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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사랑시인선

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

1부 모든 시간이


가을 국화
가을 민들레
가을 오란 비
나팔꽃
노을 지는 시간
눈꽃 시드는 날
모든 시간이
마른 꽃
변암
소리가 사라진 동네
이별의 봄날
장대비
시조 사랑
첫 매미
해가 지다

2부 나와 같은


나의 계절
거기 그 자리
나와 같은
누가 이름 붙였을까?
따뜻한 하늘
맨발의 자갈밭
마음에 파스 붙이기
상처가
지인의 창
실수해도 괜찮아
어디로 가나
울지 않는 밤
잠 못 드는 겨울밤
정말 예쁘다
추억의 밥상

3부 마음으로


1월의 뜻
구덩이
그대와
기대하지 않아야
각림사 빈터에는
고시래
너 거기 있었구나
노을이 미쳤다
설레게 해
뒷 산길 버섯
비가 오려나
마음으로
바다에 파도가 치면
돌아보아요
사랑하는 것들을 잊는다는 것

4부 그림을 그려


그림을 그려
물에 비친 가을
꽃이었던 이유
봄철 은하수
불멸의 나무
빗소리
붉은 바다
불쏘시개
사랑의 길
봄바람
사막에 꽃이 피어라
잠자리 날개
좋아라
항아리
하루의 값

5부 열어 젖히다


누운 향나무
계절 서랍
내가 있는 시간
뜨개질
첫울음
뻐꾸기 울음
오늘 한 알의 씨앗을 심었다
매직 아워
만수국
열어젖히다
운곡 선생님을 그리며
작은 돌부리
아침 인사
죽어야 사는 향기
해가 뜨는 아침

해설: ‘나’를 열어 타자와 세계로 향하는 감정의 확장

저자 소개 1

《시조사랑》(2020) 시조 등단 시조집 『나는 나를 열어』『봄 왈츠 골목길에 음표 하나』 『도래샘』 『구름의 산책』 공저 전국운곡백일장 수상 원주여성문학인회, 한국시조협회 원주지부 회원 원주문인협회 사무차장 E-mail : hinbong@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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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5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40쪽 | 130*210*20mm
ISBN13
9791191201857

출판사 리뷰

허인봉의 첫 시조집 『나는 나를 열어』는 오늘날 시조문학의 또 다른 가능성을 조용하지만 힘 있게 제시한 작품집이다. 이 시집은 정형시조의 틀 안에서 개인적 서정과 현대적 감수성을 진솔하게 울려내며, ‘정직한 감정의 언어’로 독자와 깊은 공명을 이끌어낸다.

표제에서 드러나듯, 『나는 나를 열어』는 단순한 자아 고백을 넘어, 내면의 풍경을 타인과 나누고 감정의 파장을 먼 곳까지 퍼뜨리는 일련의 시적 여정이다. 여기서 ‘나를 연다’는 것은 폐쇄적인 자아로부터 벗어나, ‘너’를 향해 나아가는 다리 놓기이다. 이러한 ‘감정의 다리’는 단지 개인적인 사유에 그치지 않고, 고전과 현대, 나와 너, 개인과 공동체를 잇는 징검다리로 기능한다.

이 시조집의 형식적 특징 또한 주목할 만하다. 허인봉은 시조의 정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그것을 시대 감각에 맞게 갱신하고 확장해간다. 「뜨개질」, 「계절 서랍」, 「해가 지다」 등의 시조는 그 대표적인 예로, 전통적 리듬감 안에 현대인의 정서, 특히 도시적 고독이나 가족과의 정서적 거리감 등을 섬세하게 새겨 넣는다. 이를 통해 그는 시조를 ‘박제된 유산’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형식’으로 재해석하며, 시조 문학의 미래적 진화를 모색한다.

허인봉 시의 또 하나의 미학적 강점은 공감적 서정에 있다. 그의 시어는 격렬하거나 과장되지 않다. 오히려 담백한 언어로 독자의 기억을 조용히 두드리며, 잊히고 있던 감정을 다시 불러낸다. 그러한 점에서 이 시집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독자의 내면을 비추고 울리는 ‘감응’의 책이 된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독자는 질문을 품게 된다. “나는 나를 열 수 있는가?”, “나는 너를 부를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곧 시조가 던지는 존재론적 사유이며, 이 시집이 독자에게 남기는 가장 깊은 울림이기도 하다.

요컨대, 허인봉의 『나는 나를 열어』는 시조 문학의 정형성과 감성의 진실성 사이에서, 섬세한 균형을 잡으며 자신만의 언어를 형성해낸 첫 걸음이다. 향후 이 시인이 어떤 시적 지형을 확장해나갈지 기대가 모아지며, 그의 시조가 우리 시단에 새로운 ‘울림의 공간’을 만들어가길 바란다.

‘나’를 열어 타자와 세계로 향하는 감정의 확장-허인봉 시조집 『나는 나를 열어』에 나타난 정서적 순례의 시학

1. 들어가며: “나를 여는 시, 세계를 여는 감각”

시인은 언제나 자기 존재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이들이다. 허인봉 시조집 『나는 나를 열어』는 그 제목부터가 이 같은 시적 태도의 근간을 천명하고 있다. ‘열다’라는 행위는 단순한 개방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의 응답이자, 바깥 세계와의 접속을 위한 의식적인 시도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열어』는 단지 시인의 개인적 감정이나 사소한 일상에 대한 사유를 담은 시조집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경유해 ‘너’에게, 더 나아가 ‘우리’에게 이르는 시적 감각의 확장을 모색한 시편들의 총합이며, 동시에 시조의 정형성과 현대 감수성의 접점을 탐구하는 예민한 실험의 현장이기도 하다.

