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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에는 끝이 있기 마련
내가 너라면 날 사랑하겠어 진짜 독감은 훨씬 더 심해요 치커리 소시지 협박 나도 그렇게 팔자 편하게 살아 봤으면 좋겠네 오리지널 베를린 버블티 양을 잡아먹을 수 없다면 늑대에게 자유가 무슨 소용 칠판 2. 몰락의 개화 길이가 너무 짧은 에스컬레이터 어떤 환생 기분 좋은 쇼핑 천천히 상대의 마음을 녹이는 거야 즉흥 음악회 싱싱한 생선 소극적으로 깨어 있었을 뿐이야 마지막 유언 고품격 신데렐라 두터운 발 3. 큰 기대 마드리드와 베를린의 차이 자판기 프랑스어 메일로 보낸 소시지 빵 되고죽기 미래의 파편 보람 없는 별장 알람 소리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지붕 위의 비둘기 산, 산, 산 현대극 4. 재능과 현실 바이킹 자격증 행운의 술꾼들 지각에 대한 독창적인 변명 빈 샴푸통에 마요네즈를 넣는 법 칭기즈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뼈한테 물어봐 특별한 재능 유튜브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한 번의 모험, 세 번의 승리 도둑의 역사 날쎈돌이 칼레 굼벵이 속도 세계적인 수준의 헤어스타일 이사의 달인 이해할 수 없는 것 문 열어 나는 호박이었다 착한 지그프리트의 날 5. 위풍당당 행진곡 그런 건 기계가 더 잘해요 잼의 일생 일상의 책임 ‘안 들려요 자루’ 바꾼 하루 기다리다 사람들이 어떤지 잘 알잖니 맥주 안 마시고 돈 모으는 건, 위험해 인생은 랄랄라 팔랑귀처럼 |
Horst 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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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렇게 팔자 편하게 살아 봤으면 좋겠네
학부모의 밤 행사에서 헤어지기 전 세르게이의 아빠가 엄청나게 큰 소리로 교실 저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까지 다 들리도록 나한테 묻는다. 학생의 날 애들을 수영장에 데려간다고 했다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나는 순발력 있게 대답했다. “예?” 그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어차피 낮에 할 일도 없는데 애들 데리고 수영장 가서 느긋하게 오전 시간 보내면 되겠네요.” 나는 당혹감이 묻어나는 침묵으로 첫 번째 대답을 더욱 구체화시킨다. 그러나 순식간에 다른 부모들까지 우르르 몰려와서 나에게 축하 인사를 건넨다. “정말 멋진 아이디어예요! 낮에 수영장에도 갈 수 있고, 정말 좋겠어요. 나도 그렇게 팔자 편하게 살아 봤으면 좋겠네.” (…) 수영장은 만원이다. 정말, 제대로 만원이다. 당연하다. 학생의 날 아닌가. 기나긴 하루가 죽을 맛인 부모들이 자기 아이와 다른 집 아이들을 끌고 모조리 수영장을 찾았을 것이다. 탈의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벌써부터 고온다습한 수영장 공기가 일격을 가한다. 숨이 턱턱 막히는 이 수영장의 마취제가 곧바로 밀어닥친다. 열기의 격랑을 동반한 채. 갓 부친 계란프라이 위에 몸뚱이 전체를 올려놓은 느낌이다. 듣기엔 상당히 에로틱하지만 효과는 별로 그렇지가 않다.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린다. 아이들은 고함을 지른다. 무섭거나 좋아서가 아니다. 일종의 전통이다. 수영장에 가면 누구나 고함을 지른다. 아이들에겐 그런 전통을 습득하는 예민한 감각이 있다. 나는 땀을 흘린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싶지만 악틴이 팔꿈치를 어딘가에 부딪치는 바람에 먼저 위로해 주어야 한다. 세르게이의 보관함이 뻑뻑하다. 율레는 덥다고 난리다. 마틸다는 이중으로 묶은 나비넥타이가 안 풀려 끙끙댄다. 나는 땀을 흘린다. 악틴이 무릎을 부딪친다. 젤린은 목이 마르단다. 레오, 나오미, 카롤리네는 벌써 옷을 다 갈아입고서 얼른 수영장으로 가자고 재촉한다. (…) 다른 부모들이 악을 쓰면서 얼른 나가라고 소리친다. 마틸다는 도로 옷을 다 입고 당장 집에 가겠다고 난리다. 세르게이가 보관함 때문에 얼굴이 시뻘게져서 괴성을 지른다. 악틴이 등을 부딪친다. 미차는 팬티를 입고 물에 뛰어들겠단다. 젤린은 내 꼴이 눈 뜨고 봐 줄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말한다. 너무나 땀을 많이 흘려서……. 눈앞이 새카맣다. --- pp. 38~44 보람 없는 별장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다시 물 밖으로 나가 해변으로 돌아간다. 아마 시간이 상당히 지났을 것이고 나도 상당히 떠내려왔을 것이다. 손수건으로 덮어 놓은 우리의 금고를 기준으로 본다면 확실히 그러하다. 아이들이 저기 누워 스무고개를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손수건을 봤냐고 물어보니 이쪽이 볼 게 더 많아서 손수건을 집어 들고 오른쪽으로 약 50미터를 옮겼다고 대답한다. 나는 아이들을 노려본다. 