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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성’에서 ‘광물성’의 세계로
김점선은 ‘식물성’ 화가였다. 30년 동안 마직물로 된 캔버스를 세워놓고, 대마기름과 소나무 기름으로 유화를 그렸다. 그러던 어느날 오십견이 왔다. 아무리 울어도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고통을 잊으려고 컴퓨터를 장만했다. 화가는 곧 ‘정신을 잃을 만큼 황홀하게’ 컴퓨터 그림에 빠져들었다. 침식을 잊고, 눈이 아파서 더 이상 눈을 뜰 수 없을 때까지 그리고 또 그렸다. 캔버스와 붓 등 ‘식물성’의 도구로 작업했던 화가는 어느덧 모니터와 마우스를 사용하는 ‘광물성’의 세계로 건너가게 되었다. 결국 김점선에게 닥쳤던 불행─오십견이 그를 디지털 미술세계로 안내한 것이다. 『10cm 예술』(2002년 마음산책 발행)은 오십대 중견 화가의 디지털 미술 ‘입문기’를 그린 책이었다. 컴맹이었던 작가가 태블릿 위에 펜 마우스로 그림 그리기 시작한 지 2년이 지났다. 그동안 김점선의 ‘디지털 미술’ 세계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10cm 예술 2』는 디지털 미술 세계 속으로 한발짝 더 깊이 걸어들어간 작가의 다양한 시도들을 보여준다. 캔버스와 모니터, 붓과 마우스의 만남 대담하고 강렬한 느낌을 주는 김점선의 화풍은 ‘데포르마숑’(deformation) 기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대상을 충실히 재현하기보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왜곡하는 이 기법은 유파나 시류와 상관없이 기존의 통념에 반항하면서 작품세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그의 ‘앙데팡당’(indipendent) 정신과도 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개성은 ‘컴퓨터’라는 도구를 만나 더욱 만개하고 있다. 채도와 명도가 높은 찬란한 색채, 거친 마우스 터치의 느낌, 입체감 없는 가볍고 인공적인 느낌들이 김점선의 반항기, 장난기와 한데 어울려 과감하고 유머러스한 느낌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10cm 예술』에서 ‘디지털’ 범위 안에서만 작업을 시도했다면 『10cm 예술 2』에서는 전통적 회화와 디지털 그림의 경계를 허무는 색다른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예전에 그렸던 유화들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그 위에 포토샵으로 새로운 작업들을 추가하는 식이다. 김점선은 유화 캔버스의 은근한 질감 위에 삐둘빼뚤한 마우스 터치와 현란한 색상을 덧입혀 자신만의 새로운 디지털 그림을 탄생시켰다. 김점선의 작업에선 캔버스와 모니터, 붓과 마우스가 경계 없이 만나고 있다. ‘식물성’에서 ‘광물성’으로 건너갔던 김점선은 이제 다시 ‘광물성’ 속에서 ‘식물성’을 불러들이고 있다. 한국의 조르바 김점선, 그림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하다 김점선이 고3이던 해, 일반사회 선생님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미술시간이었다. 말을 그리라고 했다. 아무리 그려도 말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찢고 지우고 하는 중에 수업 마치는 종이 울렸다.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도화지 안쪽에다 말이라고 엉성하게 그린 물체 옆에다 ‘이것은 말이다’라고 글씨를 써서 제출했다.” (29p 중에서) 아이들은 모두 소리내어 웃었지만, 김점선은 고통을 느꼈다. “그림 그리는 일을 이토록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일이 다시 생각난 것은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였다. 황급히 작업실로 돌아온 김점선은 주저하지 않고, 되는 대로 말을 그렸다. 그리고 그 옆에다 ‘이것은 말이다’라고 글씨를 써넣었다. 그것은 ‘그림 그리는 고통’을 부숴버리는 행위에 다름아니었다. 김점선은 ‘시각적 사고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림이란 ‘개인적인 시각적 표현’일 뿐이기에 잘 그려야 한다는 압박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 편하게 쉽게 그리려고 마음먹지 않을까?”라는 김점선의 물음은 ‘그림은 잘 그려야 하는 것’이라는 고정/강박관념을 전복시키고 속시원한 해방감을 준다. 김점선은 예술의 난해함, 권위, 폐쇄성을 부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이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한국의 조르바’다. 1부 유년 시절을 거쳐 청년기까지 김점선의 의식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오리」에서 김점선은 ‘사람인 것이 고통스러워’ 오리가 되고 싶어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평생 동안 동물적인 사랑으로 충만한 생을 사는 동물들이 부러웠’던 김점선은 청소년기를 지나면서부터 ‘히피’가 되기를 꿈꾼다. 실험영화를 만들고, 소설을 쓰면서 반항기를 풀어냈던 청년 시절의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다. 야간통행이 있던 시절 친구들과 닭장차에 실려 경찰서에 끌려갔던 기억(「보살」), 이화여대 재학 시절 전교생 예배시간에 한대수의 노래를 듣고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느꼈던 경험(「한대수」), 어느해 명절, 학교 건물에 틀어박혀 나흘 동안 내리 물만 먹고 칠판에 그림 그리며 유폐되었던 일화(「명절」) 등을 풀어내고 있다. 2부 결혼에 얽힌 일화들, 가난했던 젊은 시절, 예술가의 고군분투기가 실려 있다. 노래 잘하는 가난한 남자에게 청혼해서, 그날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 일화가 「돈과 떡」,「종이와 연필」에 실려 있다. 「흐르는 강물처럼」에서는 돈 사천원이 모자라 다섯 살 된 아이의 여름 바지를 사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던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100호 캔버스」에서는 ‘절대적이고 영원불변할 것 같던 그 가난이 어떻게 무너지기 시작했는지 나는 모른다’고 회상한다. 그림이 하나 둘씩 팔리기 시작하면서, 어느덧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게 된 일들을 들려주고 있다. 「디지털 세계에 입문하다」에서는 오십견을 맞은 뒤 디지털 그림에 입문하게 된 과정들이 실려 있다. 3부 남편 그리고 아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인으로서의 김점선의 모습이 담겨 있다. 98년 폐암으로 사망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글 곳곳에 듬뿍 담겨 있다. 「가죽 코트」에는 남편의 애틋한 마음을 남편이 죽고 나서야 알게 된 일화가, 「아빠」에서는 아들과 함께 큰 마켓에서 장을 보다가 어린아이가 ‘아빠’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격렬한 슬픔에 사로잡혔던 경험을 쓰고 있다. 일상에서 마주친 사람들에 대한 독특한 인상기들도 실려 있다. 「목욕탕」에서는 다섯 살 난 어린아이와 즐겁게 놀았던 경험이, 「천사 혹은 악마와 조우하다」에는 지하철에서 만난 민감한 아이에 대한 인상기가, 「도적일기」에는 도벽이 있는 후배를 따라 물건을 훔쳤던 일화가 실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