‘나를 연다’는 것은 곧 감정의 문을 여는 일이다. 그러나 허인봉의 시조는 감정을 아무렇게나 흘려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은 절제와 정제의 미학을 바탕으로, 감정을 사물과 계절의 형상 속에 은근히 묻어둔다. 이는 시조라는 형식이 본래 지닌 응축의 미학과 맞닿아 있으며, 허인봉은 그 전통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동시대의 언어와 정서를 능란하게 끌어들인다. 시인의 내면을 여는 방식은 격정적 토로가 아니라 조용한 속삭임이며, 그 속삭임은 독자로 하여금 천천히 귀를 기울이게 한다. 그의 시조는 일종의 ‘낮은 소리의 시학’이라 부를 만하다.

허인봉의 시조집 『나는 나를 열어』는 총 5부, 즉 1부 모든 시간이, 2부 나와 같은, 3부 마음으로, 4부 그림을 그려, 5부 열어 젖히다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는 단지 주제의 구분이 아니라, 시인이 지나온 시간과 감정의 국면, 그리고 존재의 내면 여정을 다섯 개의 굴곡 속에 나누어 펼쳐 놓은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1부에서는 유년과 고향, 시간의 흐름 속에 묻힌 기억과 회한이 중심을 이루며, 2부에서는 타자와의 정서적 교감과 감정의 투사를 통해 ‘나와 같은 존재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담아낸다. 3부 마음으로는 감정의 층위를 넘어서 내면의 단단함과 정신의 윤리를 모색하는 시적 사유의 단계이며, 4부 그림을 그려에서는 감정의 형상화와 시적 이미지의 창조가 두드러진다. 마지막 5부 열어 젖히다는 시인이 스스로를 완전히 열고 타자에게 다가가는, 시적 실천의 결실이자 존재적 발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구성은 독자에게 하나의 일관된 감정 드라마를 읽는 듯한 연속성을 제공하며, 시인의 세계를 파편화가 아닌 서사적 흐름으로 체험하게 한다. 특히 각각의 부는 시적 주제나 정조뿐 아니라 시간의 흐름, 감정의 변화, 사유의 깊이를 따라 배치되어 있어, 시집 전체는 하나의 ‘정서적 순례’로 읽힌다. 허인봉은 시조라는 고전적 형식 안에서 현대인의 감정을 다섯 겹의 여정으로 풀어내며, 감정의 미묘한 결을 형식적으로 질서화해낸다.

『나는 나를 열어』에서 발견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감정의 ‘풍경화’다. 허인봉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계절의 변화나 자연 사물에 감정을 투사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이를 통해 시인은 감정의 미세한 결을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으며, 독자 또한 자신의 경험과 감각을 시조의 상징적 구조 안에서 중첩시킬 수 있다. 예컨대 「가을 국화」라는 시조에서 시인은 국화를 단지 ‘가을 꽃’이 아닌 ‘단발머리 친구’로 의인화한다. 이 친구는 ‘따라쟁이 동무들’처럼 함께 시들어가는 존재로 묘사되며, 이는 단순한 계절의 풍경을 넘어 인간관계의 온기와 상실감까지 아우르는 시적 장면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방식은 감정과 세계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작동하도록 만들며, 결국 ‘나를 여는 일’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확장되는 미학적 장치를 마련해준다.

이러한 감성적 확장은 시조라는 고전 양식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시조는 본래 삼장 구조와 정해진 리듬, 그리고 종장에서의 전환이나 결말이 두드러지는 장르다. 허인봉은 이 정형적 틀 안에서 실험적인 내용과 이미지, 그리고 현대적 감수성을 집약적으로 담아낸다. 특히 그의 시조에서 종장은 감정의 응축이자 폭발의 지점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모든 시간이」라는 시조에서는 초장과 중장에서 삶의 덧없음을 노래한 뒤, 종장에서 “눈시울 젖게 하는 순간”이라는 강렬한 정서를 간결한 구로 응축한다. 이러한 시적 절제는 감정의 과잉을 경계하면서도,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시인의 언어는 감정의 질감뿐 아니라, 시간의 흐름까지도 포착해낸다. 허인봉의 시조는 ‘찰나의 시학’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의 시조 안에서 멈춰진 시간, 혹은 사라진 순간의 흔적을 마주하게 된다. 「눈꽃 시드는 날」이나 「노을 지는 시간」, 「첫 매미」 같은 작품들이 모두 이러한 시간 감각을 지닌 시편들이다. 그 시조들은 단지 계절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 속에 잠긴 기억과 감정의 이면을 조심스레 들춰낸다. 이로써 독자는 시인이 감각한 한순간의 결을 공유하게 되며, 그 속에서 스스로의 감정을 반추하는 기회를 얻는다.

『나는 나를 열어』는 또한 시인이 ‘너’에게 말을 거는 방식에서도 독특한 미학을 형성한다. 시조집 속 ‘나’는 결코 자기 완결적인 자아가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타자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며, 자신의 내면을 열어 보임으로써 타자의 감정까지도 포용하고자 한다. 이는 「너에게 닿는 길」이라는 부제에서 명확히 드러나며, 시인의 언어는 결국 독자에게 닿기 위한 통로, 즉 시적 감정의 교환 수단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태도는 감정의 ‘소통 가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시인이 감정을 독점하지 않고 공유하려는 윤리적 자세를 보여준다.

이처럼 『나는 나를 열어』는 감정의 조형, 시간의 시각화, 그리고 타자와의 접속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읽어낼 수 있다. 허인봉은 이 모든 것을 고전 시조의 틀 안에서 구현해내며, 그로써 전통과 현대, 개인과 타자, 감정과 이성이 교차하는 복합적 시공을 창출한다. 이러한 시도의 결과로서 이 시조집은 단순한 감성의 산문이 아닌, 정서적 통찰과 미학적 구성력이 두루 갖추어진 ‘정제된 서정’으로 읽히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의 출발점이 바로 시인의 고백, “나는 나를 열어”라는 선언인 것이다. 이 선언은 독자에게도 어떤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열고 있는가, 아니면 닫혀 있는 채로 살아가는가. 허인봉의 시조는 이 질문을 조용히 건네며,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그저 생각할 수 있도록 여백을 남긴다. 그 여백이야말로, 이 시조집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2. 꽃과 시간, 감정의 풍경화: 주제와 상징 분석