무슨 문제가 있냐고 아이들이 묻는다. 옮겨 봤자 해변이 다 똑같은 해변인데 무슨 문제가 되냐고. 나의 대답. “바로 그게 문제야.” 난 원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돌아가 귀중품을 파묻은 곳을 찾아 헤맨다. (…) 한참 떨어진 해변에서도, 심지어 해안 길에서도 귀중품 구멍을 못 찾는 얼간이를 구경하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 모두가 땅을 파지만 소용이 없다. 묻은 장소를 도저히 못 찾는다. 친구 부부의 열한 살짜리 아들 율리안이 나를 구석으로 끌고 간다. 급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한다. 그가 우물쭈물 말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게……. 장소를 옮기면서 손수건을 들었더니 뭔가 파묻은 자리 같아서요. 우리가 아까 파서 귀중품이 든 비닐봉지를 꺼내 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저씨가 어찌나 놀라는지 너무 재미있어서 말씀 안 드렸어요. 그러다 아저씨가 모래를 파기 시작했는데 재미있어 보이더라고요. 그 아줌마하고 재미있게 노셨잖아요. 그래서 분위기 망치고 싶지 않아서 계속 그냥 있었는데……. 자꾸 일이 생각대로 안 돌아가서요.” 나는 생각한다. ‘똑같은 상황을 두고도 어쩜 저렇게 표현이 다를 수가.’ 우리는 몰래 짐을 꾸려 빠져나가기로 결정한다. 내일부터는 저 구석 서쪽 해변에서만 놀기로 한다. 우리가 별장으로 돌아오자 어른들이 막 나가려는 참이다. “해변에 난리가 났다며?” 그들이 외친다. “보물찾기 같은 거야? 잘하면 우리가 찾겠는걸.” 우리는 그들에게 행운을 빌어 주고 그들과 교대하여 집을 지키기로 한다. --- pp. 129~130 지각에 대한 독창적인 변명 카페에 앉아 홀거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이상 늦게 왔다. 홀거는 약속 시간에 늦어도 내가 즐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이 세상 유일한 상대다. 그의 변명을 내가 무척 아끼기 때문이다. 언젠가 홀거가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나타나서 그의 그 재미난 변명을 듣지 못하게 된다면 무척 아쉬울 것이다. 다행히 홀거는 엄청 늦었고 지금 막 신이 나서 뻥을 있는 대로 치고 있다. “전철을 탔거든. 늦어 봤자 아주 조금 늦겠다, 아니 거의 약속 시간에 맞추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갑자기 열차가 멈추는 거야. 어떤 사람이 유모차를 밀고 가다가 유모차 바퀴가 그만 철로에 끼인 거지. 그런데 아무리 용을 써도 빠지지를 않아. 흔들어도 보고 잡아당겨도 봤지만 도무지 꼼짝을 안 하는 거야. 그래서 결국 비용을 계산해 봤지. 어느 쪽이 더 비싸냐? 유모차냐 아니면 전철 운행을 계속 못 하는 것이냐? 기관사가 승객들에게 투표를 시켰는데 결과는 안 봐도 뻔했어. 모두가 한목소리였거든. 유모차를 깔고 지나가자! (…) 그런데 말이야, 이 유모차가 완전 현대식 티탄 알루미늄 강철 유압식 범퍼 쿠션인 거야. 어디든 갈 수 있게, 심지어 비포장도로도 우아하게 갈 수 있게 만든 거지. 피레네 산맥이든 아마존 삼각주든 베링 해협이든 달이든 어디든 가게 말이야. 이 유모차만 있으면 세상 어디든 문제없이 갈 수가 있는 거야. 그러려고 티탄 알루미늄 강철 유압식 범퍼 쿠션을 장착한 거지. 실제로 그 모든 지역에서 테스트를 해 봤어. 산에서도 하고 빙판 위에서도 하고 열대 늪에서도 하고……. 근데 아쉽게도 테스트를 하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 바로 프렌츨라우어 베르크인 거야. (…) 어쩔 수 없이 거기서부터 걸었고 그러느라 이렇게 살짝 늦은 거야.” 나는 웃는다. 그는 지금 고독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심리 치료사로 일한다. 그 일을 정말로 잘한다. 주로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그는 정말 말하는 걸 좋아하고 정말로 많이, 빨리,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말을 한다. 그런데 전혀 힘들어 하지 않는다. 상담 이틀째 되는 날 그는 같은 고객을 찾아가서 계속 이야기를 해 준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다시 한 번 찾아가면 대부분은 더 이상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 그걸로 이미 그 사람들에게 충분히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외롭지만 혼자라는 사실을 갑자기 아주 편안하게, 큰 선물로 느끼게 된다. --- pp. 164~167 나는 호박이었다 촬영 감독이 내 손에 쪽지를 쥐어 준다. 사회자가 내게 던질 예정인 세 가지 질문이 적혀 있다. “라인란트팔츠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가요?”, “당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도 라인란트팔츠가 나오나요?”, “라인란트팔츠에서 재미난 경험을 하신 적이 있나요?” 