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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미학적 자질로 생태학의 서막을 열다
18세기 화가이자 동판화가였으며 동시에 자연연구가였던 메리안은 수리남에서 관찰한 곤충의 변태(變態)를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수리남은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가이아나에서 분리되었다. 남미의 북동 해안에 위치한 수리남은 오늘날처럼 교통수단이 매우 발달한 시대에도 지역적으로 유럽에서 매우 먼 곳이다. 당시 해상을 통해 수리남을 가려면 몇 달이 걸리는 고생길이었고 하루하루 생사의 기로에 서야 했다. 그렇다면 1699년, 오십이 넘은 메리안은 왜 이렇게 힘든 일을 자처했을까? 그리고 그녀는 왜 수리남의 곤충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그것들의 변태를 그림으로 남기려고 했을까? 이런 궁금증을 해결하려면 우선 메리안의 출생지인 프랑크푸르트로부터 암스테르담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경유한 인생의 정류장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메리안은 마지막 경유지인 암스테르담에서 수리남으로 긴 여행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유명한 《수리남 곤충의 변태에 관하여Metamorphoisis Insectorum Surinamensium》를 집필했다. 당시 ‘메리안’이라는 이름은 아주 유명했다. 그녀의 아버지 마태우스 메리안은 동판화가이자 출판자로 저명했는데, 도시 풍경을 정확하게 묘사한 그의 그림은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스위스 바젤 출신인 마태우스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근거지를 옮긴 것은 30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인 1647년경이었다. 그리고 1647년 4월 2일, 마리아 메리안은 전쟁의 여파로 기근과 떼강도가 극성을 부렸던 그곳에서 태어났다. 정신적인 생활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기였다. 척박한 사회적 환경이 채 가시기도 전인 세 살 무렵 그녀는 또 하나의 불행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이었다. 사실 메리안은 유년 시절 단 한 순간도 누군가의 보호를 받으며 걱정 없이 보낸 시기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어린 시절 세 명의 형제를 앞서 보내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의 의식에 남아 있는 최초의 인상은 경제적인 궁핍과 가족의 죽음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인생이 불행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꽃을 그리는 화가인 야콥 마렐과 재혼하면서 그녀는 그림과 만날 수 있었다. 마렐은 의붓자식인 메리안에게 예술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주었고 그녀가 그림을 그리도록 독려했다. 워낙 독립적인데다 무슨 일이든 지치지 않고 고집스럽게 해내는 기질이었던 메리안은 금세 그림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평생 동안 예술과 학문적인 목적을 추구하면서 처음 그림을 대할 때처럼 강한 집념을 가지고 살았다. 메리안은 마렐의 도움으로 아주 어린 나이에 이미 부모님의 다락방에 자신의 작은 작업실을 차렸다. 작고 놀라운 생명체에 친숙해지고자 했던 그녀는 그 작업실에서 꽃, 벌, 나비 등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녀는 할아버지의 유품인 화첩에서 꽃그림을 그릴 본을 뜨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아버지가 말년에 완성한 다섯 권짜리 자연사를 이용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 책에서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낸 3000종의 낮선 동물과 상상의 존재를 그렸다. 메리안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노력했고 이런 소망을 굳세게 현실로 옮겼다. 예를 들어 추한 벌레가 놀라운 나비로 변하는 모습을 통해 곤충의 변태를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던 그녀는 1660년, 열세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누에와 몇 장의 뽕나무 잎을 집으로 가져온다. 이런 감각적인 자각은 그녀가 비망록을 만들어 관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글로 옮기면서 점차 학문적인 특징을 띠게 되었다. 그녀는 관찰을 통해 색채로 나비의 암컷과 수컷을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며, 성체가 되는 과정에서 누에는 안쪽부터 남김없이 먹힌 후 빈껍데기만 남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그녀는 보기 흉한 단조로운 형태의 나비들이 밤에 활동하는 반면, 화려한 색깔을 지닌 나비들은 낮에 날아다닌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오늘날에는 어린 학생들조차도 당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당시로서는 세심하고 꼼꼼한 관찰로 이루어낸 놀라운 성과였다. 메리안이 어린 시절에 깨달은 이런 다양한 결과들을 우리는 과소평가하지도 비웃지도 말아야 한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당시 사회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놀라워해야 마땅할 것이다. 첫째, 누에에 관한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서적은 167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판되었다. 둘째, 당시의 전문적인 서적들은 라틴어로 집필되어 있어서 메리안이 읽을 수 있는 것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놀라운 발견들이 주변으로부터 애정 어린 시선을 받은 것만은 아니다. 특히 누에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어머니에게 혐오감과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17세기에 과학적인 성향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미신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녀의 어머니가 느꼈을 감정은 대략 상상해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냄새나고 구역질나는 곳에서 생기는 애벌레, 구더기, 파리 같은 것들 속에 작은 악마가 살고 있다고 믿었다. 더러운 벌레들이 모두 악마의 소산이라고 믿은 것이다. 1671년이 되어서야 이탈리아의 자연과학자 프란체스코 레디가 애벌레와 구더기가 무(無)에서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진흙과 오물에 묻혀 있던 작은 알에서 서서히 생겨나고 그 알에서 생명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리안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보편적인 인식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학문적 길을 찾아갔다. 