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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멘트
작명의 역사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냄새나는 침몰 어린이는 어떻게 청소년이 되는가 심마니 같은 마음으로 귀벌레 이야기 라디오 로맨스 라디오 작가가 라디오를 끌 때 일터로서의 라디오 지상 최후의 라디오 나는 정말 라디오를 좋아했을까? 클로징 멘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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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MBC FM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와 MBC AM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인기는 굉장했다. 주말에는 두 프로그램 다 청취자와 함께하는 공개방송을 편성했는데, 다음 날 늦잠을 자도 되는 토요일의 〈별밤〉 공개방송은 끝까지 들을 수 있었으나 일요일에 방송되었던 〈밤의 디스크쇼〉 공개방송은 다음 날 등교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듣다가 잠들어버릴 때가 많았다. 때문에 프로그램 시작할 무렵 아예 녹음 버튼을 눌러놓고 편히 졸곤 했다.
--- p.27 이게 무슨 일이야. 워크맨이라니. 새 워크맨이라니. 엄마가 쓰던 걸 물려받은 기존의 트랜지스터라디오는 국산 인켈 제품으로 안테나도 있고 가로 15센티미터, 세로 10센티미터쯤으로 크고 두껍고 무거웠다. 일련의 사고로 새로 득한 워크맨은 가로 10센티미터, 세로 7센티미터 정도로 작고 가볍고 얇은 최신형 오디오 기기였다. 그리고 내가 소유하게 된 최초의 외산 제품으로 무려 일제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이었다. CD 플레이어가 나오기 전까지 무려 7-8년 동안 나는 그 아이와(AIWA) 워크맨을 24시간 들고 다니며 애지중지했다. --- p.37 매일 대단한 오프닝 멘트나 코너 원고를 쓰고 싶다는 욕심도 자연스레 내려놓게 되었다. 근사한 단어 하나를 찾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보다는 선거 다음 날 “거리의 소란스러움이 잦아든 오랜만의 이 아침 적요가 반갑다”라든가 “전국이 장마권이란 예보에 챙겨 들고 나온 작은 우산 하나가 하루를 든든하게 만든다” 같은 소소한 말들로 마음을 다독이거나 어떤 순간을 상상하게 하는 일이 더 즐겁다. --- p.65 광고음악은 어떤 사람이 라디오 애청자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유독 라디오 광고로 유명한 CM 송을 안다면 뭐 더 말할 것도 없이 외칠 수 있다. “오! 라디오 좀 들으시는군요! 좋아요!” --- p.75 이후에도 지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영화 〈접속〉의 동현(한석규 역) 같은 PD가 너와 딱일 텐데”(정작 나는 ‘동현’ 캐릭터가 별로였는데), “〈봄날은 간다〉에서처럼 같이 일하고 헤어지기 전에 ‘(우리 집에서) 라면 먹을래요?’를 PD에게 시전해봐라”, “드라마 〈라디오 로맨스〉 보니 DJ와 연애해도 너무 좋을 것 같다. 너라고 못 할 이유가 있냐. PD 말고 DJ와 연애해라”를 비롯해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이 개봉했을 때는 “그 영화 보고 네 생각 나더라, 너도 방송으로 고백해라”까지 라디오를 소재로 한 로맨스물이 주목받을 때마다 나는 상대역도 없는 주인공으로 그 작품 속 역할에 불려 나가 라디오 종사자와 연애하고 결혼하라는 밑도 끝도 없는 강력한 조언에 시달려야 했다. --- pp.87-88 라디오 작가는 둘 중 하나다. 어디에 있든 무언가를 ‘들어야 하는 사람’이거나 일하지 않을 땐 ‘아무것도 듣지 않는 사람’. 우리 모두는 ‘들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연주회에 간 것처럼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를 귀 기울여서 감상하는 건 아니지만 ‘(라디오를) 켜두어야 안심하는 사람’인 것은 분명 했다. 직업병이라 해야 할까? 병이라 할 정도는 아니니 직업적 강박 정도가 맞겠다. 차에 타면 일단 라디오를 켜고, 채널을 맞췄다. 누군가의 집에서도 마찬가지. 라디오부터 켰다. --- p.94 나는 이 일을 사랑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나를 두고 한 선배는 “일을 너무 재미있어 하는 사람 특유의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다니면서, 이렇게 즐거운 일을 하는데 돈도 주다니 완전 너무 신나 그런 에너지를 막 뿜었지”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방송 일을 시작했을 때는 자라며 보고 들어온 바로 그 방송의 현장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고, 시간이 조금 지나 코너 원고를 쓰던 시기에는 사수의 원고 타박이 스트레스이긴 했으나 내가 쓴 글이 방송 전파를 타는 것이 놀라웠다. “누군가의 한숨처럼 쓸쓸한 바람이 불었던 하루였어요”라고 원고를 쓰면 그 원고가 DJ나 MC의 말이 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게 감동적이었다. --- p.119 우리에게 ‘위로’는 얼마나 간절하고, 또 의미가 큰 것일까. 누군가의 사연이나 DJ의 멘트, 청취자 채팅방 속의 대화가 내게만 건네는 말이 아닌 걸 알면서도 위로를 얻는다. 어느 시절 들었던 노래 역시 위안이 되어주기도 한다. 정확하게 내게 오는 위로가 없어서 허공에 떠도는 말을 가져와 나의 위로로 삼아야 했던 어느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누군가를 위로하고 응원하고 싶었다. --- p.156 |
