의에 따라 원문 전체를 내용별로 분류하고 소제목을 붙였다. 본문 뒤에는 현대 독자들에게 낯설 수 있는 송나라의 각종 관직명과 주희의 저작 목록, 연표, 주희 화상과 유묵 등도 부록으로 추가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