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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말 | 김초엽(소설가), 하지은(소설가)
우리는 마른 꽃잎과도 같다 황금 천국의 증언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 왕관에 불붙이는 자 쥬벵 씨의 완벽하지 못한 하루 피가 시가 되지 않도록 해설 | 전청림(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
Baek Sa-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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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감긴다.
--- p.13 「첫 문장」 중에서 아, 징그럽다. 징그러워 죽겠다. 얀은 자조한다. 사랑이라는 게 정말 징그러워서 미칠 것만 같다. 어딘가에서는 억 단위의 돈을 벌 수 있는 사랑이 있는데, 어딘가에서는 한 푼어치 값어치도 되지 못해 우주의 먼지와 함께 뒤섞이게 될 사랑이 존재한다는 게 참을 수 없이 역겨워진다. 하지만 결국 얀도 그 징그럽고 값어치 없는 짓을, 매 순간 하고 있었다. 유리를 들춰내면 곧장 바스러져 없어질 말린 압화를 만드는 것과 같은 짓을. --- pp.78-79 「우리는 모두 마른 꽃잎과 같다」 중에서 우주 도박의 시작을 알려면 조금 앞으로 거슬러야 한다. 역사적인 그날, 개척단은 지구의 귀한 자원과 함께 인류의 무궁한 미래를 기약하며 우주 구석구석에 있는 불모지 행성으로 떠났다. 개척단의 목적은 영광스러운 인류의 테라포밍이었다. 그리고 150년이 조금 안 될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2131년, 지구는 테라포밍에 성공한 개척단의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우호적인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지구와는 이 이상 교류하지 않겠다.’ 개척단은 단호히 선언했다. 이유는 지구의 신분제였다. 개척단은 초재벌을 중심으로 편성된 계급이 국제 기준으로 자리 잡은 지구 사회에 반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재산의 규모에 따라 정해지는 신분의 틀을 거부한 개척단은 지구의 연락을 끊었다. 외지구에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든 그들은 지구의 연락을 지속적으로 무시했다. --- pp.17-18 「우리는 모두 마른 꽃잎과 같다」 중에서 조금 더 좋은 걸 주고 싶었는데, 미안. 너는 소녀가 로켓을 열어보기도 전에 사과한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흘기던 소녀가, 로켓을 열고는 깜짝 놀란 듯 차가운 공기를 힘껏 들이마신다. 로켓을 손안에 꼭 쥔 채, 너를 와락 끌어안는다. 입고 있던 두툼한 인조 털옷에 기꺼운 무게감이 실린다. 소녀는 이걸 어떻게 구했는지, 얼마에 구했는지 묻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영원히, 죽을 때까지 가지고 다닐게. 그래야지. 너는 진지해지지 못하고 농담처럼 대꾸하고 만다. 간질거리는 기분에 끝도 없이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아 그랬던 탓도 있지만, 소녀가 네 선물에 부담을 가지지 않았으면, 그냥 압화 그 자체로 즐겨줬으면 했다. 꼭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어 --- pp.28-29 「우리는 모두 마른 꽃잎과 같다」 중에서 지금도 생각해요. 그때 말문이 막히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사람을 드시겠다고요, 라는 말을 입 밖으로 기어이 내뱉었다면, 무사히 해고당해 시즈의 만찬이 벌어지기 전 그 행성에서 쫓겨날 수 있었을까? 그날 벌어진 그 사건에 말려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 p.135 「황금 천국의 증언」 중에서 “하지만 저는 여전히 천국에 가고 싶어요, 말리 님. 저흰 가야만 하고, 갈 거예요. 저희를 위한 천국이 없다면, 조잡하게 짓는 한이 있더라도 가고 말 거예요. 아무리 저희가 하찮다고 해도, 이 우주가 그만한 공간 정도는 선심 써서 내어주리라 믿어요….” --- p.133 「황금 천국의 증언」 중에서 다음 날, 너는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사활을 다해 너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휴머노이드를 붙잡고 도와달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기잉, 소리만 내며 커다란 외눈만 데룩데룩 굴릴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공황 상태에 빠진 나는 탑의 나선형 계단이 조립되는 소리를 들었다. 무덤지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가 때마침 나타났는지 짐작할 새도 없이, 나는 그에게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아기가, 아기가, 없어졌어요. 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기는 지금 재배양되고 있어요. “매뉴얼을 어기셨잖아요.” “매뉴얼? 아이를 돌보지 않으려던 게 아니었어요. 