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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6
一 제삼의 자객 8 二 뒤바뀐 사인 27 三 시간이 지난 후에 아는 것 61 四 압록강, 정묘년의 이른 봄 97 五 쫓는 자와 숨어있는 자 123 六 인질 교환 170 七 심양, 병자년 부근 211 八 달빛과 칼날 242 九 허수아비 춤 285 十 흘러가는 상처 320 十一 나쁜 왕은 죽여야 한다 367 작가의 말 396 작품 해설 400 참고문헌 408 |
그 목소리가 이신의 가슴에 박혔다. 포로가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는 오로지 살기를 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대명천조라는 말을 듣는 순간 분노가 온몸을 휩싸고 돌았다. 지금도 여인들은 청나라병사에게 돌아가며 겁탈을 당하고, 아이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대명천조가 웬 말인가. 왜 우리를 구하러 왔다고 말하지 못한단 말인가. 도대체 대의가 무엇인가. 그것이 사람의 목숨, 백성의 죽음보다 더 중하다는 말인가. 그 대의란 대체 누가 정하는가.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선택지를 가지지 못했다. 이제 와서 주어진 선택은 칼을 버리고 죽느냐, 칼을 쥐고 죽느냐 뿐이다.---p.113
“내가 누구의 아들인가는 중요하지 않소. 내가 누구를 섬기는가도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것은 당신들이 스스로의 능력을 전혀 모른다는 거요. 광해를 몰아낼 때도, 청와 맞설 때도 당신들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몰랐소. 금상도 당신과 같은 사대부들이 옹립하고 모셨지만 어떻게 됐소? 그들은 틀렸는데 당신들은 옳다는 말이오?”---p.191 회절강을 만들어, 그렇잖아도 끔찍한 삶을 경험한 여인들에게 또다른 멍에를 지우는 촌극을 벌인다는 말인가? 또 한번 버린 정절이 물로 씻는다고 회복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회절강이 있다면 그 강물에 가장 먼저 몸과 마음을 씻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교지를 내린 오랑캐의 주구, 즉 임금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시련이 환향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pp.271~272 |
무책임한 지배세력의 자세도 통탄스럽지만 400여 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는 현실이 또한 통탄스럽다. _이이화(역사학자)
병자호란 직후의 조선. 전쟁통에 청나라로 끌려갔던 이신이 칙사의 신분이 되어 돌아온다. 실리 외교를 표방한 광해의 세력을 갈아엎은 반정 세력의 척화론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이었다. 순전히 외교 실패로 인한 전쟁이었지만 정작 고통받은 것은 백성들이었다. 50만 명의 평범했던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청으로 끌려갔고 그중 상당수였던 여자들은 입에 담을 수 없는 치욕과 학대를 당했다. 그리고 ‘환향녀’가 되어 돌아온 이들 여성들에게 남편과 아버지들은 이렇게 물었다. 왜 아직 살아 있느냐고. 몸을 씻고 정절을 회복하라고 마련해준 회절강에 여인들은 침을 뱉었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온 여성 대부분이 결국 자결했으며 자결하지 않은 여성들은 자결로 위장해 살해당했다. 하지만 책임지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며 대신들은 여전히 명나라를 숭배하며 척화론을 노래했고 왕은 미쳐갔다. 이러한 상황 속 뒤에서는 오랑캐라고 침을 뱉으면서도 앞에서는 절할 수밖에 없는 청나라의 칙사가 되어 돌아온 이신은 모든 것을 뺏긴 남자의 복수를 준비한다. 어리석은 왕은 죽여야 한다는 것. |
李臣, 아버지는 내게 이씨 왕조의 신하로 살라 하고,
貳臣, 세상은 내게 다른 왕을 섬기라 한다. 병자호란 후의 조선, 참담한 풍경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동아시아의 패권구도가 바뀌던 명청교체기, 실리적인 외교로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처하던 광해군이 친명파에 의해 실각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른다(인조반정). 광해군과 달리 인조는 여진과는 타협하지 않았고, 이 허울뿐인 사대 명분론이 유발한 전쟁이 바로 조청전쟁(정묘호란, 병자호란)이다. 조청전쟁은 조일전쟁(임진왜란)에 비해 기간은 짧았으나 치욕은 더 컸다. 백성들은 죽거나 도망가거나 포로로 잡혔고, 청으로 끌려갔다가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여성들은 화냥년(還鄕女가 변한 말)이라고 손가락질당하다가 대부분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나 자진을 가장해 살해당했다. 명백히 외교 실패로 인한 전쟁이었으나 그 고통을 백성들이 고스란히 뒤집어쓴 셈이다. 그럼에도 지배계층 누구도 책임지는 이 없었으며, 일부는 오히려 전쟁 전보다 높은 품계를 받기도 했다. 이 책의 해설을 맡은 역사학자 이이화의 표현처럼, ‘400여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는 현실’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것이 바로 주인공 이신을 맞는 조선의 현주소였다. 