그리고 헬무트 카이저가 쓴 그녀의 전기에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메리안은 열여덟 살이 되기 전, 이미 자신의 영역을 발견했다. 무지와 편견의 시대에 여성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다 박물관에서는 곤충들의 기원과 번식을 볼 수 없다. 즉 누에에서 어떻게 번데기로 변하는지,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인지 등등 실제적인 과정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든 한계가 메리안으로 하여금 수리남으로 떠나도록 자극했다. 1699년 6월, 메리안은 암스테르담에서 큰딸 헬레나와 함께 미지의 세계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때 그녀의 나이 52세였다. 수리남으로의 여행은 시작부터 끔찍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뱃멀미였다. 그로 인해 세 달 동안의 여행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지만, 메리안은 마침내 수리남이란 감각의 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열대의 향기에 취했고, 다채로운 식물에 경탄했으며, 파인애플, 오렌지 등등 생전 처음 접해보는 과일의 맛을 마음껏 즐겼다. 게다가 매일 밤 벌어지는 귀뚜라미와 매미가 콘서트는 그녀에게 황홀하고 깊은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천국인 것은 아니었다. 너무나 긴 낮 시간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어둠이 빨리 찾아오는 곳에서 생활하던 그녀에게 길고 지루한 낮을 견디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어쨌든 메리안은 의욕에 넘쳐 수리남의 원시림을 찾았다. 그녀는 처음에 꽃무지, 누에, 거미, 메뚜기, 도마뱀 등을 채집해 거처로 가져왔으며, 맨 나중에는 작은 악어도 화주(花酒)로 채워진 병에 담겨졌다. 그녀는 최초에 세웠던 계획과 상관없이 아주 급하게 일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수리남의 눅눅하고 더운 날씨 탓에 채집된 표본들이 빠른 속도로 썩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면 결국 연구에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수리남의 풍토는 메리안 모녀에게도 혹독한 현실로 다가왔다. 더위는 말할 것도 없고, 모기로 인해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메리안과 헬레나의 마음을 더 괴롭게 만든 것은 네덜란드의 식물상인과 설탕상인들이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태도였다. 대부분 서인도 제도에서 끌려온 흑인이었던 그들은 동물보다 못한 잔혹한 대우를 받으며 비참하게 착취당하는 노예였다. 메리안은, 임신을 하지 않겠다는 고통스런 소망으로 독초의 씨앗을 먹을 만큼 자신들의 삶에 절망했던 검은 노예의 운명에 대해 혐오감에 가득 찬 보고서를 쓰기도 했다. 그 노예들은 완전히 체념한 채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는 순교자 같은 자신들의 삶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메리안은 노예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수리남의 권력자들과 갈등 관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돈이 되지 않을 뿐더러 목적도 없어 보이는 메리안의 활동에 대해 어떤 배려도 해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메리안 모녀는 수리남에 있는 라바디스트 공동체의 보호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한편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메리안의 연구 활동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숨통을 죄는 더위를 극복하기 위해 가능한 이른 시각에 원시림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다양한 생물들의 표본을 모으면서 생명의 기적을 발견해 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연구 범위를 점점 더 많은 동물군으로 확대시키려고 했고, 그만큼 더 많은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메리안의 작업은 그녀가 갑자기 말라리아에 걸려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딸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병을 이겨낸 그녀는 계획보다 몇 년 앞당겨 유럽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1701년 9월 23일, 메리안은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 메리안은 곧바로 자신이 채집한 동식물들을 재정리했고, 1705년에는 마침내 그녀의 대표작 《수리남 곤충의 변태에 관하여》를 출간했다.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이 책은 한 마디로 경이롭고, 이국적이며, 매혹적인 수집품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60개의 채색된 판으로 꾸며진 그림은 재미가 있을 뿐 아니라 글로는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기가 막히게 자세하다. 예를 들어 똬리를 튼 채 재스민 가지 아래 누워 혀를 날름거리는 뱀에게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마음껏 돌아다니는 누에, 번데기, 나방들의 그림은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그 생동감을 느낄 수 없다. 이외에 이 경이로운 책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표지에 제목과 메리안의 이름만 명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통례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났는데, 그때까지 그 점을 명백하게 표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그녀는 예전의 작품에서는 늘 등장했던 신에 대한 찬미를 어느 정도 제한했다. 대신 처음으로 자연의 미학적이고, 호의적인 측면 외에 끔찍하고 추악한 모습이 있는 그대로 묘사되었다. 《수리남 곤충의 변태에 관하여》는 메리안의 이전 책들의 판매부수를 증가시킬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60세가 넘은 메리안은 수리남으로의 두번째 여행을 떠날 용기를 냈다. 하지만 1711년, 그녀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 용기를 실천으로 옮길 수 없었고, 1717년 1월 13일 암스테르담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6년 후 그녀는 라이드제 케르크호프에 안치되었다. 오늘날 메리안의 무덤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녀의 놀라운 작품 《수리남 곤충의 변태》는 남아 있다. 이 화려한 작품의 견본은 성 페테르스부르크로 가는 우회로에 위치한 어느 집 다락방에 있었다. 그리고 1907년, 젊은 나보코프가 그 책을 발견했으며, 그는 메리안의 그림으로 인해 문학에 대한 사랑 외에 나비를 향한 열정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나비들 중 한 마리는 메리안의 이름을 딴 학명으로 명명되었다. ‘Inga Merianae’라고 불리는 경이로운 나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