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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사랑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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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__5

제1부

살아갈 이유
해넘이를 바라보며
사계四季
칠순이라니요
땡볕, 그 후
팬데믹을 견딘 후
벼이삭은
의문부호
불면증
후회
동백섬 소묘
이 빠진 보시기
대역代役
어슬녘 숲에 들면
못 잊어
팔순에
그리다
어느 음성
추억 한 잎
향수

제2부

역병, 그 후
물오름 달
6월에 진 꽃
또 헛꿈일까
괘종시계
캠퍼스 잔디에서
무릎을 꿇고
나목은
미수를 축하드리며
처서 즈음
궁금증
멀리엔 살점 하나
설레다
노스탤지어
아버님의 낡은 의자
호수에 어린 풍광
백목련
러시아워
자목련
사이버 피싱

제3부

녹슨 기다림
여명黎明
일출
어쩌다가
이 계절, 음미하다
격려 한마디
함께 하소서
충고
담쟁이
여망
병상의 꿈 속
착각
미련, 웃자라다
선운사에서
멍에
풍년 예감
빈삭한 방문
삶, 그 궤적
석별
물길을 걷다

제4부

엇갈린 인연
초파일
내려놓다
늙은 소나무
그리다 그리다가
부부란
힐링
겨울, 그 후
자연에서 배우다
가족사진
가을, 영그는데
창밖을 보며
숲길 산책
어머니의 흔들의자
여름 푹 익은 뒤
청평호에서
어린 날의 트라우마
사랑한다, 아들아!
첫눈 1
행려병자

제5부

단풍
영주 부석사에서
부활
폭설의 아침
달밤
회억
여름, 그 뒤
도솔산, 선운사
차라리
나목의 꿈
승무에 취하다
녹슨 철마
추억 한 닢
봄 예찬
요양원의 해넘이
어느 일용직
바닷가 사찰에서
불면의 밤
첫눈 2
깨를 볶다 문득

· 평설: 톺다, 열두 행간__구충회

저자 소개 1

호: 연송(娟松) 시조생활사 제36회 신인 문학상 「도공의 하루」로 등단(1998년 6월 25일) 시조생활사 토함 동호회 제1대 회장 한국 문인협회 회원 (사)한국시조협회 이사 저서 토함 동호회지(1~9집) 연송 시조집(들숨과 날숨사이, 2012년 12월) 부부시조집(하늘과 땅 사이 1~8집) 수상 (사)한국시조협회 작품상 수상(2016년 12월) 대은 시조문학상 본상 수상(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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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1월 26일
쪽수, 무게, 크기
152쪽 | 130*210*20mm
ISBN13
9791124225028

출판사 리뷰

『적도의 꿈』- 삶의 중심을 찾는 시조 여행
황인덕 시조집 북리뷰

김은자 시인의 네 번째 시조집 『톺다, 열두 행간』은 제목 그대로 삶의 결을 “톺아” 열두 줄의 정형 속에 눌러 담아 보여주는 책이다. 시인은 시조를 “정체 예술”로 규정하며, 엄격한 정형의 틀을 충실히 지켜야 품격 있는 명시조가 된다는 믿음을 작품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동시에 시조 창작을 삶의 기억을 ‘속 뜰에 음각’해 두었다가 다시 호흡을 불어넣는 작업으로 설명하며, 그 과정을 통해 독자가 위안을 얻고 다시 삶에 도전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이 시조집의 정서는 대체로 ‘견딤’과 ‘회복’의 윤리로 수렴된다. 팬데믹 이후의 황량한 삶, 늙음과 상실의 문턱, 가족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공동체의 무게가 곳곳에 배어 있다. 그럼에도 시인의 시선은 쉽게 절망으로 기울지 않는다. 예컨대 표제에 가까운 시적 태도는 “힘든 역경 속이라 해도 위안과 희망, 용기”를 주고 싶다는 바람에서 확인되며, 작품들은 그 바람을 구체적인 장면과 이미지로 실천한다.
제1부의 첫 작품 〈살아갈 이유〉는 이 시집의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풀칠할 일당 몇 푼”을 움켜쥔 귀갓길, “석양이 처진 어깨 토닥”이는 순간, 그리고 아이가 “엄마” 하고 안겨드는 찰나에 맞벌이의 시름이 녹아내리는 장면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생활의 감각으로 삶의 이유를 붙드는 방식이다.

김은자 시조의 미덕은 이런 생활 감각이 비유의 전환과 만날 때 더욱 선명해진다. 〈이 빠진 보시기〉에서 깨진 그릇은 단순한 결핍의 표지가 아니라, 오히려 “달빛”을 고이고 “봄씨앗”을 품어 “한 우주”를 여는 존재로 재해석된다. 상처가 세계를 여는 그릇이 되는 이 역설은 이 시집이 가진 가장 단단한 위로의 논리다.

또한 이 시조집의 곳곳에는 음악적 감각이 리듬과 호흡으로 번역되어 있다. 구충회 박사의 평설에서 언급되듯, 시인의 작품에는 “날카로운 시적 감각”과 “전광석화 같이 번득이는 재기”가 발견되며, 이는 오랜 음악 생활에서 비롯된 감성과 무용에서 촉발된 순발력의 성과일 수 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이런 배경은 작품의 박자감, 문장 전개의 속도, 종장의 닫힘에서 은근한 설득력을 만든다.

