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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권하며
옛날 옛날에 왕실의 큰 축복인 원자의 탄생 왕실의 출산 풍속 - 왕비는 어떻게 아기를 낳았을까?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원자의 어린 시절 왕실의 체육 - 궁궐에서는 어떤 놀이를 즐겨 했을까? 왕세자가 꼭 치러야 했던 궁중의식 공주의 생활 - 공주의 신랑감은 어떻게 뽑았을까? 할 일이 많았던 왕세자의 궁중생활 왕실의 장례식 - 왕의 장례는 어떻게 치러졌을까? 왕세자가 받았던 다양한 교육 왕세자의 실습교육 - 후계자로서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세상을 다스렸지만 힘들었던 왕의 생활 다른 왕족의 생할 - 다른 왕족들의 어떻게 살았을까? 조선 왕실 가계도 사진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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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500년을 이끈 태조에서 순종까지, 왕들의 어린 시절에서 배우는 조선 왕실의 생활과 역사
이 책은 왕의 맏아들로 태어난 원자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성장해 가는 과정을 따라가 보면서 조선 왕실의 생활상과 역사를 들려주고 있다. 조선은 유교에 바탕을 둔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왕의 아들일지라도 원자와 대군의 서열이 달랐다. 그래서 왕비가 첫 아들을 낳으면 나라의 큰 경사였기 때문에, 왕이 직접 소식을 알리고 전국 관아의 죄인들을 풀어주었다. 이처럼 특별한 관심을 받으며 자라난 왕은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서 엄청난 권력을 가졌다. 그래서 왕이 훌륭한 성품과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나라 전체가 큰 위기에 빠질 수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왕실에서는 훌륭한 품성을 갖춘 왕으로 키워내기 위해 태교에서부터 교육을 시작했고, 유모조차도 까다롭게 뽑았으며 세 살밖에 안 된 어린 나이일지라도 공부를 시켰다. 왕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왕세자였지만, 오늘날의 수험생들보다 더 많이 공부했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왕세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왕실에서 지식 교육만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아니다. 유교가 조선의 정치 이념이었던 만큼 어질고 착한 왕이 바르게 나라를 다스려 태평성대를 이루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왕실에서는 현명한 왕세자로 길러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신하나 왕의 헌옷으로 갓 태어난 원자에게 옷을 만들어 입힌 것도 왕실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검소하고 오래 살라는 왕실의 바람이었다. 또 백일잔치 때에 속을 넣은 송편과 속을 넣지 않은 송편을 빚어 상에 올린 이유는 ‘속이 꽉 찬’ 사람과 ‘뜻이 넓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는 뜻이었다. 원자가 7,8세가 되면 공식적인 왕의 후계자로 임명되는 ‘책봉식’을 치르게 되는데, 이때 왕세자는 성균관에 입학하게 된다. 이것은 조선이 유교를 떠받드는 국가였기 때문에 왕세자도 유학을 공부하고, 유교의 전통을 이어갈 것이라고 알렸던 상징적인 행사였다. 12세에 왕세자가 세자빈을 맞이하는 가례를 치르면 날마다 왕의 수랏상을 살폈고, 왕이 아팠을 때에는 공부를 중단하고 병상을 지키며 약을 먼저 맛보고 올렸다. 왕세자가 백성들에게 먼저 모범을 보여 효도를 강조했던 것이다. 왕세자는 이 외에도 후계자로서 여러 가지 실습교육을 받았는데, 왕을 대신해서 나랏일을 돌보는 ‘대리청정’과 군사훈련, 농경실습 등이다. 직접 왕이 쟁기로 밭을 갈고 낫을 들고 추수를 해 보였는데, 궁궐에서만 자란 왕세자에게 이러한 농경실습은 농사의 중요성을 직접 깨닫는 소중한 기회였다. 이처럼 조선 왕조 500년을 이끌었던 조선의 왕들은 왕위에 오르기까지 유교사상을 중시하는 왕실의 교육을 받으며 훌륭한 왕의 자질을 키워갔다. 부록으로 조선 왕실의 가계도가 들어있어서 500년 왕실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왕의 맏아들로 왕위에 오르기까지 보냈던 성장 과정과 하루 일과 수많은 옛 책들에서 발굴해낸 자료 외에도 왕세자가 공부했던 서책들과 각종 의례에 대한 왕실 기록화, 왕세자가 태어나고 자란 유적들에 대한 사진 등 총 35점의 도판들을 수록하여 조선의 왕세자로 성장해 가는 과정과 생활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조선의 왕실에서는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어렸을 때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원자가 갓난아기 때부터 두뇌와 몸을 고루 발달시키는 놀이를 시켰고, 커갈수록 공부 양과 내용이 점점 어려워져 갔다. 왕세자의 하루는 오늘날의 수험생처럼 공부 위주로 짜여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계속 이어지는 수업 외에도 배운 것을 복습하고 확인하는 시험이 있었고, 때로는 왕이 직접 실력을 점검하기도 했다. 만약 성적이 좋지 않으면 왕에게 호되게 꾸중 들었다. 그래서 왕세자들은 시험 날짜가 다가오면 심한 불면증과 두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공부만 했던 것이 아니라 무예와 인격을 길러주는 예법, 악기 연주, 활쏘기, 말타기, 붓글씨 쓰기, 셈하기 등 여섯 가지 과목도 배웠다. 그렇다면 왕세자에게도 방학이 있었을까? 조선시대 성균관 학생들에게는 방학이 있었다. 심한 가뭄이나 홍수가 나서 농사 피해가 크면 고향으로 가서 집안일을 거들었다. 하지만 왕세자는 방학이 따로 없었고 궁궐에서 큰 행사가 열릴 때에만 잠시 수업을 중단했다. 다른 왕자와 공주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조선시대는 유교에 바탕을 둔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왕의 자식이라도 부르는 이름과 대우가 달랐다. 그래서 왕세자가 되지 못한 왕자와 공주들은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조용히 살았다. 그래서 왕은 가끔씩 벼슬조차 못하는 형제들과 종친들을 불러 잔치를 열고 위로하였다. 왕자들은 벼슬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문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처럼 학문과 글씨, 그림에 능한 사람도 있었다. 왕자와 공주들은 결혼하면 궁궐 밖으로 나가 살았는데, 옷차림과 집의 크기, 시종의 수가 왕세자와 차이가 많았다. 공주들은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자들보다 더한 설움을 받으며 컸다. 공주는 ‘공주 아기씨’라고 불리다가 일곱 살쯤에 공주의 자리에 오르고 14세쯤에 사대부 집안으로 시집갔다. 하지만 공주의 남편은 벼슬을 할 수 없었고, 시부모도 공주의 눈치를 살펴야 해서 공주는 마음의 병에 시달렸다. 그래서 궁궐에 다녀오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다. 이처럼 이 책을 읽다보면 왕세자뿐만 아니라 다른 왕족의 삶까지 두루 알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