나는 쪽지를 노려보다가, 난생 처음으로 세 가지 질문을 읽기만 했는데도 바로 기절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스튜디오에서 카메라 앞에 앉아 사회자의 질문을 듣고 있다. “라인란트팔츠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가요?” 당장 다시 기절을 하려고 용을 쓰지만 몸이 거부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신 이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들린다. “오렌지요.” 사회자가 당황한다. “네?” “오렌지요. 오렌지 색깔. 그게 라인란트팔츠에선 제일 마음에 들어요. 오렌지색인 건 전부 미치게 좋아요.” “아, 네.” “다른 지방에, 그러니까 예를 들어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에 가면 파란색인 게 전부 멋지거든요. 왜일까? 이유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라인란트팔츠에선 오렌지가 제일 좋아요.” “아, 네, 그렇군요……. 정말……, 재미있네요. 다른 건 없나요?” “9요.” “네?” “라인란트팔츠에선 숫자 9도 좋더라고요. 그러니까 9가 들어간 건 다 좋아요. 예를 들어 식당에 갔는데 음식 값이 9유로가 나오면 기분이 정말 좋아져요.” “왜 아니겠어요?” --- pp. 232~233 맥주 안 마시고 돈 모으는 건, 너무 위험해 “30년 후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 그리고 너무 위험해.” “뭐가?” “맥주 안 마시고 돈 모으는 거 말이야. 너무 위험해.” “뭐가 위험해?” “한번 생각해 봐. 내가 30년 동안 맥주를 마시다가 어느 날 깨닫는 거야. 이런, 이 돈을 모을걸. 그 돈을 지금 갖고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그는 자신의 고민을 보여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저 멀리 일방통행로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그래도 그건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어떤 식으로든 그 1만 2천 900유로를 다시 마련할 수 있을 거야.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아. 반대로 30년 내내 절약만 하다가 깨닫는다고 생각해 봐. 이런 이런, 차라리 맥주를 마실걸. 그럼 30년 동안 못 마신 맥주는 어떻게 회복해야 하지? 매일 0.5리터씩 30년이면 약 5천 400리터야. 그건 절대로 회복할 수가 없어. 설사 한다고 해도 다른 일은 전혀 못 할 거야. 여생을 쉬지 않고 맥주만 마셔야 하는 거지. 얼마나 스트레스가 크겠어. 재미도 없을 거야. 인생의 황혼을 그런 식으로 보내다니. 술만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는 거야. 그러느니 지금부터 여유 있게 준비하는 거지. 그래야 노후가 편안해질 테니까. 또 마실 수 있는 만큼만 마셔도 되니까.” 상대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네. 그러니까 지금 네가 매일 저녁에 마시는 이 맥주가 너한테 일종의 노후 준비인 셈이네.” “바로 그거지. 내 노후 준비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매일 저녁 마시는 이 맥주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지. 절약하여 돈을 모으는 것보다는 항상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거든. 그러느라 돈을 못 모았다면 그건 노후에…….” 안타깝게도 남은 말은 엄청난 트림 소리에 묻히고 만다. 그래도 그의 친구는 알아들은 것 같다. --- pp. 270~2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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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 중년’ 호어스트 에버스가 돌아왔다
머리숱도 적고 키도 작은 데다 배까지 나온 우리의 호어스트 에버스. 그는 요즘 흔히들 말하는 ‘꽃중년’, ‘미중년’이라기보다는 ‘잉여 중년’에 가깝다. 어엿한 작가이자 만담가이지만 나가야 할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출퇴근 시간도 없는지라, 남들에겐 그가 딱히 정해진 직업 없는 한량처럼 보인다. 그런 이유로 딸아이네 반 학부모들이나 친구들로부터 휴일이면 애들을 봐 줄 대역으로 뽑히기 일쑤다. 그는 매번 순발력 있게 위기 상황을 모면하려 애쓰지만 결국 자신을 제외한 거의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설득에 떠밀려 기꺼이(?) 아이들을 도맡는다. 한시도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아이들까지 그를 좋아해 주니 ‘팔자 좋은’ 에버스의 인생은 조용할 날이 없다. 호어스트 에버스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정치 풍자꾼 카바레티스트(극장식당 카바레 무대에서 다양한 주제로 재담을 선보이는 배우)이다. 