다만, 이 시조집이 더 높은 미학적 긴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적확한 시어의 선택과 조탁”이 남은 과제로 제시되기도 한다. 실제로 일부 작품에서 메시지가 다소 직접적으로 고개를 들 때, 시조 특유의 여백의 울림이 줄어드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독자를 ‘설득’하기보다 ‘다독이려는’ 시인의 윤리에서 비롯된 선택으로 읽힌다.

결국 『톺다, 열두 행간』은 상처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상처를 통해 살아갈 이유를 다시 세우는 시집이다. 팬데믹 이후의 삶을 겪어낸 이들, 가족과 생의 노년을 ‘현실’로 통과하는 독자라면, 이 책은 열두 줄의 짧은 형식 안에서 의외로 큰 숨을 얻게 해줄 것이다.

톺다, 열두 행간
-가족애와 자아 성찰의 발자취

구충회
(시조시인, 문학박사)

1. 여는 말

연송(娟松) 김은자(金恩慈) 시인의 시조집 『톺다, 열두 행간』의 상재(上梓)를 축하드립니다. 시인은 1998년 시조시인 시천(柴川) 유성규(柳聖圭) 박사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조 문학계의 원로다. 그동안 모상철시조문학상 대상 등 여러 차례 수상한 바 있으며, 한국시조협회를 비롯한 많은 시조문학 단체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시인이다. 지금까지도 시조의 전문성을 갖추기 위하여 시조 아카데미에서 시조 창작에 열정을 쏟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후진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열혈 시조시인이다.

평북 정주가 고향인 시인은 일찍이 모스크바 국립음악원과 페델스부르그 국립음악원을 수료하고, 50여 년 동안 음악의 길을 걸어온 피아니스트다. 그뿐만 아니라, 무용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니, 김은자 시인은 음악과 무용을 겸비한 시조시인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다양한 재주와 경륜이 시조 창작에 어떠한 영향을 줄지 귀추가 주목된다.

세계는 지금 AI에 사활을 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IT 강국을 넘어서 세계 3위의 AI 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터이다. 올해 벽두 한글로 쓴 우리 시조가 세계인의 언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달나라로 갔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발사된 달착륙선 ‘블루 고스트(Blue Ghost)’를 타고 45일간의 비행 끝에 달나라에 안착한 것이다. 이는 시조 역사 700여 년 만에 이룬 쾌거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시조시인도 시대에 걸맞은 변화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아니 될 과제를 안게 되었다. 유데미(Udemy)를 통하여 인공지능 역량 인증 1급 자격과정을 밟고 있는 필자는 그 첫 번째 당면 과제가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AI와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이 어떤 상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문학작품을 창작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이는 인간이 AI를 지배하느냐, 아니면 지배를 당하느냐의 심각한 기로에 봉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간간이 보도되고 있는 유명 대학의 비대면 시험에서 나타나는 부정행위는 이를 시사하고 있는 한 예라 할 것이다.

시조는 따뜻한 피가 흐르는 영혼의 산물이다. 관련 정보에 대하여는 AI의 도움을 받을지언정, AI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면, 영혼 없는 시조로 전락되거나 표절의 위험까지도 초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시인이 피해야 할 기본자세이자 양심의 문제다. 공자가 『시경』과 『논어』의 팔일(八佾) 편에서 지적했듯이 시는 바로 ‘사무사(思無邪)’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무사’란 생각에 사특함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음은 이 시대에 현대시조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의 문제다. 현대시조는 ‘3장 6구 12소절’이라는 ‘형식적 틀’에 ‘현대성’을 담아내야 하는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감상적 상상력보다는 논리적 상상력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낭만적 ‘가슴의 시’보다는 주지적 ‘머리의 시’가 요구된다는 말이다. 우리 시조시인은 이러한 점에 인식을 함께하고, 현대사회에 부응하는 ‘현대성’을 살리기 위하여 환골탈태(換骨奪胎)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실천이 현대시조의 위상을 높이고 장르적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2. 김은자 시조의 특징

김은자 시인의 시조집에 실린 100편의 시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형식 면에서 볼 때, 김 시인은 단시조보다 연시조를 선호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가 있다. 100편의 작품 중 연시조가 55편이고, 단시조가 45편이기 때문이다. 또한, 연시조 55편 중에도 2수로 된 연시조가 40편에 이르고 있으니, 이는 연시조 전체 55편의 72.7%를 상회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작가의 재량에 속한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시조의 정체성이나 본질 면에서 볼 때, 한번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조의 원형은 기·승·결 ‘3장(章)’의 단시조라는 점을 필자는 강조하고 싶은 거다.

내용 면에서 보면, 가족애, 향수(鄕愁), 추억(追憶), 자아 성찰, 계절의 감각, 자연 서정, 기행 여정(旅情) 등으로 대별할 수가 있다. 이는 현대시조가 소재와 주제의 다양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특징이 아닐 수 없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가족애와 향수다. 김은자 시인의 출생지는 평안북도 정주다. 유년 시절 어머니의 등에 업혀 사선(死線)을 넘어온 이산가족이기에 그의 가슴속에 내재한, 가족에 대한 사랑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보다도 각별하다.