20년 넘게 방송작가로 일해온 사람의 라디오 이야기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 아무튼 시리즈 일흔한 번째 주제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아온 매체 ‘라디오’다. CBS, KBS, TBS 등에서 방송작가로 일한 이애월 작가의 첫 산문집으로, 삶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큰 힘이 되어준 라디오와의 애틋한 기억과 유쾌한 사연 들을 담았다. “아무튼 영과 놀았던 5학년 그날, 내게는 나만의 라디오 세계가 열렸다. 5학년 어린이는 유리문을 열고 전축의 라디오를 스스로 켰다. 마음에 드는 채널과 프로그램을 찾아 주파수를 맞췄고, 이후 이어폰을 늘 귀에 꽂고 있는 청소년이 됐다. 그리고 대학생에서 사회초년생이 될 때까지도 라디오로 인해 크고 작은 해프닝들이 있었고, 그 덕분에 방송작가가 되었고, 라디오 프로그램의 원고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시네마 천국이 있다면 라디오 천국이라 불렀던 내 인생의 한때가 그렇게 시작됐다.” 다정함이라는 주파수에 실어 보내는 메시지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별밤’과 ‘밤의 디스크쇼’ 공개방송을 들으며 킥킥대던 라디오키즈 시절, ‘워크맨’을 24시간 몸에 장착하고 지낸 청소년기를 거쳐 그토록 동경하던 방송작가가 된 저자는 라디오 덕분에 행복했고 라디오 때문에 절망했던 순간들을 찬찬히 되돌아보며 하루 적정량의 다정한 말과 글, 음악이 주는 힘과 위로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라디오를 듣는다는 것은, 꾸준히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안부를 전하고 그 인사를 듣기 위해 주파수를 맞추는 행위는 일상적인 습관 같으면서도 관심이며 노력이고 결국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면에서 라디오는 “생의 본질적인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인간이란 존재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일지도 모른다. “타국의 커다란 집에 혼자 있으려니 무섭기도 하고, 무척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밤 12시가 넘은 시각에 어디론가 뛰쳐나갈 수도 없었고, 그 나라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인 친구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때 친구의 침대 벽에 내장된 콘트롤러가 눈에 들어왔다. 에어컨과 라디오의 전원을 켜고 끄고 조정하는 버튼 박스였다. 라디오를 켰다. 록과 팝 음악, 절반도 알아 듣지 못한 DJ의 멘트를 들으며 몇 번 돌아눕기를 반복하다 새벽 어느 시간 즈음 잠이 들었다.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를 듣는 게 슬픔과 불안을 진정시켜준다는 걸, 적어도 나는 거기에서 위로를 얻는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오직 라디오를 통해 꿈을 꾸었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자신의 쓸모와 가치를 발견했으며, 또 다른 희망을 품게 된 작가는 한없이 친애하는 이 작은 매체의 온기와 긍정이 세상 모든 이에게 전파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혼자 밥 먹다 혀를 깨물었는데 눈물 나게 아플 때, 침대 정돈하다가 모서리에 정강이나 발가락을 세게 찧었을 때, 방금 한 요리가 너무 맛있는데 나 혼자뿐일 때, 정말 먹고 싶었던 음식을 달려가 먹었는데 맛이 없을 때, 남들 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나는 늘 속이 허전하고 헛헛할 때, 오래된 연인이나 친구, 부부 관계가 전과 같지 않을 때, 다 행복한데 나만 행복하지 않은 것 같을 때, 그럴 때 겨우 혼잣말로나 할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라디오는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쟤가 그때 그런 헛말을 했지’ 소문내지 않고, 뒷말하지 않고 들어줄 곳은 라디오뿐이니까.” 달리는 자동차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마음을 포개본 적 있다면, 오래 전 어느 늦은 밤 영화음악을 들려주던 이제는 세상에 없는 아나운서의 차분한 목소리로 하루를 마무리해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저자의 교신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2시의 데이트’처럼 반갑고 ‘별이 빛나는 밤’의 산책처럼 포근한,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다정한 메시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