허인봉 시조의 핵심적인 미학은 ‘감정의 풍경화’에 있다. 그는 자기 내부의 감정을 자연물과 시간, 계절의 형상을 빌려 외화하는 데 천착하는 시인이다. 허인봉에게 감정은 명시적 언어가 아니라 풍경을 통해 드러나는 은밀한 진동이며, 이 진동은 꽃, 하늘, 빛, 구름, 비 등의 이미지로 변환되어 독자의 감각을 깨운다. 이는 일종의 ‘감각적 상관물’로서, 구체적 사물이 내면의 정서를 대신 표현하도록 하는 장치다. T.S. 엘리엇이 말한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의 현대적 변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가을꽃 흐드러져/ 두둑에 올망졸망
참새들 노랫가락/ 노랗게 익어갈 때
나뭇잎/ 단풍색 맞을 준비하려 분주해

장마가 맑게 걷힌/ 차분한 가을 하늘
하얀빛 조개구름/ 속내를 감추어도
우물 속/ 구렁텅이에 곱게 비친 닮은 꼴

발치에 툭, 튕그려/ 귀띔하듯 놀란 꽃
쪼그려 앉아 있다/ 눈물이 떨어진 곳
이날이/ 스러져 갈 때 어찌해서 피었나!

계절은 잊고 있는/ 너와 나 스치는 날
아프고 불쌍한 맘/ 만지작 쓰다듬고
읊조려/ 너도 나처럼 헷갈려서 왔구나
-「가을 민들레」

가장 상징적인 예는 「가을 민들레」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민들레 한 송이를 중심으로 계절과 감정, 인간의 존재 상태까지 아우르는 복합적 상징 체계를 구축한다. 첫째 수는 민들레가 핀 공간적 풍경을 묘사하며 시작된다. “가을꽃 흐드러져/ 두둑에 올망졸망 / 참새들 노랫가락/ 노랗게 익어갈 때 / 나뭇잎/ 단풍색 맞을 준비하려 분주해.” 이 부분은 단순한 가을 묘사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시적 화자의 감정이 사물에 투영된 결과다. ‘두둑에 올망졸망’ 피어난 꽃은 그 자체로 소외되고 낮은 자리에 존재하는 존재를 상징하며, 이는 시인이 주목하는 ‘변두리 정서’를 보여준다.

둘째 수에 들어서면 감정이 조금 더 구체화된다. “우물 속 구렁텅이에/ 곱게 비친 닮은 꼴 / 발치에 툭, 튕그려/ 귀띔하듯 놀란 꽃 / 쪼그려 앉아 있다/ 눈물이 떨어진 곳.” 여기에서 ‘우물 속 구렁텅이’는 내면의 심연을 상징하며, 그 안에 비친 ‘닮은 꼴’은 자기 성찰의 결과물이다. 시인은 민들레를 마주하며 ‘쪼그려 앉아 있다 눈물이 떨어진’ 자신의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사물은 거울처럼 작동하며, 감정은 이입의 과정을 거쳐 이미지로 전환된다.

셋째 수와 넷째 수는 그 이미지의 절정을 이룬다. “이날이 스러져 갈 때 어찌해서 피었나! // 계절은 잊고 있는 너와 나 스치는 날 / 아프고 불쌍한 맘 만지작 쓰다듬고 / 읊조린/ 너도 나처럼 헷갈려서 왔구나.” 시든 민들레는 시간의 불가역성을 상징하며, ‘계절은 잊고 있는 너와 나’는 그 속에서 갈피를 잃은 인간의 실존을 표현한다. 이 구절은 단지 계절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덧없음과 상처, 그리고 연민의 감정까지 아우른다. 민들레는 더 이상 자연의 꽃이 아니라 시인의 자아이자 독자의 내면이 된다?.

나팔꽃 잎사귀가 빗물에 펄럭인다
무더위 꾹꾹 눌러
피워낸 사바의 꽃
칠팔월 뜬 시간 새에 하품하며 조로롱
-「나팔꽃」 부분(첫째 수)

비슷한 방식으로 「나팔꽃」 또한 감정과 계절, 존재론이 융합된 시이다. “나팔꽃 잎사귀가 빗물에 펄럭인다 / 무더위 꾹꾹 눌러 / 피워낸 사바의 꽃 / 칠팔월 뜬 시간 새에 하품하며 조로롱.” 이 시조에서는 무더위를 견디며 핀 꽃을 통해 인내와 생의 고통을 암시한다. ‘사바의 꽃’이라는 표현은 불교적 상징을 담고 있으며, 현실 세계의 고통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움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나팔꽃은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는 속성으로 말미암아, 순간성과 생의 허무를 담아내는 데 적절한 상징이 된다. 나팔꽃이 하품하며 ‘조로롱’ 지는 순간은 곧 삶의 유한성과 찰나적 감정의 은유다.

강원도 두메산골/ 첩첩이 산중이던
고향 땅 옥계면은 나와 널 인식하고
순간을 마냥 즐기던/ 어린 시절 앨범집

먹어진 나이마다/ 눈물만 있었겠나
웃음도 한 사발씩 마시며 살아냈지
짬 내어 뒤돌아보니/ 희미해진 낙서질

내 나이 먹었다고/ 뽐내지 못할 것은
어딘가 팽개치고 쫓기듯 도망친 삶
그때로 모든 시간이/ 망가진 듯 아픈 길
-「모든 시간이」

시간을 상징으로 끌어올린 작품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시조는 「모든 시간이」다. 이 시조는 고향의 풍경과 유년의 기억을 감정의 통로 삼아, 시간을 회한의 정서로 구조화한 예다. “첩첩이 산중이던 / 고향 땅 옥계면은 / 나와 널 인식하고”로 시작해 “모든 시간이 망가진 듯 아픈 길”로 끝나는 이 작품은, 시간의 흐름을 단순한 과거의 연대기적 기록이 아닌, 상처와 웃음이 교차하는 감정의 기록으로 환원시킨다. 시인은 시간을 ‘희미해진 낙서질’이나 ‘쫓기듯 도망친 삶’으로 그리며, 기억이 흐려지고 삶이 부서진 자리를 애틋하게 들여다본다. 과거, 현재, 미래는 이 시에서 분절되지 않고, 한 사람의 삶 안에서 감정으로 연결된 시간의 연속체로 다시 읽힌다. 이처럼 허인봉은 시간을 통해 존재를 성찰하며, 시조가 시간과 기억의 그릇이 될 수 있음을 조용히 증명해 보인다.