하필 그때 너무 피곤해서… 다신 어기지 않을게요, 그러니….” “진정해요. 매뉴얼을 어겨도 당신이 받는 불이익은 없으니까.” “아기는요?” “재배양하고 있어요, 아까 말했다시피.” “어째서요? 복제 과정에서 실수라도 있었나요? 설령 있다 한들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긴데,” “폐기 처분됐어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 p.168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 중에서 영주의 아름다운 반려가 되어 우주의 모든 것을 누리게 되면, 나와 함께했던 시간은 별 볼 일 없는 것이 되어버릴까? 동화의 마지막 구절,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네 인생을 단단히 뒷받침해 줄 수 있을까? 영주의 사랑은 얼마나 지속될까? --- p.195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 중에서 인사, 이만치 살아오고 나서야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어. 그러니 더는 죽듯이 살지 않을 거야. 살아가듯 죽을게. --- p.208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 중에서 “나는 ‘우리의 시대’라는 표현을 선호하지 않아. 시대는 언젠가 저물기 마련이니까.” “그런 회의적인 상식은 깨부수라고 있는 거다, 1호. ‘나’는 겁 없이 상식을 깨부숴 왔기에 종래에 왕관을 얻었지.” “여덟 개의 왕관들을.” “그래, 왕관이 지금 여덟 개나 되지. 영지 밖에서는 어느 누가 어떤 다른 왕관을 썼을지 또 모를 일이고. 그 존재 의의에 비해서 수가 너무 많긴 해.” (…) “너무 많아.” --- pp.242-243 「왕관에 불붙이는 자」 중에서 “두려워하라, 진실이 허상이라는 것을. 두려워 말라, 허상이 진실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많은 허상을 진실로 만들어 왔어.” --- p.259 「왕관에 불붙이는 자」 중에서 쥬벵 씨는 납작 엎드려 오열하고 싶다는 충동을 겨우 이겨내고 난장판인 바닥의 화장품들 사이에서 뾰루지용 연고를 집어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튜브에 들어 있던 연고가 납작 말라붙어 있었다! 쥬벵 씨는 어떻게든 뿌연 회색 크림을 짜내려고 했지만, 연고는 뾰루지의 고점을 살짝 덮을 만큼만 나왔다. 쥬벵 씨는 충격적인 사실을 맞닥뜨려야만 했다. 뾰루지는, 곪아버릴 것이다. 그리고 꼴 보기 싫은 흉을 남길 것이다! 여기엔 피부 관리 전문의도 없는데! --- p.290 「쥬벵 씨의 완벽하지 못한 하루」 중에서 인간의 의식을 가진 모든 존재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돕는 것. 그게 아시라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숙명이었다. 아시라의 사명감은 더 뚜렷해졌다. 전쟁에서 승리해야 했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부당하게 빼앗긴 이들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영주들이 저지른 온갖 폭력의 잔재가 바로 정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 p.394 「피가 시가 되지 않도록」 중에서 “먹기 위해 이걸 해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것이 느낄 고통에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껴. 그게 먹는 자가 져야 할 책임이야.” “내가 먹지 않는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여기서 사냥을 하지 않으면 뭘 먹을 건데? 무언가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이상, 이 책임은 선택이 아닌 의무야.” “….” 나는 아시라가 시키는 대로 했다. 단도가 동물의 목을 꿰뚫는 감각이 손끝에서 손바닥을 지나 곧 온몸으로 퍼졌다. 어마어마한 스트레스가 몰려와서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피를 손에 묻히면서 얻은 보상은 영상에서 봤던 것처럼 아름답지도 매혹적이지도 않았다. 이 행위는 값어치 있는 보상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냥은 그냥 사냥이고, 피는 그냥 피였다. --- p.378 「피가 시가 되지 않도록」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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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해진 권력에 가려진 우주 속, 서로를 발견한 꽃잎들은 어떻게 죽어가는가