몇 해 전 정묘호란의 전쟁통에서 그는 가족과 함께 포로로 잡혀 청으로 끌려갔다. 힘들어도 함께여서 견딜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돌아온 것은 이신뿐이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슬프다 못해 기이했다. 백성들의 원성이 곳곳에 메아리치지만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왕과 사대부들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양 행동하고 있었다. 도무지 변할 줄 모르는 조정과 무능한 정권 앞에서 이신은 다시 한 번 절망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그의 신분은 ‘새로운 권력’ 즉 청나라의 칙사이기 때문이다.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아내와 딸을 은밀히 찾는 한편, 이 모든 환란의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을 향한 복수를 계획한다. 이신(李臣)에서 이신(貳臣)으로 그의 삶이 바뀐 것이다. 삶이 곧 치욕인 시대와 아무도 말하지 못하는 진실… 그리고 ‘착한 백성’ 이신의 서늘한 복수가 시작된다! 묵직한 역사소설이자 웰메이드 스릴러의 미덕까지 갖춘 《이신》은 내게 오랫동안 가슴 떨리는 사랑 이야기로 기억될 것이다. _마광수(작가, 국어국문학과 교수) 역사학자 이이화는 해설을 통해 ‘이 이야기는 모든 걸 잃은 한 남자의 복수극이자, 착하게 살았고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죽어간 백성들의 한풀이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하며 ‘무책임한 지배세력의 자세도 통탄스럽지만 400여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는 현실이 또한 통탄스럽다’고 꼬집는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치욕의 역사, 우리가 잊어버린 ‘구멍’을 집요하게 파헤쳐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평범한 백성의 역사여야 한다. ‘존명배청’이나 ‘대의명분’ 혹은 ‘정절부인’ 따위의 단어로 일축해버리기에 백성의 고통은 너무나 컸다. 대의명분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결국 치욕은 잊히고 변화는 요원해졌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토록 참혹한 비극이 있었다면 전쟁을 부른 당사자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함에도 그런 일은 흐지부지 끝나버렸다(‘작가의 말’에서)’. 작가 강희진은 400년 전의 역사에 주목하고, 소설로까지 쓰게 된 계기를 위와 같이 밝혔다. ‘삶의 잔혹함과 아이러니를 당대의 이슈와 연결시키는 동시대적 실존소설’이라는 심사평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한 전작과 3년의 침묵을 깨고 내놓는 역사소설 《이신》은 언뜻 정반대의 작가적 행보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은 무척 닮아 있다. 이신은 가공의 인물이지만 영웅화된 인물은 아니다. 역사소설의 주인공으로 흔히 등장할 법한 왕이나 장군도 아니며, ‘높은 지위까지 올랐으나 여전히 서얼이고, 사랑의 열병을 앓는 사내이며, 칼잡이이고, 잃어버린 아내와 딸의 꽃신을 만드는 갖바치(‘작가의 말’에서)’일 뿐이다. 평범한 백성 이신의 상실과 고통에서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이신이 단죄하고자 하는 17세기 조선의 사대부들은 반성과 책임을 등한시하는 오늘날 사회지도층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14년의 봄’을 차마 누리지도, 떠나보내지도 못하는 지금, 이신이 전하는 사실 그 이상의 진실에 귀를 기울여본다. 작가의 한마디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토록 참혹한 비극이 있었다면 전쟁을 부른 당사자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함에도 그런 일은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이것이 소설 《이신》의 출발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막막했다. 무엇보다도 조선이 겪은 이토록 당혹스러운 역사를 독자들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동안 창작되었던 역사소설들이 대부분 의롭고 곧게 살다간 성군이나 영웅들의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그들의 얘기에 허구를 덧씌울수록 성군과 영웅은 더더욱 고귀한 존재로 재탄생되었다. 하지만 나는 병자호란을 전후로 한 인조와 서인 세력의 무능을, 그 전쟁의 후유증을 독자들에게 신랄하게 전하고 싶었다. 과오는 있으나 책임이 없는 그 ‘문명인’들의 모습을 독자들이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이 같은 역사는 비록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이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우리 시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