구름을 뚫고 나온 민낯 해 따뜻하다
문살을 통해 보인/ 보드란 어루만짐
부득이/ 목화솜 이불/ 올려 덮지 않았네

넘어간 해를 안고 울어본 저린 가슴
추워진 단 행랑집/ 아궁이 군불 피워
아랫목/ 사발과 함께/ 떨며 눕는 시린 몸

작은 꿈 사이사이 보이는 얼굴이다
가지에 앉았다가/ 걸쳐간 시간만큼
여유가/ 곤란스러워/ 피치 못해 숨었네
- 「해가 지다」

「해가 지다」는 하루의 자연스러운 끝맺음을 배경으로, 인간의 감정과 존재의 실존을 사유하는 시조다. 첫째 수에서 ‘민낯 해’와 ‘문살을 통과한 어루만짐’을 통해 저물녘 햇살의 감각을 포착한 뒤, 둘째 수에서는 ‘저린 가슴’과 ‘시린 몸’을 대비적으로 배치하여 정서적 고독과 생의 추위를 동시에 형상화한다. 셋째 수에서는 ‘작은 꿈 사이사이’에서 ‘보이는 얼굴’로 감정의 잔상을 떠올리며, 삶의 피로와 정서적 피신을 암시한다. 이처럼 시인은 해가 지는 단순한 자연 현상을 통해 상실과 안식, 고독과 희망의 교차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허인봉은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변화 속에서 감정을 이입하고, 그것을 시조의 절제된 형식 안에서 내면화함으로써, 정형시가 지닌 울림의 가능성을 다시금 보여준다.

이러한 시편들은 모두 감정과 시간, 자연을 하나의 회화적 풍경으로 그려내며, 독자로 하여금 감정을 시각화하게 한다. 시인이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사물과 계절을 빌려 말하는 이 간접화 전략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더욱 깊은 몰입을 유도한다. 이것이 바로 허인봉 시조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허인봉의 시조에서 ‘꽃’은 단지 식물이 아니라 감정의 표면이며, ‘시간’은 서사이자 존재의 공간이며, ‘풍경’은 시인의 내면이 투영된 감정의 거울이다. 그는 이 삼중 구조를 통해 정서를 사물화하고, 사물을 다시 상징화하는 순환적 시학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시조라는 고전 형식 안에서 이루어지며, 형식과 내용의 이상적 결합을 통해 현대 시조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며 단순한 감상의 경지를 넘어, 감각과 사유의 협연 속에서 나 자신을 되비추게 되는 것이다.

3. 사소한 일상과 정서적 진폭: 허인봉 시조의 감수성

허인봉 시조의 세계에서 ‘감수성’은 단순히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것은 일상의 찰나적 순간 속에서 정서의 깊은 층위를 포착해내는 언어적 감각이며, 감정의 결을 형상화하는 시적 기술이다. 허인봉의 시조는 격정이나 장대한 서사 대신,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장면 속에서 정서적 파장을 길어 올린다. 마치 조용히 일렁이는 물결이 멀리까지 파동을 퍼뜨리듯, 그의 시조는 조용히 읽히지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러한 특성은 일상의 언어와 상황, 사물에 담긴 정서의 함의를 통해 구현된다.

하루를 선물 받아/ 저금통에 넣었다
언제든 생각나면 꺼내서 볼 수 있는
달려든 그리움 하나 일기장에 꽂아서

자투리 기억까지/ 모아서 채워 뒀다
자그만 사랑조차 쌓여서 자라나면
파고든 허무함 앞에 우산처럼 받치려

어렴풋이 떠오르는/ 미소도 쌓아 뒀다
깜깜히 묻혀버릴 하루가 낡아지면
철 지난 옷가지처럼 정리하며 더듬게

기나긴 밤을 맞아/ 내일을 당겨왔다
배부른 저금통을 뿌듯이 안고 잠든
행복한 소녀 감성이 떠올라서 설레게
-「하루의 값」

「하루의 값」은 하루를 정서적 자산으로 비유한 작품이다. 시인은 ‘하루를 선물 받아 저금통에 넣고’, ‘자투리 기억까지 모아 채워 둔’ 일상을 통해, 감정이 쌓이는 과정을 자산의 축적처럼 묘사한다. 감정은 여기서 소비되지 않고 저장되며, 나중에 허무함 앞에서 ‘우산처럼 받치려’는 대비책으로 기능한다. 이처럼 감정은 단지 순간의 반응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실질적인 내면의 구조로 그려진다. 허인봉은 ‘저금통’, ‘일기장’, ‘자그만 사랑’, ‘낡아지는 하루’ 등의 구체적 이미지들을 통해 감정의 흐름을 정제된 언어로 풀어내며, 감수성의 본질을 ‘사소한 축적’ 속에서 발견한다. 이는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차곡차곡 모아가는 서정의 전략이며, 현대 시조에서 드물게 보는 감성의 자양분이다.