김은자 시인의 작품을 보면, 날카로운 시적 감각과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번득이는 재기를 작품 곳곳에서 눈에 띄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이는 음악에서 비롯된 감성과 무용으로 촉발된 순발력의 소산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시조의 질적 수준을 한껏 높이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 있기에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위의 내용에 따라 인용된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가족애
김은자 시인의 가족사랑은 남다르다. 해방 직후 서너 살 어린 나이로 어머니의 등에 업혀 사선(死線)을 넘어왔기 때문이다. 시인의 남편과 자녀에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도 지극하고 각별하다. 다음 인용 작품을 통하여 그 실상을 확인하기로 한다.

철책 따라 서치라이트 구석구석 훑으면
정적을 찢을 듯이 울부짖던 꼬마에게
숨죽여 천지 만물도 빌어주던 순간이다

감시 속 생사 길엔 안내자가 구세준데
수고비만 건네받고 세 모녀는 버려졌다
강 건너 푸른 십자가 나침판이 되었네

동살이 잡힐 무렵 첫발 디딘 자유의 땅
어금니 꽉 깨물고 삶의 탑을 쌓으신 임
어머니 월남 실화를 듣다 졸다 잠든다
- 「사선(死線)을 넘어서」

사선을 넘어 자유를 찾은 실화를 어머니로부터 전해 듣고 작품화한 유년의 트라우마(trauma)다. 첫째 수는 절체절명의 위기와 어머니의 가슴 조이는 절박한 순간을 실감 나게 표현하고 있다. 둘째 수는 탈북과정의 서사적 담론이다. 셋째 수는 자유를 찾은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생존 과정이다. 가슴 아픈 남북 분단의 현실을 고발한 서정시다.

아기 같은 내 반쪽을 수술대에 뉘어 놓고
초침 소리 바작바작 애가 타고 피가 마른다
하나님, 함께하소서 내 남편을 구하소서!
- 「함께하소서」

“아기 같은 반쪽”이라니, 부군(夫君)에 대한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수술대에 눕혀 놓고 들리는 초침 소리조차 “바작바작” 애가 타고 피가 마를 정도니, 아내의 절박한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남편의 수술이 무사하기를 절대자에게 비는 아내의 마음이 측은하고 애처롭다.

풀칠할 일당 몇 푼 움켜쥔 귀갓길에
하늘 향해 맘껏 솟은 나뭇가지 그 사이로
나른히 비낀 석양이 처진 어깨 토닥인다

건널목 맞은편서 까치발로 기다리다
달려온 피붙이가 “엄마”하고 안겨들면
한순간 녹아내린다 맞벌이의 모든 시름

이상과 현실 사인 모순 속 늪이라도
앞날을 인도해 줄 하늘은 네 편이다
아가야, 꿈을 향해서 날개 활짝 펼치렴
- 「살아갈 이유」

김은자 시인은 2남 1녀를 성공시킨 어머니다. 자유를 찾았으나 삶은 “일당 몇 푼 움켜”쥘 정도로 녹록지 않았나 보다. 맞벌이 부부의 생활이 아무리 고달파도 “건널목 맞은편에서 까치발로 기다리다 달려온 피붙이가 ‘엄마’하고 안겨들면”, 모든 시름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어머니다. 자식은 엄마에게 희망이요, “살아가야 할 이유”다. 애련미가 돋보이는 서정시다.

세상일 잠시 접고 죽 향에 이끌린 채
골물소리 벗 삼으며 타박타박 걷노라면
유난히 깜빡이는 별 손짓하는 어머니
- 「어슬녘 숲에 들면」

어머니는 탄생의 탯줄이자 마음의 고향이다. 더구나 어린 시절 등에 업혀 자유를 찾아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도 곡진하다. 사선을 넘어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면서 오늘을 있게 해 준 분이기에 더욱 그렇다. 시인에게 어머니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하기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다.

초록 옷 훌훌 벗은 가을 숲에 들어서면
어디선가 들리는 듯 귀에 익은 웃음소리
눈 맞춰 옹알이하던 네 생각에 울컥한다

제 깃 떠나 이역에서 의술의 꽃 피우고자
작별의 뒷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면서
마주해 뒷걸음질로 가물가물 멀어진 너

온갖 역경 딛고 올라 하얀 가운 날리면서
골찬 꿈 펼쳐가는 그 하늘도 푸르겠지
다 떠난 둥지 지키며 지등 하나 밝힌다
- 「멀리엔 살점 하나」

이 작품의 제목인 ‘멀리엔 살점 하나’는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는 막내아들을 말한다. 첫째 수는 아들이 떠난 가을이 오면, 그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둘째 수는 의술을 배우기 위해 집을 떠날 때의 아들 모습이며, 셋째 수는 아들의 의업이 성공하기를 기원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다. 이를 대변하고 있는 상관물이 바로 지등(紙燈)이다.