친숙함과 새로움을 훌륭히 버무려 만든 세계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서 있는 세계 먼 미래, 극단으로 치달은 자본주의로 인해 지구의 재벌들은 영주라는 계급으로 불리게 됐다. 국가의 개념은 사라지고 지구는 각 영주의 소유지로 나뉘었다. 영주의 천문학적인 자본을 투자한 과학기술은 범인의 이해를 초월할 정도로 신비로워 마법처럼 보일 때도 있다. 신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한 영주들은 인간을 인위적으로 개조하거나 진화시키며 절대적인 권력을 향유한다. 그들의 욕망은 지구 밖으로 뻗친다. 막대한 영주의 투자금으로 우주 행성 이곳저곳에 파견된 개척단은 2131년, 테라포밍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와 함께 외지구에서 그들만의 문명을 세운 개척단원들은 영주가 군림하는 지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분노한 영주들은 외지구에 정착한 개척단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다. 연작소설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는 이 우주 전쟁의 발단에서 결말까지를 여섯 편의 중단편을 통해 치밀하게 그려낸다. 한때 같은 종족이었던 외지구인을 배척하고 차별하며 영주들은 용병을 모집해 우주로 보낸다. 지구에 남은 인간들은 영주가 편집한 정보만을 접하며 올림픽처럼 중계되는 우주 전쟁의 승패에만 몰두한다. 전쟁의 비인간성이 흐려진 세계에서 가지지 못한 자는 모두 가진 자의 탐욕을 위한 제물이 된다. 그리고 이 거대한 권력이 보지 못한 그림자 속에서, 서로를 발견한 마른 꽃잎 같은 인물들이 각자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소멸해 간다. 그 “눈부신 선명함”(408쪽)에는 지금 이 세계를 바라보는 젊은 작가 백사혜의 직관이 오롯이 녹아 있다. “이 작품의 어떤 인물도 자신이 선택한 결과의 무게를 온전히 감내한다. 쉽게 그들을 동정하거나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만드는 이런 엄정한 태도야말로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_하지은(소설가, 「추천의 말」 중에서) 어떻게 누군가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세계를 바꿀 결심을 하는가 마지막까지 미래를 바라보려는 작가, 백사혜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는 2024년 12월 초고가 완성되었고 2025년 4월 개작을 마쳤다. 대한민국의 사회 질서가 무너졌다가 다시 구축되는 시기에 묶인 이 도서에는 거대 권력에 의해 지배되던 우주가 전쟁과 반란을 겪으며 해체되고 다시 통합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백사혜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라는 사실을 땔감 삼아 자신의 생을 불태운다. 발로 땅을 디딘 자들이 생명을 진정으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존중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자기 생의 한계를 가늠할 수 있어야지만 다른 존재의 고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런 그들은 세계의 구성원인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우고자 한다. 전청림 문학평론가는 「해설」에서 “이 짙은 사랑의 농도가 소설을 움직이는 가장 강렬한 맥박이다”라고 평했다. “자신이 속한 세계마저도 무너뜨리는 결심으로 응결되는 사랑은 이 소설집 내내 주된 서사적 메타포로 등장”(414쪽)하며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과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선명하고 손에 닿을 듯 구체적인” 우주를 차곡차곡 쌓은 세계 속에 “항상 끔찍하고 극히 드물게 반짝이는 다면체로 설득력 있게 조형”한(김초엽) 인간을 촘촘하게 배치한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는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할 것이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 작가의 글은 단순하다. 화려한 사변 없이 단어를 쏟고, 길지 않은 지점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그러고는 많은 사람을 홀린다. 직관을 찌를 줄 안다는 소리다. 곧장 본론에 진입해 핵심을 들추는 명석함. 곧은 호흡으로 전진해 저릿하게 마음을 만지는 언어. 백사혜의 소설에서 당신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토록 눈부신 선명함이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안다. 코가 긴 인형이 나오는 동화, 다리가 물고기인 여인의 노래, 주석잔 안에서 찰랑거리는 신화 속 달콤한 포도주,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로맨스. 기괴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원초적 욕망에 마음이 동해버린 주인공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매력으로 세상에 응한다. 물론 고난도 있다. 브로치에 달린 옷핀으로 눈을 찌르거나 귓구멍에 뜨거운 양초를 부어버리고, 가죽 샌들을 신은 발목의 인대가 끊어지기도 한다. 찢어진 옷, 조각난 뼈. 살점이 파이고 번민에 잠긴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들의 명성은 다음과 같은 의의를 도출해 냈다. 