택시기사와 집배원으로 일하다가 카바레티스트로서 만담가 활동을 시작했고, 무대에서 낭독했던 이야기들을 엮은 대표작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이후 작가로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에버스는 여러 권의 작품집을 통해 어딘가 모르게 ‘잉여스럽고’ 엉뚱하며 위트가 넘치는 자신의 일상 이야기들을 재기 발랄하게 소개해 왔다. 신간 《내가 너라면 날 사랑하겠어》에서도 그의 글은 변함이 없다. 마치 무대 위에서 만담을 들려주듯 생생하며 활기가 넘친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문체에도 그만의 독보적인 개성과 유머러스한 감수성이 드러나 있다.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에버스가 중년에 접어들면서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전보다 더 느긋해지고 여유 만만해졌다는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에서 혈기 넘치고 엉뚱 발랄하던 베를린 청년은 이제 자식의 교육에 이바지하며 늘어나는 뱃살과 각종 노화성 질환을 걱정하는 40대 후반의 아저씨가 되었다. 가는 세월이야 항상 아쉽고 시절은 하 수상하니 아무리 호어스트 에버스라 해도 더 이상 그의 ‘똘끼’가 변함없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전보다 더 차진 소소하고 일상적인 그의 유머에 오히려 더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월 따라 변한 몸과 달리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또한 여전히 예리하다.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동네 수영장, 열차 도착이 지연되는 기차역, 딸과 함께 나선 벼룩시장, 대형 슈퍼마켓, 등산길……. 에버스는 이 모든 장소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그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그려 낸다. 아무 생각 없이 키득대면서도 그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의 심리를 포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는 벼룩시장에서 딸에게 흥정의 가장 중요한 단계를 알려 준다. “일단 천천히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거야. 상대가 안달복달한다 싶으면 그때 착! 그럼 상대가 바로 미끼를 무는 거지.” 비록 흥정에는 결국 실패했어도 바보 노릇으로 상인의 마음을 녹였던 것처럼, 에버스는 독자들의 마음을 녹이는 데에도 성공한다. 그리고 또 한 번 세상에 유쾌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낸다. 지하철에서 원고를 들고 낄낄거리다 사방에서 ‘정신줄 놓은 거 아냐?’라고 묻는 듯한 의혹 어린 시선을 자주 받곤 했다. 그러나 어쩌랴. 지뢰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지는 현란한 언어유희와 엉뚱한 작태를 우아하고 기품 있게 참아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입만 열면 헛소리 타령인 대머리 아저씨의 깨알 같은 유머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그의 엉뚱한 말과 행동이 마냥 웃기기만 해서가 아니다. 세계 경제나 정치 문제를 심각할 것 없는 웃음거리로 치부하며 장난질을 치기 때문도 아니다. 그는 여전히 세상을 고개를 외로 꼬고 바라보면서, 그 삐딱한 논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미처 생각지 못한 결론을 툭툭 뱉어 낸다. 늘 그랬듯 그것이 또한 맛깔스럽고, 유쾌하며, 지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황당무계하고 어딘가 ‘잉여스러운’ 농담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며, 웃음을 터뜨리고 탄성을 지르는 것이 아닐까. _ 장혜경(옮긴이) 인생은 랄랄라 팔랑귀처럼 “또 인터넷이 안 돼!”, “이놈의 컴퓨터가 말을 안 듣네!” 이렇게 답답한 순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전도유망한 방법이 뭘까? 에버스가 지인으로부터 전수받은 해결책을 알려 준다. 이른바 ‘되고죽기’이다. 되고죽기란 ‘되기를 고대하며 죽치고 기다리기’의 줄임말로,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압도적으로 성공률을 높이는 구원의 주문이다. 껍데기를 열어 이리저리 배치를 바꾸고 소프트웨어를 작동시키고 두들겨 패거나 악을 쓰고 다시 부팅을 시키는 방법보다 훨씬 성공률이 높은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컴퓨터 같은 기술적인 분야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복장 터지게 하는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적용시킬 수 있다. 