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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나를 흔든 책들
떠돌이 철학자 전시륜의 행복론 미쳐야 미친다 침묵 속의 말 행간의 벤치에 앉다 둔한 붓과 붉은 까마귀 청빈의 사상 아이들에게 배우다 고통의 변증법 잡초에 대한 배은망덕 2장 상식의 그늘 빗장은 풀린다 누구를 위한 스트레스인가 순수는 독이다 문지방에 앉지 마라? 주워 모은다고 모두 역사인가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 연민 없이 웰빙은 없다 누가 무식한가 신화적인 야성, 야만적인 문명 식량이 모자란다? 3장 불편의 재발견 축제, 불온한 언어 인섹토피아 타이타닉 현실주의 어플루엔자, 소비 바이러스 사소해지기의 어려움 타자의 눈 늑대에 대한 오해 DDT 연쇄살육사건 패스트푸드의 제국 여백과 침묵의 공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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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는 "로마의 테라스"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절마에 빠진 사람들은 구석에서 살아가는 법일세.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모두 구석에서 살아가지. 책을 읽는 사람도 구석에서 사는 거네. 절망한 자들은 숨을 죽이고, 누구에게 말을 하거나 누구의 말을 들지도 않으면서, 마치 벽에 그려진 사람처럼 공간에 달라붙어 살아가는 거야.” 패배주의자의 감상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책읽기는 내 나름대로 탈주의 한 방식이었다. 닥치는 대로 읽는 독서, 즉 ‘남독濫讀’이야말로 가장 큰 독서의 즐거움이라는 말에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독서는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내 일탈의 욕구에 가장 적합한 놀이였다. 체계도 없고, 거창한 자기 이념도 없이 오직 책읽기의 쾌감을 좇는 나는 독서의 쾌락주의자였던 셈이다.(7~8쪽, 밝음의 변두리에서)
왜 아니겠는가.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의 사랑처럼 아름다운 노년의 사랑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웃음과 눈물, 목욕과 샤워, 공포와 번민, 우측과 좌측 등 세계를 무수한 대립쌍으로 나누고, 거기에 신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투르니에의 이분법은 재미있다. 그러나 세계가 그렇게 호락호락 이분법의 체계로 설명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정과 사랑을 칼금 긋듯 양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좋은 사랑은 어느 정도의 우정을 함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어떤 우정은 사랑을 향해서도 손을 뻗치는 것이 아닐까. 사랑과 우정의 고유한 영토가 따로 있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정념이 개입되지 않는 사랑, 섹스가 개입되지 않는 사랑이 우정이라고 정의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비판적 거리를 가질 수 없는 정념이 개입되면, 자연히 관계는 ‘쿨’해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투정이 늘고 불평이 늘고 과도한 것을 요구하고, 긁고 간섭하고 따지고 들기 십상이다. 심지어 얼굴에 손톱자국까지 남기기도 한다. 정념에 따르는 부작용들이다. 식사를 하듯 ‘쿨’하게 섹스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그렇다고 거기에 과도한 의미를 덧붙이는 것도 왠지 칙칙해 보인다. 너무 무겁지도 않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중용은 언제나 멀고 힘겹게만 느껴진다.(100~101쪽, 순수는 독이다) --- 본문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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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성찰을 위한 책읽기
부제인 ‘어느 국어선생의 쓸모 없는 책읽기’가 말하듯이 이 책은 요즘 유행하는 ‘책에 대한 책’이다. 실제로 이 책은 글쓴이가 10여 년 동안 각종 온라인 매체에 썼던 수많은 서평 가운데 30편을 골라 묶은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여느 ‘책에 대한 책’과는 다른 뚜렷한 색깔을 갖고 있다. 그것은 글쓴이가 서평을 쓰는 목적이 책을 소개하고 비평하는데 있지 않고, 세상과 나의 관계를 따지고, 자기를 성찰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곧, 글쓴이에게 책은 ‘객체’가 아니라 또 다른 ‘자아-주체’인 셈이다. 따라서 그의 책읽기가 고등학교 시절의 조세희와 정희성, 90년대의 하루끼와 윤후명을 거쳐 이제 레이첼 카슨과 장일순으로 옮겨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내 책읽기는 세상과 ‘나’와의 불협화음, 내 피로의 기원을 따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것은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이기도 했고, 세상을 들여다보는 작업이기도 했다.”(8쪽) ■ 쾌락주의자의 책읽기 방식, 남독濫讀 글쓴이는 책읽기가 지금의 현실에 쓸모 없음을 인정한다. ‘계몽의 시대’는 끝난 지 이미 오래다. 정보의 양과 속도는 인터넷을 따라가지 못하고, 재미는 영화와 만화가 앞길이다. 오랜 시간 정신을 모아야 하는 것도 요즘 사람들에겐 무척 피곤한 일이다. 요즘 책들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실용’과 ‘학습’을 목적으로 내세우는 것도 살아남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이처럼 책읽기가 쓸모 없어진 시대에 여전히 그는 책을 읽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책읽기는 그 자체가 쾌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쾌락을 얻기 위해 찾은 방법이 바로 남독濫讀이다. 에릭 호퍼, 전시륜, 수잔 올린, 에드워드 홀, 김화영, 롤랑 바르트, 미셸 투르니에. 그의 책읽기는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달린다. 그에게 책읽기는 계몽도 아니고 실용도 아니다. 그저 ‘쾌락을 좇는 본능’일 뿐이다. “패배주의자의 감상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책읽기는 내 나름대로 탈주의 한 방식이었다. 닥치는 대로 읽는 독서, 즉 ‘남독濫讀’이야말로 가장 큰 독서의 즐거움이라는 말에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독서는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내 일탈의 욕구에 가장 적합한 놀이였다. 체계도 없고, 거창한 자기 이념도 없이 오직 책읽기의 쾌감을 좇는 나는 독서의 쾌락주의자였던 셈이다.”(8쪽) “나는 그저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싶었다. 남들이야 체계도 없는 남독이니 뭐니 수군거린다 해도,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어떤 의무감에 속박됨 없이, 그저 마음이 내키는 대로 따라가는, 그러한 독서의 시간 속에 있고 싶었다.”(46쪽) ■ 책읽기를 통한 발견, ‘나는 상식이 불편하다’ 글쓴이는 어떤 ‘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문명보다는 야만 쪽으로, 중심보다는 변두리 쪽으로, 번쩍거림보다는 그늘이나 어둠 쪽으로 물러나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그를 만들어 온 책읽기도 변두리에서 변두리로 향하고 있다. 그는 책읽기를 통해 문명=중심=번쩍거림=‘상식’의 그늘을 본다. 그리고 야만=변두리=어둠=‘불편’에서 상식을 재발견한다. ‘순수는 독이다’(97쪽), ‘연민 없이 웰빙은 없다’(125쪽), ‘누가 무식한가’(132쪽), ‘과연 무엇이 야만인가?’(186쪽) 등이 바로 상식의 재발견을 통해 그가 얻어 낸 문제들이다. “효율성, 생산성, 경제성……. 대체 이런 것들이 언제부터 놀이의 규칙이 되었는지, 하늘의 새들과 땅의 풀들과 이 세계의 동무들과 어울려 잘 한번 놀아보는 데 저 강령들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대체 누구의 권능을 빌어 저 강령들이 우리 위에 군림하시는 건지. 모르는 척 의뭉스레 요것들을 슬쩍 밟아버리면 안 될까. 어이쿠 미안해. 마음에도 없는 사과도 해가면서 말이다.”(152~15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