한 인간의 사연은 자연의 냉정함과 은총의 강인함을 종합해 보편적인 탐구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숙적과 맞서고 애인에게 깊이 반하는 영웅. 깡통을 두른 채 성벽에 돌진하는 바보. 삶의 모양은 다르지만 이들은 각자의 나름으로 긴 서사시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뿐인가. 우리는 때로 부랑자, 악인, 약골의 사연까지 시간을 들여 열심히 읽곤 한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의 ‘너그러움’이라는 본질을 보여준다. 각자의 삶의 빛줄기를 따르는 인물들에게 비교우위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력히 드러내고, 운명에 적응하는 한 인물의 긴 역사가 두루마리처럼 펼쳐질 때 삶의 우위와 경중을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이야기 앞에서, 인물들은 각자 자기의 필연을 짊어지고 수수께끼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세월에 스러지는 삶의 연약함에 헌신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이 책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은 금세 말라버리는 잎처럼 짤막한 순간을 살아갈 뿐인 운명의 무자비한 폭력성에 주목한다. 단 하나의 삶, 한 번뿐인 숨. 모두에게 다르게 주어진 운명, 불가피한 불평등을 짊고 살아갈 뿐인 생명의 자연스러움에 대해 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이 소설집은 너그러움의 신화를 새로 쓴다. 그것도 필승이 예감되는 전략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혼자 하는 카드놀이인 솔리테어(Solitaire)가 킹과 퀸과 잭을 순서대로 반듯하게 나열하듯, 이 소설집은 적재적소에 연작의 이야기를 정밀하게 배치하며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함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가르강튀아를 닮은 그로테스크함과 그림 형제의 동화를 닮은 잔인한 창조성으로. 거대한 사회실험을 보는 것 같은 정밀함과 지치지 않는 꿋꿋함으로.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갈 줄 아는 용맹함으로 말이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창조적 전략으로 무장한 이 소설집이 마침내 고취하는 신화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 알고 있던 것을 보는 듯한 친숙함과 새로운 것을 보는 참신함으로 독자들을 매혹시킨 이 소설집은 「쥬벵 씨의 완벽하지 못한 하루」에서 이야기를 쓰는 작가적 의식까지도 함께 등장시킨다. 문자와 책이 소멸한 시대, ‘쥬벵’ 씨는 기계 의수 ‘줄리’로 손을 갈아 끼우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만년필을 쥐고 종이에 잉크를 바르는 일. 이 단순한 노동의 숭고함은 이렇게 표현된다. “‘입력된 순간부터 수정할 수 없어지는’ 글자에는 힘이 있어요. 부동성이 가지는 힘이죠. 그들은 글을 입력하는 행위를 ‘입력하다’나 ‘두드리다’가 아닌, ‘쓰다’라고 표현했죠.”(301쪽) 그리고 이런 문장도 등장한다. “글은 인류를 스친 시간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한다. 그렇기에 진정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글에 사고를 지배당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사고를 하기 위해 글을 지배할 줄 알아야 한다.”(295쪽) 매력적인 이야기의 환희와 실감을 아는 이 문장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듣는 문자에서부터 번역 불가능한 언어에 이르기까지, 모든 소통의 감각이 주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실상 까막눈에 불과했던 쥬벵 씨의 베껴 쓰기는 그 행위의 의미를 아는 ‘카할’의 천연덕스러움과 만나 신성한 이야기의 구체성으로 격상된다. 그러고 보면, 어떤 순간에도 이야기의 절대성을 잃지 않는 백사혜의 소설은 누구보다 ‘쓰다’의 실천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난 ‘진짜’의 이야기를 가져갈 거예요”(66쪽)라는 문장이나, “남은 건 이야기밖에 없잖아요”(185쪽)라는 표현이 소설 속에서 불쑥 솟아오를 때 멈칫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문장에 맥락을 초과하는 의미가 덧보였기 때문이다. 띄어쓰기와 붙여쓰기의 패턴, 의미와 소용의 놀이 속에서 작가는 무엇보다 쓰고 읽히는 감각을 의식하며 보편성이라는 이야기의 혁혁한 힘을 거머쥐려던 게 아니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 소설집은 그 헌신을 자랑해도 될 만큼 장인적이다. 그리고 나는 시간을 들여 이 소설집을 읽는 당신이 클라우드에 떠다니는 가상의 데이터 조각이 아니라 쓰이는 글의 아름다움을 아는 독자일 것이라 (거의) 확신한다. 당신이 책을 펼쳐 “많이, 많이, 많이 읽”고, “읽고, 읽고, 또 읽기”(295쪽)를 멈추지 않기를, 그리고 그 글자가 두드려진 압력이나 낭창한 타건 소리가 아니라 ‘쓰다’의 진실된 의미를 찾아내기를 기대한다. 읽은 이야기, 관찰된 이야기, 그리고 다시 쓰는 이야기. 