치악산 돌 봉우리/ 가루분 새하얗게
매화 눈 화르르륵 피어나 흥얼대며
소복이/ 모여 앉아서/ 나눠 갖는 그 열기

눈 부신 태양 조각/ 흩어져 반짝여도
모조리 흡수해서 빼앗는 찬 설경
송이눈/ 몸부림치며/ 붙잡는 시든 꽃잎

긴장감 무너뜨린/ 피로감 잦아들면
치켜뜬 눈꽃나무 순차로 손을 털어
바람이/ 밟고 가는 날/ 버석이며 흔든다
-「눈꽃 시드는 날」

「눈꽃 시드는 날」은 치악산 설경을 배경으로 하여, 자연의 풍광 속에 감정을 투사한 시조다. 첫째 수에서 ‘매화 눈 화르르륵 피어나 흥얼대며 / 소복이 모여 앉아 나눠 갖는 그 열기’는 찬 눈 속에서도 감정을 공유하는 따뜻한 장면을 연출한다. 그러나 둘째 수에 이르러 ‘송이눈 몸부림치며 / 붙잡는 시든 꽃잎’으로 감정의 긴장이 고조되며, 생명력과 소멸 사이의 충돌이 전개된다. 셋째 수에서 ‘눈꽃나무 순차로 손을 털어 / 바람이 밟고 가는 날 / 버석이며 흔든다’는 구절은 감정이 사라지고 나서 남는 진동, 혹은 정서의 잔상을 묘사한다. 허인봉은 이처럼 눈꽃이 시드는 장면을 통해 감정의 소멸과 흔들림, 그리고 그 너머의 여운까지 그려내며, 시조의 절제된 형식 속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는 정서의 극단을 외침이 아닌, 잔여 이미지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간접화 전략의 탁월한 예라 할 수 있다.

바르지 못한 길이 뜻함을 무너뜨려
이끌려 내려앉은 그리운 보금자리
온정을 부비면서 다가가도 피하네

갓 바위 지붕 얹은 나지막한 산 오두막
애달픈 심령들을 멀찍이 등에 지고
낙숫물 소리 들으며 한발 한발 디디네

막걸리 한 사발이 벗이 된 여말삼은
별 무리 등불 삼아 누리던 오솔길 숲
바람의 노랫가락만 하염없이 들리네

심안이 정갈하고 검소해 휘지 못한
고려의 호국 충절 사랑한 불굴의 힘
어떠한 잡스러움도 드리우지 못하네
-「변암」

이러한 감수성은 일상의 단면에서도 드러난다. 「변암」은 지명과 그 공간에 깃든 정신성을 통해 시인의 감정을 이입하고 형상화한 시조다. 시인은 ‘바르지 못한 길’과 ‘이끌려 내려앉은 보금자리’를 통해 인간 존재의 무력감과 그리움을 토로하며, 산속 오두막이라는 공간을 통해 고립된 정서를 구체화한다. ‘막걸리 한 사발이 벗이 된 여말삼은’이나 ‘별 무리 등불 삼아 누리던 오솔길 숲’ 같은 표현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서, 공간이 감정의 무늬를 입는 순간을 포착한다. 마지막 수에서는 ‘고려의 호국 충절’을 직접 언급하며, 변암이라는 지명이 지닌 역사성과 정신을 응집적으로 그려낸다. 이 시는 장소를 단순한 배경이 아닌 정서적 심상으로 끌어올리며, 시조가 ‘공간의 감정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구수한 소리들이 많이도 사라졌다
달빛에 휘영청 한 불빛은 늘었지만
정감이/ 흘러넘치고 구수하던 옛 소리

옆 동네 마실 갈 때 따라온 네 발자국
앞설 세 뒤 서거라 하면서 달라붙어
온 동네/ 똥개로 불린 선한 눈빛 강아지

새벽녘 기도 중에 닭 울음 난데없다
아주 먼 하늘 향해 빛이여 쏟아져라
둥근 배/ 잔뜩 부풀린 이웃집 붉은 벼슬

갈라져 찢어지는 잡음은 시끌벅적
소싯적 스쳐 가던 빌미의 예사소리
어딘가/ 파묻혀 버린 맨 삶 속의 기억들
-「소리가 사라진 동네」

허인봉의 감수성은 또한 청각적 부재를 정서적으로 변환시키는 데서 빛난다. 「소리가 사라진 동네」는 과거의 정겨운 소리들이 사라진 지금의 공간을 배경으로, 청각적 기억을 통해 감정을 되살리는 시조다. 첫째 수에서 ‘구수한 소리들이 많이도 사라졌다’는 진술은 그 자체로 상실의 선언이며, ‘정감이 흘러넘치던 옛 소리’는 단순한 청각적 현상을 넘어, 공동체와 인간관계의 감정을 상징한다. 둘째 수에서는 ‘똥개로 불린 강아지’, ‘붉은 벼슬의 닭’과 같은 구체적인 소리의 상징들이 등장하여, 유년기와 전통적 삶의 리듬을 상기시킨다. 마지막 수에 이르러 ‘파묻혀 버린 맨 삶 속의 기억들’이라는 구절로, 모든 소리와 감정의 결이 사라진 삶의 풍경이 드러난다. 허인봉은 이러한 청각의 결락(缺落)을 감정의 매개로 전환하는 섬세한 언어 감각을 통해, 정서적 파장을 조용히 퍼뜨린다. 이처럼 소리의 부재가 곧 감정의 환기 장치로 작동하는 방식은 허인봉 시조가 지닌 간접화 전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허인봉 시조의 감수성은 단지 예민함이나 감정의 과잉이 아니다. 그것은 정서의 억제와 통제, 그리고 언어의 절제를 통해 구현된다. 이때 시인의 언어는 일상의 재료들을 빌려, 그것들을 감정의 매개로 변환시킨다. 이는 시조라는 정형의 형식성과도 긴밀히 연관된다. 정형시로서 시조는 본래 감정의 분출보다는 응축과 정제에 더 적합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허인봉은 이 형식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일상의 행위와 감각, 사물에 그것을 이입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러한 감수성은 결국 ‘일상성의 시학’과도 맞닿아 있다. 현대시조에서 일상을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히 친숙한 주제를 선택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일상을 감정적으로 해석하고, 그 속에서 감정의 리듬과 긴장을 조율할 수 있는 능력, 즉 ‘생활의 서정화’ 능력을 말한다. 허인봉은 이 점에서 매우 탁월한 시인이다. 그의 시조는 사소함 속에 깃든 의미를 붙잡아, 그것을 시적 언어로 변환함으로써 독자에게 일상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허인봉 시조에서 감수성은 단지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는 시적 태도이자 감정의 외화 전략이다. 그의 시조는 사소한 장면, 들리지 않는 소리, 잊혀진 장소 속에서 감정의 파장을 길어 올리며, 독자에게는 새로운 정서의 감각을 일깨운다. 이처럼 허인봉의 시조는 감정의 깊이를 외침이 아닌 침묵으로, 격렬함이 아닌 절제된 울림으로 전달한다. 그의 감수성은 시조라는 형식을 빌려, 감정의 여백을 가장 풍부하게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여백 속에서 독자는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되비추며, 조용한 감동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4. 정형 속의 유영: 시조 형식과 현대적 언어의 만남