(2) 향수(鄕愁)
앞의 ‘가족애’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김은자 시인은 이북에 고향을 두고 온 월남 이산가족이다. 그래서 그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매우 애틋하고 각별하다. 다음 인용 작품을 통하여 확인해 보기로 하자.

수평 끝 아스라이 물안개 짙어오면
옛 동산 뛰어놀던 친구들이 떠오르자
한 마리 목어가 된다 먼바다를 그리는
- 「향수」

고향은 돌아가고 싶은 어머니의 품속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생각나는 게 고향이다. 종장에서 “한 마리 목어(木魚)”는 바로 시인 자신이며, “먼바다”는 두고 온 고향이다. 어릴 적 동산에서 함께 뛰어놀던 다정한 친구들을 잊지 못하고 있다. 시인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추억 한쪽 베어 문 채 평행선을 내달려와
꽃 진자리 여백 끝에 연서 한 잎 피워 놓고
고향 집 툇마루 끝에 노을 되어 앉는다
- 「엇갈린 인연」

인연이란 우연 같지만 우연이 아닌 만남이다. 만남과 헤어짐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묘한 조합이 우연이다. “꽃 진자리 여백 끝에 연서 한 잎”은 맺지 못한 인연의 상징이다. 엇갈린 인연이 추억의 조각으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스쳐 간 눈빛 속에 머물 곳을 찾지 못한 마음 하나일 뿐, 닿지 못해 더욱 선명해진 인연이라 해두자. 애틋한 서정시다.

유년의 풍광들을 파랑으로 그리면서
강바람은 왜 물결을 내게로만 밀고 올까
고향 집 굴뚝 냇내를 갈피갈피 싣고서
- 「고향 집」

고향은 유년의 보금자리이며, 추억과 기억이 담긴 공간이다. 돌아갈 이유보다 돌아가면 따뜻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자신이 자란 유년 시절의 고향 모습을 회상하고 있는 추억이다. “고향 집 굴뚝 냇내”란 이미지 표출이 이 작품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잠 못 드는 하얀 밤 은하수가 쏟아진다
반딧불 따라잡던 북녘 동산 풀빛 추억
눈앞에 아른거린다 손 내밀면 잡힐 듯이

선로에 귀를 대면 기적소리 들리는 듯
고향 역 깊이 잠든 녹슨 철마 깨우고파
희끗한 갈대꽃 되어 망향가를 부른다
- 「노스탤지어」

첫째 수 초장의 감각적인 표현과 중장의 ‘풀빛 추억’이란 이미지 창출이 신선하다. 은하수가 쏟아지는, 잠 못 드는 밤이면 “반딧불 따라잡던 북녘 동산 풀빛 추억”이 손에 잡힐 듯이 눈앞에 선하다. 둘째 수 초장 중장에서 절정에 이른 향수는 백발이 된 지금도 고향이 그리워 망향가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분단으로 인한 실향민의 향수가 애처롭다.

푸르던 너의 잔해 한 마리 매미 허물
세월에 헐뜯겨서 넋을 잃고 나뒹구네
북녘엔 약산 진달래 물색없이 피고 지고

손잡고 사철 바람 고향하늘 오가는데
철없는 두루미 떼 평화로이 놀고 있네
다 삭은 목울대에선 헛바람만 울린다
- 「녹슨 철마」

실향민의 눈물겨운 향수다. 남북을 오가던 기차의 잔해를 ‘매미 허물’로 비유했다. 분단이 낳은 처참한 현실이다. 이를 북녘의 ‘약산 진달래’와 대비시킨 점은 시인의 재기(才氣)다. ‘사철 바람’도 ‘두루미 떼’도 자유로이 남북을 오가건만, 시인의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은 7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허망한 소리로 메아리칠 뿐, 아직도 요원하니 안타깝다.

(3) 자아 성찰
김은자 시인의 작품을 보면, “쌓은 업(業)을 돌아보라”, “번뇌를 털어내란다”, “지난날을 돌아보라”, “버려라 모두 비워라” 등의 계시적인 명령어가 빈번함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는 모두 시인이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에 대한 생각, 감정, 행동 등을 돌아보고 이해하려는 자아성찰(自我省察)의 표출이 아닌가 싶다.

조용히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는 밤
차곡차곡 쌓은 탑이 삿된 죄업뿐이라서
서둘러 선행 한그루 속 뜨락에 심는다
- 「창밖을 보며」

화자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쌓아온 탑이 “삿된 죄업”뿐이라고 자책하고 있다. 지금까지 해온 말이나 행동, 생각 등이 바르지 못하고 그릇되었다는 양심선언이다. 이를 자각한 나머지 화자는 마침내 선행하면서 살기를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선행 한그루’는 화자의 ‘삿된 죄업’에 대한 보상심리다.