에버스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되고죽기’에 대한 확신이 널리 퍼져야 한다고 호기롭게 말한다. 대부분의 문제는 원래의 문제를 추방시키거나 덮어 버리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저절로 해결된다는 확신 말이다. 이런 확신을 갖고 생각하면 모든 일이 쉬워진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긁혀 흠집이 났을 때 가장 신속하고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같은 부분이 찌그러지는 것이 된다. 즉, 되고죽기의 자세와 함께 약간의 인내심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절로 해결되는 셈이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모든 문제를 대면한다. 정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받아들이되 문제에 매달려 안달복달하지 않는다. 과연 한량 에버스 선생답게 스트레스는 적당히 피해 갈 줄 아는 인생 태도라 할 수 있겠다. 에버스의 글에는 무조건 “열심히 살라”고 강요하는 메시지가 없다. 할 수 있다면 좀 더 느긋하게 기다려 보기도 하고, 천천히 쉬어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게으른 탓에 멀리 돌아가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 오히려 그런 유유자적함이 더 좋은 결과를 끌어내는 법이라고 답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인생관이 옳다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컴퓨터가 재부팅되는 순간, 악을 쓰고 욕을 하고 흔들고 뺐다 다시 꽂고 투덜거렸던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보람도 자긴 가끔 부럽다나? 유달리 남다른 그의 유머 코드는 이런 넉넉함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황당하고 어이없다가도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그만의 독특한 감수성과 개성, 가끔씩 드러나는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력은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맛을 더해 간다. 이제 나는 6분 정도 여기 서서 문을 붙잡고 있다. 마지막 2분 동안에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이럴 수가! 나는 내 할 일을 하고 있는데 아무도 지나가지 않다니. 파렴치하기 짝이 없다. 이쯤에서 그냥 손을 놓고 문을 닫으면 되나? 하지만 그다음엔 뭘 하지? 갑자기 공허감이 밀려들까 봐 겁이 난다. 아주 오랫동안 문을 지키고 있었던 것만 같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힘이, 의욕이 남았을까? 나를, 이 늙고 시들시들한 문지기를 써 주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문지기를 하기 전 나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목표는? 백화점을 들락거리고 싶었을까? 뭔가 사고 싶었을까? 무엇 때문에? 뭐가 부족해서?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결심을 굳힌다. 이제는 그만 손을 놓을 시간이다. 그래. 문을 다시 놓아야 한다.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냥 놓으면 양손이 다시 자유로워진다. 그래, 자유.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람을 느낀다. 내 안에 에너지가 샘솟는다. 가능성이 반짝인다. 그냥 놓고 자유로워져라! 지금! 그래, 바로 그거야! 어, 그런데 누가 오고 있다. 분명히 문을 지나갈 것 같다. 그가 지나갈 때에도 나는 문을 잡아 줄 수 있다. 시점은 중요하지 않다. 이제 나는 문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내 결정이다. 누구도 뺏어 갈 수 없는 이 자유와 더불어. (4부 재능과 현실 '문 열어' 중에서) 게으른 로맨티스트의 고품격 B급 코미디 호어스트 에버스의 이야기를 처음 읽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무엇일까?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추측해 본다면, “으잉?”, “무슨 이야길 하려는 거지?”, “에엥?”,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나?” 등등……. 그의 유머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한 번 더 읽어 봐야 이해가 될 수도 있고, 웃기긴 웃긴데 어쩐지 생경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렇다. 