허인봉의 시조는 ‘정형시’로서의 시조 형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그 형식 안에서 현대적 감각과 정서를 자유롭게 펼쳐낸다. 이는 단순히 시조의 전통을 고수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형식이 주는 틀을 하나의 미학적 장치로 전환시키는 고도의 언어 전략이기도 하다. 정형 속에서 유영하는 언어들, 그 안에서 허인봉은 고요히 파문을 일으킨다. 이 장에서 우리는 허인봉 시조의 형식적 특성과 현대적 감각이 어떻게 조화롭게 어우러지는지를 구체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시조는 기본적으로 초장, 중장, 종장의 3장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 2구로 이루어진다. 이 정형적 구조는 시인에게 일정한 제약을 가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함축적이고 응축된 표현을 가능케 한다. 허인봉은 이 구조의 미학을 존중하면서도, 내용 면에서는 현대적 삶의 정서와 언어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이로써 시조는 더 이상 과거의 언어유희나 수사적 장치에 머무르지 않고, 동시대의 감각을 담는 그릇으로 기능하게 된다.

내 작은 창가에는/ 서랍이 네 개 있어
헤벌쭉/ 입 벌려서/ 천지 분간 못 하고
사방을 하얗게 덮어 맹 날뛰는 찬 겨울

온몸을 여며 안고/ 휘둘러 살펴 가며
온전히/ 문 열리길/ 손꼽아 고대하곤
빼꼼히 꽃눈을 내밀다 깜짝 놀란 봄 서랍

침묵이 이치인 듯/ 꿈쩍도 하지 않고
순 차례/ 기다리며/ 순순히 두 눈 감아
부딪힘 하나 없이도 살아내는 두 서랍

하늘이 명하는 날/ 두 눈을 번쩍 뜨고
바람에/ 밀려오는/ 나그네 맞이하러
매무새 곱게 만지고 향내 담아 오겠지
-「계절 서랍」

「계절 서랍」은 사계절을 ‘서랍’이라는 구체적 이미지로 설정하여, 시간의 흐름을 감정적 층위로 환원하는 작품이다. 시인은 ‘서랍’이라는 공간 개념에 계절을 담아, 자연의 변화와 인간 정서의 움직임을 유비적으로 병치시킨다. 첫째 수의 ‘맹 날뛰는 찬 겨울’은 분출되는 감정의 상태를, 둘째 수의 ‘꽃눈을 내밀다 깜짝 놀란 봄 서랍’은 설렘과 불안을 상징한다. 셋째 수에서는 ‘두 눈 감고 순차로 기다리는 두 서랍’을 통해, 여름과 가을의 침잠과 수용의 태도를 묘사하며, 종장에서는 ‘하늘이 명하는 날’ 다시금 눈을 뜨고 외부 세계와 마주하는 준비를 보여준다. 이처럼 허인봉은 시조의 정형 구조를 활용하여 계절과 감정의 내면적 서사를 구축하며, 감각적 이미지와 시간 감각을 시적으로 연결짓는다. 시조 형식의 응축성과 서정성이 현대적 정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이 작품은 계절이라는 보편적 소재를 통해 삶의 주기와 감정의 질서를 정갈하게 형상화한다.

버려진 실 뭉텅이 돌돌돌 말아 쥐고
코바늘 한 땀 한 땀/ 떠내어 잇다 보니
시작은 아주 미약한
사슬뜨기 기둥코

바늘귀 감아 돌 때 손가락 도움 얻어
패턴을 단순하게/ 촘촘히 엮어 봐도
시간은 성큼거리며
달아나는 어둠 속

한 올에 담아내는 간절한 묵상기도
비워진 마음만큼/ 자녀를 위한 시작
흰 커튼 매두를 당겨
창에 내린 단 열매
-「뜨개질」

「뜨개질」은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 정서의 누적과 마음의 기원을 시적으로 엮어낸 작품이다. 시인은 버려진 실 뭉텅이에서 시작해 ‘사슬뜨기 기둥코’로 첫 걸음을 내딛는 과정을 그리며, 삶이란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시간이 더해져 완성된다는 서사의 단서를 제공한다. 중장에서는 단순한 패턴을 ‘촘촘히 엮어 보아도’ 시간은 ‘성큼거리며 달아난다’는 구절을 통해, 인간의 노력과 세월의 무상함을 대비시킨다. 종장에서는 ‘한 올에 담아내는 간절한 묵상기도’, ‘비워진 마음만큼 자녀를 위한 시작’이라는 구절이 등장하며, 뜨개질이 단순한 노동을 넘어 사랑과 기원의 상징으로 승화된다. 마지막 ‘흰 커튼 매두를 당겨 / 창에 내린 단 열매’는 뜨개질의 결과물이 단지 물질적 산물이 아니라 정서적 열매이자 기도의 완성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허인봉은 반복적이고 사소한 일상 행위를 통해 감정의 깊이와 존재의 온기를 전달하며, 시조 형식 안에서 섬세하고 따뜻한 감수성을 유려하게 직조해낸다.