빗장 지른 뜨락에 삼경이 뒤척인다
둑 터진 봇물처럼 요동치는 시간 속에
아득히 파도 소리만 환청으로 들린다

올곧게 걸어온 날 행간마다 심어 놓고
천명을 따르면서 소풍 왔다 가는 빈손
무얼 더 보태고 싶어 다툼 속에 빠지나

삶이란 미로 속에 얽혀있는 상형문자
바위가 천년 고통 삭여가며 서 있듯이
내 한생 그리 살다가 하늘 품에 들리라
- 「불면의 밤」

첫째 수는 삼경이 되도록 잠들지 못하는 화자의 모습이다. 온갖 잡다한 사념들이 꼬리를 물고 생각나기 때문이다. 둘째 수는 지금까지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순명과 인생의 유한성을 성찰하고, 안분지족을 추구하는 담론이다. 셋째 수에서 삶이란 복잡한 미로 속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는 과정이다. 여생을 바위처럼 고통을 감내하면서 살다가 죽겠다는 화자의 의지가 확인된다.

온 둘레 칠흑 같아 헤어날 길 막막한데
피폐해진 육신이라 호흡마저 꺼져간다
의식도 몽롱해져서 혼수 깊이 빠져들고

피안인가 차안인가 섬광이 번뜩하며
하늘 찢는 천둥소리 “쌓은 업을 돌아보라”
얼결에 걷어찬 이불 달빛 화살 부시다
- 「병상의 꿈」

첫째 수는 의식이 몽롱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화자의 극한 상황을 기술한 서사적 담론이다. 둘째 수는 이 세상인지 저세상인지 구분 못 할 혼몽 속에서 꿈을 꾸면서 “쌓은 업을 돌아보라”는 뜨끔한 계시를 받는다. 이는 화자가 지나온 과거를 반성하고 깨달은 촌철살인이다.

고요한 겨울 산사 시간마저 멈춰 서면
홀연히 법고 소리 골짜기에 울려온다
조화 속 채운 한 조각 윤회하듯 떠돌고

손 붉은 저 동자승 들먹이는 좁은 어깨
목어도 따라 울며 고향 바다 그리는데
번뇌를 털어내란다 산마루 노을처럼
- 「선운사에서」

시인은 추운 겨울 천년고찰 선운사를 찾은 모양이다. 첫째 수는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법고 소리와 대조시켜 선운사의 정적미를 배가시키고 있다. 둘째 수의 초장 “손 붉은 저 동자승 들먹이는 좁은 어깨”란 시인의 시선이 기발하다. “목어도 따라 울며 고향 바다 그리는데” 부모·형제와 헤어진 어린 동자승의 부모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오죽하랴! 손이 언 동자승의 ‘붉은 손’과 들먹이는 ‘좁은 어깨’가 애련미를 더해주고 있다.

야상곡 한줄기가 심혼을 깨워줄 때
온종일 떠돌아도 맞울림 못한 채로
메아리 귀띔을 한다 “지난날을 돌아보라”

정지란 움직임의 또 다른 얼굴이다
존재의 덧없음도 불가항력 죽음까지
삶 내내 풀기 어렵다 삶이란 암호 하나

가뭇한 시공 저편 못다 채운 행간에서
날 닮은 실루엣이 외로움에 젖어 들면
별똥별 포물선 그리며 최후의 빛 뿌리네
- 「톺다, 열두 행간」

김은자 시인은 피아니스트다. 첫째 수는 밤의 정서, 고요함, 사색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야상곡을 들으면서 하루를 되돌아본다. 결국 시인에게 메아리처럼 돌아온 것은 “지난날을 돌아보라”는 충격적인 메시지다. 이는 남이 아닌 바로 시인 자신의 자각이다. 둘째 수는 삶과 죽음에서부터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시인의 깊은 성찰이다. 셋째 수는 인생의 끝자락에서 자각한 시인의 의지다.

고깔 위 장삼 자락 나붓나붓 날려가며
절로 겨운 어깨춤을 혼불로 엮어내면
샛강에 비낀 석양이 추임새로 흥 돋운다

굿거리, 타령장단에 한 풀어 빙글 돌면
지그시 깔린 눈빛 촉촉이 젖어들고
북소리 산마루치고 메아리로 돌아온다

파르라니 내린 달빛 내 춤사위 엿보는데
산사의 독경 소리 적막 뚫고 호통친다
“버려라 모두 비워라 빈손으로 갈 것을”
- 「승무에 취하다」

시인은 앞서 ‘무용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미련을 토로한 바가 있다. 시인이 가장 관심 있는 춤이 ‘승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첫째 수는 승무의 흥겨움이고, 둘째 수는 무희의 모습과 북소리의 울림이며, 셋째 수는 승무가 주는 가르침이다. 욕망을 버려라, 집착에서 벗어나라, 인생이란 공수래공수거가 아니더냐? 이 작품의 주제다.

(4) 추억(追憶)
노인은 과거로 살고 젊은이는 미래로 산다. 삶의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노인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젊은이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삶의 중심에 둔다. 미수를 앞둔 김은자 시인 역시 이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인용 작품을 통하여 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꽃반지 엮어가며 신랑각시 기약했지
뼛속 깊이 묻어둔 채 지울 수 없는 이름
하현달 이울어가네, 소쩍새도 목이 쉬고.
- 「그리다 그리다가」 두 수 중 첫째 수

두 분이 “꽃반지 엮어가며 신랑각시 기약”을 한지 숱한 세월이 흘렀다. 뼛속 깊이 간직한 이름은 이제 지울 수 없는 문신이 되고 말았다. 한평생 삶의 여정을 함께하다 보니, 하현달도 이울어가고 목이 쉰 소쩍새의 신세가 된 것이다. 인생이란 ‘허무’를 연출하는 순명의 여정인 걸 어쩌랴! 애련미가 돋보이는 서정시다.

