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부
2부 3부 작가의 말 |
연여름의 다른 상품
|
“등록 번호는?”
“G4948021.” “각인인가?” “면역인입니다. 여러분처럼.” 능청스러운 대답에도 단속원은 시진의 검은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헤집더니 뿔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했다. 하필 어젯밤 바위에 부딪힌 곳을 사정없이 눌러대는 바람에 잠시 잊고 있던 통증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 p.15 “그런데 왜 당신을 ‘추락천사’라고 하는 거야?” 다시 걸음을 옮기며 시진이 물었다. “질문이 많군.” “갈 길은 멀고 아무리 봐도 당신은 천사처럼 안 생겼고.” “중요한 단어는 천사가 아니라 추락이다.” “왜? 어디에서 떨어졌길래? ”공중.“ 시진은 걸음을 다시 멈췄다. 라뎀에서 공중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 p.106 “저, 이 서점 백 년이 넘었다고 했었죠?” “네, 137주년이지요.” “그럼 공중도시가 건설되기 전에, 그러니까 라뎀 본사가 우리를 관리하기 전에…… 이 도시가 뭐라고 불렸는지 아시나요?” “오, 그럼요.” 그야말로 무식하고도 뜬금없는 질문이 아닐지 걱정했으나 폴린은 아주 반가운 기색으로 답변을 내놓았다. “라뎀이었어요. 그전에도요.” 그리고 그것은 시진이 예상 못 한 답이기도 했다. “공중 본사가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거예요. 당시에는 우리의 영토를 존중한다는 의미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땅과 함께 이름마저 빼앗은 셈이지요. 우리가 좋아하던 이름을 점차 낯설고 두려워하도록 만들었으니까요.” --- pp.244-245 “뿔은 뿔일 뿐이야. 자르면 다시 자라는 게 이치고, 잘라낸 뿔은 세공해서 손가락에 끼우거나 나팔로 만들거나 잘게 조각내 모자이크를 만들거나, 뭘 하든지 자기 마음이지. 아니면 평생 고집스럽게 자르지 않거나. 각인에게 뿔은 삶이고 몸이면서 놀이인 동시에 시간이거든. 공중은 그 순환에 흑각을 끼워 넣어 자기들 좋을 대로 뒤틀었을 뿐이야. 애초에 각인과 면역인은 서로의 비교항으로 존재한 게 아니니까. 탈라뎀에 대해서는 커터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여기엔 이견이 없을 거다.” --- p.313 “나도 사막에 가보고 싶다.” 라티오가 느닷없이 중얼거렸다. 야생 흑각을 양껏 얻고 싶은 소망인가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세상으로 이어지는 지평선을 보면서 오래 걸어보고 싶거든. 더는 걷기 싫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공중에서는 절대 못 이룰 일이지.” --- pp.386-387 “도대체 모자는 왜 쓴 거야?” 아이가 물었다. “어쩔 수 없잖아. 모자도 좋고 뿔도 좋으니까.” “커팅은 안 해?” 아이는 벌써 커팅을 알고 있었다. “좀 나중에.” “왜?” “꼭 만들고 싶은 게 있는데 아직은 좀더 자라야 해.” --- p.452 |
|
“원래 한번 비어버린 자리는,
지키는 사람이 없으면 금방 허물어지고 마는 거야.” 태어날 때부터 줄곧 빛이 들지 않는 그늘에서 자라온 ‘시진’은 특별한 직업이나 고정 수입 없이 본사에서 지급하는 기본 페이에 기대어 살아가는 수급자, 일명 ‘뱅커’이다. 뱅커 페이만으로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그는 친구 ‘제레미’와 함께 암석사막의 야생 흑각을 불법 채취해 납품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사는 세계는 지상과 지하로 나뉘어 있고 공중도시 라뎀(Lathem)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하에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면역인인 제레미는 공중도시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왜인지 시진은 그늘을 떠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7년 전 행방불명이 된 누나 ‘유진’의 소식만을 기다릴 뿐이다. 집안의 유일한 ‘각인’이었던 시진의 누나는 머리 위로 각뿔이 돋아날 때마다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야만 했고, 시진은 그런 누나의 고통을 잠시나마 덜어주기 위해 열 살 때부터 암석사막으로 나가 흑각을 구해와야만 했다. 세상에 둘만 남게 된 남매는 서로를 그 누구보다 아끼지만 ‘각인’과 ‘면역인’이라는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유진이 사라지는 날까지도 이해가 아닌 오해만을 쌓게 된다. 평범했던 시진의 일상은 이웃이자 친구였던 ‘베르트’가 각인 혐오자에게 살해를 당하면서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된다. 