허인봉의 시조에서 주목할 것은 종장(終章)의 사용 방식이다. 전통 시조에서 종장은 초장과 중장을 받으며 주제를 마무리하거나 반전을 유도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허인봉은 이러한 구조적 기능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그 속에서 감정의 밀도를 집중시킨다. 예컨대 「뜨개질」의 종장에서 ‘비워진 마음만큼 자녀를 위한 시작’이나 ‘흰 커튼 매두를 당겨 / 창에 내린 단 열매’라는 구절은, 삶의 소망이 하나의 정서적 실천으로 이어졌음을 암시한다. 시인의 언어는 절제되어 있으나, 그 내면의 정서는 결코 얕지 않다.

한편, 현대적 언어의 투입은 단지 시어의 선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시인은 리듬과 정서의 조율, 즉 ‘말의 리듬화’를 통해 시조를 현대적으로 변형한다. 이는 마치 음악에서 정해진 박자 안에서 리프나 즉흥 연주가 일어나는 것과 유사하다. 예컨대 「하루의 값」에서는 하루를 저금통에 넣는다는 비유를 통해, 일상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축적해 나가는 감성의 장면을 형성한다. ‘자투리 기억까지 모아 / 파고든 허무함 앞에 / 우산처럼 받치려’는 표현은 현대적 상상력과 감정을 시조 형식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사례다.

결국 허인봉의 시조는 형식과 내용의 이중 구조 속에서 긴장과 조화를 이룬다. 시조라는 형식이 제공하는 울림과 리듬 위에, 시인은 현대적 어휘와 감정을 차분히 얹는다. 그 결과 시조는 고루한 장르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언어의 형식으로 다시 태어난다. 허인봉은 이 형식 속에서 유영하는 법을 알고 있으며, 독자는 그 유영을 따라가며 언어의 감각과 감정의 흐름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미학은 시조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전통을 단순히 계승하지 않고, 그것을 오늘의 언어와 감각으로 다시 호흡하게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시조는 다시 ‘지금, 여기’의 장르로 살아나는 것이다.

5. 비평적 성찰: 성취와 아쉬움


허인봉의 시조집 『나는 나를 열어』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미학적으로 구현해낸 보기 드문 성취다. 시인은 시조라는 정형 양식의 울타리 안에서, 현대적 감각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며 정제된 언어로 감수성을 노래한다. 이 시조집의 가장 큰 미학적 성과는 바로 감정의 내면화와 표현의 절제를 통해, 일상의 사소한 순간을 보편적 감동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시인은 시조의 삼장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생의 진실, 감정의 파고, 존재의 윤리를 조용히 드러낸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사물에 대한 비유와 감정의 이입을 통해 형성된 상징 구조이다. 「가을 민들레」나 「마른 꽃」, 「나팔꽃」과 같은 시에서 시인은 식물과 계절이라는 자연의 움직임을 통해 인간 감정의 생로병사까지 끌어안는다. 이러한 시도는 단순한 감정 묘사를 넘어, 감정의 시각화이자 사물화를 통해 독자에게 보다 선명하고 촉각적인 울림을 준다. 이는 시인이 단지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내는 데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허인봉은 시조의 형식을 무리하게 파격하지 않으면서도, 언어의 현대적 감각을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시조가 때로는 고루하고 전근대적인 장르로 인식되는 현실 속에서, 허인봉의 시조는 그 편견을 깨트린다. 그는 리듬과 구조, 정형의 규칙을 존중하면서도 「하루의 값」에서 ‘저금통’이나 「눈꽃 시드는 날」에서 ‘송이눈’, 「뜨개질」에서 '사슬뜨기 기둥코' 같은 현대적 일상어를 시조의 이미지로 편입시키며, 일상과 감정을 잇는 새로운 정서를 창출한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는 종장에서 감정의 정점이 절묘하게 조율되며, 시조 고유의 미학인 ‘응축과 반전’이 적절히 발현된다.

이처럼 형식미와 내용미의 이중 구조를 조화롭게 구현했다는 점에서 『나는 나를 열어』는 현대 시조의 미학적 지형도 위에서 매우 의미 있는 성취로 읽힌다. 무엇보다 시인의 세계는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 존재한다는 태도를 견지하며, 난해함이나 관념성보다 정서적 교감을 중시한다. 이는 시조가 가진 원래의 성격, 즉 ‘노래와 낭송의 문학’으로서의 속성과도 맞닿아 있으며, 독자에게 한층 친화적인 시적 공간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시조집이 안고 있는 비평적 아쉬움 또한 분명 존재한다. 첫 번째는 감정의 일관된 톤이 자칫 단조로움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허인봉 시조의 가장 큰 특징은 섬세한 감정선과 절제된 언어이지만, 시조집 전체를 통해 흐르는 감정의 결은 비교적 평이하고 잔잔한 쪽에 가깝다. 이는 감정의 깊이를 담보하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자의 감정 리듬에 변화를 주지 못할 경우, 몰입의 동력 자체가 약해질 가능성도 내포한다.

두 번째는 장면의 반복성과 이미지의 유사성이다. 여러 시편에서 식물이나 계절, 비, 바람, 햇살과 같은 자연 요소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며, 비슷한 정서적 구조 속에 배치된다. 이는 시인의 감성 세계가 자연 중심의 사유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독자로 하여금 다소 익숙한 표현 속에서 신선도를 잃게 만들 가능성도 있다. 가령 ‘가을’, ‘잎’, ‘눈’, ‘꽃’ 등은 거의 모든 시편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며, 새로운 변주의 방식이나 상상력의 비약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맥락이나 비판적 사유의 결여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허인봉의 시는 대체로 내면의 풍경에 집중하며, 현실의 문제, 사회적 갈등, 시대적 징후 등에 대한 개입은 드물다. 이는 시인의 창작 방향이 철저히 개인적 체험과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의미하나, 시조라는 장르가 지닌 비판성과 도덕적 발언권까지 고려한다면, 일상적 정서와 서정성 외의 좀 더 확장된 주제 의식이 아쉬움을 자아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열어』는 한국 현대 시조가 나아가야 할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것은 형식적 전통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하되, 그 안에 동시대의 감각과 언어를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감정의 내면을 정교하게 가다듬는 시도의 중요성이다. 허인봉은 이 균형을 단단히 지켜가며, 시조가 여전히 ‘현재형 문학’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해낸다.