한껏 부푼 학창 시절 재깔대며 모여 앉아
황금종 울려보자 깍지 걸고 다짐했다
눈씨로 당긴 살촉은 꿈의 정곡 찌르려나

푯대 끝 목표 향해 녹록잖은 현실 뚫고
샛별을 등대 삼아 노(櫓) 저어 이룬 꽃밭
황혼이 짙은 언덕에 종소리가 꽂힌다
- 「캠퍼스 잔디에서」

인생 여정의 표출이다. 첫째 수는 꿈 많던 학창 시절 무지갯빛 추억이다. 둘째 수는 녹록지 않은 현실을 헤쳐 꾸려온 가정과 인생의 끝자락에서 되돌아본 감회다. “이상”과 “현실”을 대비시킴으로써 인생은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인생은 고해”란 말을 떠올리는 작품이다.

가을을 좋아하던 그 사람 생각이 나
스산한 갈바람에 머리카락 휘날리며
호젓한 호반을 찾아 앳된 날을 되짚는다

함께 했던 벤치에서 깊은 하늘 바라보며
안타깝던 숱한 시간 덧없음을 삭이는데
자연은 입을 닫은 채 너른 품을 펼쳐준다
- 「청평호에서」

지난 시절 청평호에서 “그 사람”과 사랑을 속삭이던 “앳된 날”의 추억담이다. 미수를 바라보는 나이에 젊은 시절 “함께 했던 벤치에서 깊은 하늘 바라보며 안타깝던 숱한 시간 덧없음“을 삭이고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사 희로애락을 품어주는 자연은 언제나 바위처럼 말이 없는 품이다.

석양 내린 산사에서 꽃차 향에 젖어 들면
잔 가득 찰랑대는 골물소리 풍경소리
옛 생각 풍선이 되어 허공 높이 떠오른다

하이힐의 굽 높이가 인격의 잣대인 양
우쭐대며 폼만 잡다 삐끗하고 샛길로 와
무대 위 장구춤 추는 환영 속 나를 본다

다 접은 줄 알았는데 채 못 떠난 미련이라
한소끔 열병 앓듯 끓어대는 이 자책감
꿈이란 깊이 묻어도 새싹처럼 또 돋는 거
- 「무용가의 꿈」

김은자 시인은 예술 감각이 뛰어난 작가이다. 피아노와 무용, 시조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이루지 못한 ‘무용가의 꿈’에 대한 미련이라 볼 수 있다. 첫째 수는 석양 내린 저물녘 호젓한 산사를 찾아 차를 마시면서 지난날을 회상하는 서술이다. 둘째 수는 지난 시절 장구춤을 추던 환영(幻影) 속에서 현재의 자신을 본다. “우쭐대며 폼만 잡다 삐끗하고 샛길로 와”란 재치 있는 표현이 해학적이다. 셋째 수는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자책감이다.

(5) 계절의 감각
한국은 온대 계절풍 기후 지역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의 기후변화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나라에 속한다. 계절의 바뀜에 따른 생태환경 역시 변화하기 때문에 계절마다 느끼는 감각도 다르다. 김은자 시인은 계절에 느끼는 감각을 어떻게 시적으로 변용시키고 있는지, 인용 작품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카모마일 향에 취해 꽃차 한잔 마주하면
단풍 든 잎새마다 신의 숨결 느껴진다
이 가을 더 깊어지면 내 삶 곱게 익을까
- 「이 계절, 음미하다」

시인은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을 가진 카모마일 허브차를 마시며, 가을을 음미하고 있다. “단풍 든 잎새마다 신의 숨결”이 느껴진다니,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감각적이다. “이 가을 더 깊어지면 내 삶 곱게 익을까”에서는 단풍처럼 곱게 늙어가고 싶은 시인의 간절한 소망을 엿볼 수 있다. 카모마일 차향처럼 은은한 서정시다.

안개 낀 창밖으로 기도처럼 오는 봄비
자욱한 적막 속에 심상은 더 맑은데
채워도 허전한 시전(詩田)에 꽃씨 한 톨 눈 뜬다

수줍은 말간 얼굴 갸웃이 내어 밀고
연둣빛 옹알이가 보슬보슬 젖는 오후
이런 날 삼매(三昧)에 들면 월척 한 수 건지려나
- 「봄 예찬」

감각적인 서정시다. 첫째 수 초장의 “기도처럼 오는 봄비”가 그렇다. 봄비 오는 소리에 차분히 마음이 가라앉고 심상이 맑아 오자, 시인은 허전한 마음을 메꾸기 위해 시작(時作)의 의욕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중장과 종장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둘째 수는 시조 삼매경에 빠진 시인의 열망이다. 걸출한 시조 한 수를 짓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절실하다.