그래서 결국엔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종이에 새겨진 글자의 힘을 감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야기를 다시 쓰는 굶주린 지배자가 된다. 당신이 진정 의미 있는 삶을 경험하는 것은 바로 이 책장을 덮은 뒤부터일지도 모른다. _전청림(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Nothing ever ends poetically. It ends and we turn it into poetry. All that blood was never once beautiful. It was just red.” (시적으로 끝나는 것은 없다. 다만 끝맺고, 우리가 끝맺이를 시로 바꿀 뿐. 피가 아름다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붉기만 했었다.) 인터넷을 떠돌다가 보게 된 Kait Rokowski 님의 문장이 이 연작소설의 뿌리입니다. 지금도 종종 이 문장을 노래 가사처럼 되뇌곤 합니다. 앞으로도 그러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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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혜가 그려내는 우주는 잔혹동화처럼 선명하고 손에 닿을 듯 구체적이다. 한 우주의 확장과 뒤틀림과 몰락, 그 우주 속 개인들의 삶이 차갑고도 서정적인 문장으로 펼쳐진다. 몸서리쳐질 만큼 섬뜩하지만, 강력한 몰입감에 눈 뗄 틈 없이 끌려 들어가고 만다. 백사혜는 인간을 거의 항상 끔찍하고 극히 드물게 반짝이는 다면체로 설득력 있게 조형해 낸다.
우주가 지배 계급의 게임판으로 변해버린 세계에서 어떤 이들은 생명을 부지하려고 서슴없이 손에 피를 묻히고, 영주들은 신이 되고자 온갖 기이하고 추악한 기행을 더해간다. 작은 개인들은 메마른 압화처럼 바짝 짓눌려 있다. 하지만 눌린 손아귀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마지막 순간에도 놓지 않은 갈망이 있다. 총과 칼로 살아가기를 포기했기에 기억된 이들이 잔향처럼 남아 묻는다. 이토록 비참한 세계에서도 왜 어떤 존재들은 끝까지 빛을 안고 죽는가. - 김초엽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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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인간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때로는 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때로는 무정한 암흑을 닮은 공포를 떠올리곤 했다. 인간의 내면을 닮은 그 광대한 우주 안에는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한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다.
백사혜 작가의 연작 소설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는 자신만의 궤적을 그리는 여러 인물이 모여 마치 별자리를 이루는 듯한 이야기다. 작중 시점인 머나먼 미래에서 우리는 지금보다 한층 진일보한 인류를 만나게 되지만, 자신의 욕망에 한없이 충실한 그들은 여전히 너무나 ‘인간적’이다. 문명이 아무리 진보한들 인류가 가진 근원적인 갈등에서는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철저한 계급사회 속에서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SF적 외피를 입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인간의 내면을 다룬 서사에 가깝다. 이러한 광막한 우주를 배경으로 우리가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둘이 본질적으로 서로를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끝을 알 수 없고 우리의 이해를 아득히 넘어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게 된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인 건 각 장의 어떤 인물도 타성에 젖어 있거나 자신의 선택에 대해 변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자신이 선택한 결과의 무게를 온전히 감내한다. 쉽게 그들을 동정하거나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만드는 이러한 엄정한 태도야말로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자 이야기에 힘을 부여하는 요소라 하겠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제목처럼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우주의 어느 단면에 아름다운 이야기가 떠돌고 있을 거라 상상하게 된다. 그걸 발견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기꺼운 마음으로 작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 - 하지은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