결국 이 시조집의 의의는 단지 아름다운 언어의 정리, 또는 감정의 진술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형과 감성의 조화 속에서, 언어와 삶의 의미를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힘에 있다. 그리고 그 힘은, 시조가 단지 옛것의 박제된 형식이 아니라 동시대의 정서와 일상을 생생히 반영한 살아 있는 형식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허인봉의 시조는 그 점에서, 오늘의 한국 시조가 가진 미학적 잠재력의 한 극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6. 맺음말: “나는 나를 열어, 다시 너를 부른다”

시조집 『나는 나를 열어』는 허인봉 시인이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그 안에서 길어 올린 감정을 조용히 세상과 나누는 ‘정서적 개방의 미학’이다. 제목이자 시조집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인 “나는 나를 열어”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과 기억, 일상의 단면들, 그리고 정서의 잔물결들을 시조라는 언어로 정제하여 타자에게 전하는 사적인 의례이며, 동시에 보편적인 공감의 서사다. 시인은 이 시조집을 통해 나를 여는 행위를 시적으로 실천했고, 독자는 그 열린 세계 속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는다.

“나를 열어”의 주체는 궁극적으로 ‘너’를 향해 있다. 즉 이 시조집은 자아의 응시를 통해 세계와의 접촉을 시도하며, 타인과의 정서적 연결을 모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는 단지 ‘고백적인 시’에 머무르지 않고, ‘소통의 시학’을 형성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허인봉의 시조는 결코 독백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감정과 장면들은 하나의 유영(遊泳)이며, 그 유영의 끝자락에는 반드시 독자라는 청자가 기다리고 있다. 시인은 독자의 마음 한편을 살짝 두드린다. “나를 열어보았는데, 당신도 그러한가요?”라고.

그의 시조는 복잡한 구조나 과도한 상징을 동원하지 않지만, 그만큼 더 깊은 ‘서정의 밀도’를 확보한다. 정형시로서의 시조는 초장-중장-종장의 구조 속에서 제한된 언어로 최대한의 감정을 함축해야 하며, 허인봉은 이 구조의 정서적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한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며, 감정을 작은 점으로 찍듯이 담는다. 이 절제된 방식이 오히려 독자에게는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시는 “소리치지 않는 감정의 진실”을 보여준다.

특히 이 시조집에서 드러나는 가장 특징적인 시학은 ‘공감의 감수성’이다. 허인봉은 사물과 계절, 일상과 기억, 장소와 풍경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만, 그것은 언제나 독자의 감정과 닿을 수 있는 언어로 가다듬어진다. 나만의 고통이나 사연으로 고립되지 않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감정’을 함께 이야기한다. 「가을 민들레」, 「마른 꽃」, 「하루의 값」 같은 작품들이 그렇다. 그 속의 ‘나’는 결코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감정의 흔들림,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장면 속에 있다. 그렇기에 독자는 그의 시를 읽으며 자신의 감정과 조우하고,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나를 여는’ 일은 때로 고통을 수반한다. 자신을 솔직히 응시하는 일은 불편함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허인봉은 그 불편함조차 감각적으로 정제해낸다. 시인은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 ‘눈물이 떨어진’ 자리를 묘사하면서도 결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오히려 차분히 그 자리를 응시하고, 언어로 써 내려간다. 그리고 그런 장면들을 통해, 독자는 ‘나도 그런 날이 있었다’는 회상의 문턱에 선다. 이는 ‘공감의 서정’이 작동하는 방식이며, 허인봉 시조의 미학적 강점이다.

또한 이 시조집은 시조라는 장르의 가능성을 조용히 확장한 시도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정형시조의 형식을 견고히 지키면서도, 현대의 감각과 정서를 능동적으로 끌어들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는 시조를 전통의 박제된 유산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살아 있는 형식,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한 감정의 틀로 이해한다. 「뜨개질」이나 「계절 서랍」, 「해가 지다」 같은 시조는 전통의 형식을 빌려 현실의 감각과 현재적 삶을 시적으로 재현한 예들이다. 말하자면, 그의 시조는 ‘시간을 잇는 징검다리’다. 고전과 현대, 개인과 세계, 나와 너를 잇는 감정의 다리인 것이다.

이제 이 시조집의 제목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자. 『나는 나를 열어』. 이 짧은 문장 속에는 이 시조집의 모든 정서가 압축되어 있다. 나를 연다는 것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자, 그 들여다봄을 타인과 공유하는 일이며, 감정의 파장을 멀리 퍼뜨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 감정의 파장은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게 닿아, 다시금 ‘너’를 부르게 된다. 이 ‘너’는 단지 특정한 타인이 아니라, 감정의 언어를 공유할 수 있는 모든 독자다. 허인봉은 시조를 통해 자신을 열었고,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를 발견한다.

결론적으로, 허인봉의 시조집 『나는 나를 열어』가 보여주는 문학적 방향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을 현재에 계승하는 행위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정형의 틀 안에서 현대적 정서와 언어를 진실하게 울려내고,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의 심연을 파고들어 보편의 정서와 공명을 이루려는 시도의 결과이다. 요컨대 이 시조집은 시조 문학이 나아가야 할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조집은 감상하는 책이 아니라, 감응하는 책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은 독자는 어쩌면 자신에게도 묻게 될 것이다. ‘나는 나를 열 수 있는가’, ‘나는 너를 부를 수 있는가’. 그 질문이야말로 이 시조집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큰 울림이다.

시조의 정형 속에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낸 허인봉 시인의 첫 걸음은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감정의 결을 정직하게 어루만지며, 일상 속 서정을 단단히 붙잡는 그의 언어는 이제 막 피어난 꽃처럼 단아하다. 앞으로 더 많은 시조가, 그의 감각과 시선으로 피어나길 응원한다.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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