열대야 하얀 밤에 열창하던 매미 울음
가을빛 여물 즈음 슬그머니 잦아들면
올해는 풍년이란다 넘실대는 벼 이삭
- 「땡볕, 그 후」

초장의 시적 변용이 예사롭지 않다. “열대야 하얀 밤”이라니, 역설의 미학이다. 열대야가 너무 더워 하얗게 밤을 지새운 주체는 매미지만, 실상은 바로 시인 자신일 터이다. 종장의 표현 또한 맛깔스럽다. 도치법의 활용이 풍년을 바라는 시인의 마음을 배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오동잎 동동 떴네 가을 뜨락 석련지에
달빛이 보드라워 긴 연서를 쓰는 이 밤
어디서 소쩍새 울어 야윈 가슴 설레네
- 「설레다」

연못(석련지)에 오동잎이 동동 떠 있는 가을밤, 달빛 또한 보드라우니, 사랑하는 이에게 연서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다. 여기에 소쩍새까지 울어대고 있다. 시인의 가슴이 설렐 수밖에 없다. “오동잎 동동 떴네”에서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의 효과나, 소쩍새 울음, ‘메마른 가슴’ 대신 “야윈 가슴”의 표현이 서정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은밀한 하늘 얘기 올올이 풀어내며
배꽃처럼 흩날린다 천사의 옷깃인가
먼데 임 올 것만 같아 사립문에 귀를 연다
- 「첫눈 1」

첫눈이 오는 날은 누구나 마음이 설렌다. 연인을 만나고 싶고, 친구도 만나고 싶고. 때론, 생각지 않은 지인(知人)이 찾아올 것만 같다. 그래서 필자는 ‘첫눈’을 “은유로 찾아오는 느낌표”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화자는 첫눈이 내리는 모습을 “은밀한 하늘 얘기 올올이” 풀어내는 것이라 표현했다. 먼 데서 찾아올 것만 같아 “사립문에 귀를 연다”란 표현이 압권이다.

(6) 자연 서정
자연 서정은 자연을 소재로 화자의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는 문학적 경향을 말한다. 인간이 자연과 대립하는 삶을 살아가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연처럼 살아가거나, 자연과 한데 어울려 틈 없는 경지(天人合一)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은 성리학적 지식인들의 청빈하고 검약한 생활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무슨 일 있는가 봐 검푸른 심해 속에
천지가 뒤집힐 듯 거친 풍랑 몰아치다
한 찰나 치솟아 오른다, 핏물 같은 저 불덩이!
- 「일출」

바람 부는 여명 끝 이른 아침, 검푸른 바닷속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의 장엄한 모습을 스케치한 절창이다. 일출의 배경 묘사가 생생하고 역동적이다. 마침내 종장에 와서 활화산이 폭발하듯 “핏물 같은 저 불덩이”가 치솟는다. 비유와 상징, 색채 이미지 등 다양한 수사법을 통한 시적 변용이 시선을 모은다.

볼 붉은 산골 처녀 가슴 뛰는 어느 봄날
보슬비가 유혹하듯 바람기를 흩뿌리면
화들짝 꽃망울들이 폭죽 튀듯 터진다
- 「자목련」

시조의 멋과 맛을 한껏 발휘한 수작(秀作)이다. “볼 붉은 산골 처녀 가슴 뛰는 어느 봄날”이란 공간과 시간을 동시에 표출한 배경 설정이다. “볼 붉은 산골 처녀”는 순진무구한 산촌의 앳된 소녀의 다른 이름이다. 전구와 후구의 균형미와 율동미가 일품이다. 여기에 “보슬비가 유혹하듯 바람기를 흩뿌리면” “꽃망울이 폭죽 튀듯 터진다”라고 했으니, 중장과 종장의 ‘인과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대시조는 감상적 상상력보다는 논리적 상상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고요가 너무 깊어 잠 못 들고 뒤척이면
왜 뜨락은 저리 밝아 외로움을 불러오나
못 지운 그 이름일랑 은하 강에 띄우리
- 「달밤」

잠 못 들어 뒤척이는 불면의 밤이다. 뜨락의 달빛마저 휘영청 밝으니, 왠지 모를 외로움을 자아내고 있다. 미수를 바라보는 시인은 아직도 가슴 속에 지우지 못한 이름이 있나 보다. 그리운 이를 잊으려는 여인의 몸부림이 역력하다. 한편의 달빛 세레나데다.

수렁 같은 고통에서 헤어날 길 막막한 날
빗줄기 속 뛰어들어 삶의 풍상 되새기면
하늘이 호통을 친다, 벙근 풀꽃 보라며.

현絃이 된 빗줄기가 합주하는 외진 길섶
갈증에 시달리던 잡초들이 생기 얻듯
나 또한 활력을 받아 이정표를 세운다
- 「자연에서 배우다」

자연은 인간의 스승이자 상호의존적 관계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 없이 존재할 수가 없다. 자연에 대한 경외와 ‘자연보호’의 필요성은 바로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풀꽃의 강인한 생명력→새로운 삶에 대한 화자의 의욕으로 이어지는 연시조다. 지구온난화의 위기가 절박한 시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7) 기행 여정(餘情)
견문을 넓히는데 여행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다른 세계와 마주치다 보면, 시야가 넓어지고 이해의 폭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고 나면 마음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여운이 남기 마련이다. 일상화된 습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감각과 감동을 하기도 하고, 낯선 체험은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라고 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시인에게 여행은 매우 중요한 행위라 하겠다.