그의 유머는 어찌 보면 ‘병맛’(어떤 대상이 '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하는 신조어)에 가깝다. 마흔이 훌쩍 넘은 독일 아저씨의 유머를 병맛이라고 하다니, 어쩐지 웃기는 한편 이래도 되나 싶다. 그러나 사실이다. 가령 마지막 유언을 연습할 방법을 궁리할 때가 그렇다. 에버스는 어느 위인 부럽지 않은 불멸의 유언을 남기고 싶어 한다. 방법을 이리저리 궁리하다 감독, 배우, 시나리오를 구비하여 완벽하게 예행연습을 해 볼까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예행연습이라도 죽는 순간이 아니면 유언을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난관에 부딪쳐 고민한다. 60대 몸짱 멜 깁슨과 비교당한 후 지방 흡입술로 근육을 만드는 방법을 구상할 때는 또 어떤가. 지방은 체내의 다른 지방을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다며, 비교적 쓸모없는 머리 혹은 발에다 지방을 잔뜩 넣어 그 부위로 지방을 끌어 모으고 나머지 전신을 근육질로 만들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지방이 들어간 부위는 맞춤 모자나 신발로 가리면 전혀 문제없다면서 말이다. 그가 하루 이틀 이랬던 것은 아니다. 전작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에서도 ‘병맛스러운’ 일화는 등장한다. 새로 산 연필심이 끝까지 닳으려면 몇 번 줄을 그어야 할지 궁금했던 그는 1만 7천 번이 넘도록 선을 그어 본다. 그러던 중 문득 ‘이거 시간 낭비 아냐?’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초고수 한량답게 ‘그럼 안 되나? 어차피 내 시간인데!’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쩐지 당황스럽지만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에버스의 유머를 ‘고품격 B급 코미디’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이유가 이런 일화들 속에 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까”라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이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에버스는 말한다. “내 인생인데, 뭐 어때?” 그는 가끔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할 뿐이다.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주어졌지만 진정한 자유는 맛보기 힘든 오늘날 웃고 싶은 만큼 마음껏 웃을 자유 말이다. 처음에는 그의 유머가 남다르고 생경하게 느껴지다가도, 읽고 나면 어쩐지 개운하고 통쾌하다. 오랜만에 국내에 등장한 그의 신간은 이런 통쾌함을 느껴 본 적 있던 에버스 마니아들에게 반가운 선물이 될 것이다. 벌써 한 시간 반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내 옆자리에 앉아 철로만 노려보던 남자가 갑자기 손거울을 꺼내 얼굴 앞에 갖다 댄다. 아마 자기가 아직 숨을 쉬는지 보려는 것일 테다. 거울에 뿌옇게 김이 서리자 실망하여 한숨을 내쉰다. 그가 다시 거울을 집어넣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런 말을 내뱉는다. “우리 지구가 정말로 우주의 먼지 알갱이라면 나는 상관없으니 누가 와서 싹 닦아 버렸으면 좋겠어.” 말을 마치고 그가 옆으로 쓰러진다. 아마 드디어 죽은 것 같다. 적어도 미소는 짓고 있다. 어쨌거나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은 멋졌다. 저 앞쪽 A번과 B번 승강장에도 벌써 몇 명의 승객이 죽어 있다. 나도 천천히 유언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3번 선로로 에센행 근거리 열차가 진입하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정말로 좋은 유언이다. 내가 그 말을 그냥 생각만 한 게 아니었나 보다. 지금 확성기에서도 그 말이 흘러나오는 걸 보니. 아마도 내가 염력으로 그 말을 불러낸 것 같다. 시공간 연속체가 이미 훼손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순간 기차가 진입한다. 죽은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열차를 탄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상에! 내가 이 사람들을 몽땅 구하다니! 내가 구했어! 나의 유언이 모두를 구했어! 누가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나? 오래오래 기다리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5부 위풍당당 행진곡 '기다리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