눈꽃이 춤을 추며 허공을 맴돌다가
애기동백 붉은 뺨에 사뿐히 내려앉네
하늘 벌 은밀한 이야기 귓속말로 소곤대며
- 「동백섬 소묘」

눈 내리는 동백섬을 스케치한 서정시다. 화자의 시심(詩心)이 하도 맑고 앙증맞으니, 이는 분명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다. 초장·중장·종장의 표현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눈꽃이 “애기동백 붉은 뺨에 사뿐히 내려앉네”란 표현은 얼마나 동시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인가.

엄마 품 그리다가 서러움이 복받친다
동자승의 꽁꽁 언 손 녹여주는 볕뉘 한 올
야속한 겨울바람은 풍경마저 울려놓고

수려한 겨울 풍광 펼쳐진 산사 둘레
지금 막 붓을 뗀 듯 촉촉한 화폭 위로
폭포수 구르는 소리 금강경에 잠긴다
- 「부석사에서」

영주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고찰이다. 이 절의 무량수전(국보 18호)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부석사 경내 조사당(祖師堂) 벽에 그려진 ‘조사당벽화’는 국보 46호로, 불교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첫째 수는 엄마 품을 그리워하는 동자승의 서러움을 추운 겨울바람과 대비시켜 표현하고 있으며, 둘째 수는 ‘조사당벽화’를 감상한 내용이다. 중장과 종장의 “지금 막 붓을 뗀 듯 촉촉한 화폭 위로 폭포수 구르는 소리 금강경에 잠긴다”라는 실감 나는 표현이 압권이다. 시인의 재기와 내공을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깊어가는 실어증에 무료를 깔고 앉아
희멀건 눈망울로 잿빛 하늘 응시한다
까치는 빗속에 앉아 지켜보다 가버리고

세월의 벼랑 끝엔 갈채 속 곱던 얼굴
레테강 앞에 서서 하루를 의탁한 채
영육은 폐선 한 채라 찬바람만 들락인다
- 「요양원의 해넘이」

한국에서 요양원이란 ‘죽음’이라는 종점에 도착하기 전에 잠시 들렀다 가는 간이역이다. 첫째 수는 아무도 찾지 않는 요양원의 고적한 정경과 입원한 노인의 무료한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둘째 수 역시 죽음을 앞두고 하루하루를 넘기는 노인들의 쓸쓸한 자화상이다. 레테 강(Lethe)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강’이다. 이 작품에서는 ‘죽음’을 상징한다 해도 무방할 듯하다.


3. 맺는말

김은자 시조의 내용을 살펴보면, 가족애, 향수(鄕愁), 추억(追憶), 자아 성찰, 계절 감각, 자연 서정, 기행 여정(旅情) 등으로 구별할 수가 있다. 이는 현대시조가 소재와 주제의 다양성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사회는 자유로운 개방사회다. 개성적인 독자의 다양한 욕구를 수용하자면, 시조의 소재와 주제가 다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가족애와 향수다. 김은자 시인이 태어난 곳은 평안북도 정주다. 서너 살 어린 나이로 어머니의 등에 업혀 사선을 넘어 자유의 땅을 밟은 실향민이다. 비록 어린 나이 때의 일이긴 하지만, 당시의 엄청난 충격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아 시인을 괴롭히고 있는 터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시조 「사선(死線)을 넘어」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시인의 시적 자아는 매우 치열하다. 인용 작품을 살펴보면, 작품마다 “쌓은 업(業)을 돌아보라”, “번뇌를 털어내란다”, “지난날을 돌아보라”, “버려라 모두 비워라” 등의 자각적이며, 계시적인 구절이 빈번함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는 모두 시인이 지금까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자신에 대한 생각, 감정, 행동 등을 되돌아보고 각성하려는 자아성찰(自我省察)의 결과라 생각된다.

김은자 시인의 작품을 보면, 날카로운 시적 감각과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이 번득이는 재기를 작품 곳곳에서 발견될 때가 있다. 이는 50여 년간의 음악 생활에서 비롯된 감성과 무용에서 촉발된 순발력의 성과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현대시조의 질적 수준을 한껏 높이는데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기에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여기에 “저급한 시는 설명하고, 뛰어난 시는 침묵하며, 위대한 시는 영감을 준다”는 시의 에피그램(epigram)을 덧붙이고 싶다. 앞으로 김은자 시인께서 독자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시조를 탄생시켜 주리라 확신한다. 다만, 시조의 원형과 본질에 대한 이해, 적확한 시어(詩語)의 선택과 조탁(彫琢)으로 시조 미학을 창출하는 일은 김 시인의 묵중(默重)한 과제로 남는다.

끝으로, 연송(娟松) 김은자(金恩慈) 시인께서 미수를 바라보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은빛 고운 시심으로 제4 시조집 『톺다, 열두 행간』을 상재하심에 기쁜 마음으로 찬사와 경의를 표하며, 삼가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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