시진은 친구의 사망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24시간 내내 햇볕이 들지 않는 코어로 향하고 그곳에서 베르트가 커터(각인의 뿔을 잘라내거나 치료하는 사람)를 찾아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진은 ‘메메’‘줄라이’ 등 수십 가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커터와 그의 수제자인 추락천사 ‘데인’을 만나 세공한 뿔을 의뢰인에게 전달해주는 일을 시작한다. 시진이 친구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코어와 그늘을 넘나드는 사이, 다섯 명의 각인을 살해한 범인이 구치소에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감염으로 사망하면서 사건은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본사는 유사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이 모든 것이 각인과 커터의 소행이라 발표하면서 사람들의 갈등을 부추겨왔고, 시민 안전을 빌미로 흑각 수급을 통제해왔다. 더는 흑각을 구할 수 없게 된 각인들이 고통 속에 병들어가는 와중에 자치 도시 포르틴의 수장 ‘필’이라는 의문의 인물이 엘시노어 서점에서 89년 만에 커터들의 회담, 빅 테이블을 개최한다. 시진은 그곳에서 예기치 못한 인물과 맞닥뜨리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외로움을 지닌 ‘라티오’에게 우정과 측은지심을 느끼게 된다. 시진과 데인 그리고 라티오는 산산이 조각난 세계에서 진정한 모험은 소중한 이들을 지키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암흑 속에 갇혀 있던 비밀들을 하나씩 파헤치게 된다. 연여름의 소설은 주권을 빼앗긴 도시에서 사라져야만 했던 인물의 부재를 통해 누군가가 이곳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더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삶의 가치들을 조명하면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에 관해 말한다. 모든 게 끝난 후 라티오는 시진에게 “내가 모르는 세상으로 이어지는 지평선을 보며 오래 걸어보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곳을 향해 멀리 걸어가서 돌아오고 싶다는 바람은 누군가에게는 평범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매일같이 생사를 다투는 이들에게는 꿈에서나 가능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작가가 작품을 집필하면서 참고한 도서의 목록 대부분이 팔레스타인 사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타인의 무관심 속에 무참히 죽어가는 이들이 있고, 소설은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살아 있다는 선명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며 그 어떤 삶과 죽음도 헛될 수 없다는 믿음 아래 이 책, 『각의 도시』는 모두를 간절히 살리고 싶어 하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을 읽는 당신은 지금 어디서 누구와 살아가고 있는가. 작가의 말 몇 년 전, 서울 공예박물관을 거닐다가 문득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어느 뿔 공예가의 얼굴을 어렴풋이 그려보았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 테이트 브리튼에서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보았을 때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이 소녀가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을 방법은 없었을까. 서로 다른 장소에서 먼 시차를 두고 태어난 그 두 가지 생각이, 어느 날 한자리에 모여 나란히 걷기 시작한 이야기가 『각의 도시』다. 뒤를 돌아보니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멀고 낯선 장소까지 와버리고 말았지만, 도착한 곳에 어느덧 정이 퍽 들어버린 모양이다. 요 몇 년 매일 함께 뒹굴던 인물들을 배웅하는 지금, 아쉬운 마음이 좀처럼 꺼지지 않으니 말이다. 알아차린 분도 계시겠으나 여러 이름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빚졌다. 도시의 이름인 ‘라뎀’은 ‘Lathem’을 소리 내 읽은 것으로 ‘Hamlet’의 철자 순서를 바꾼 애너그램이다. ‘포르틴’은 노르웨이 왕자의 이름, 서점 ‘엘시노어’는 성城의 이름에서, 흑각 ‘트랩’은 희곡의 3막 2장에서 극 중 햄릿이 ‘쥐덫the mousetrap’이라고 언급하는 데서 인용했다. 일부 등장인물의 이름에도 희곡 인물의 흔적을 조금씩 녹여두었으니 자유로이 발견해주시기를 바란다. 주권과 정체성을 빼앗긴 도시에서 방향을 찾고자 헤매고 고민하는 소년은 여기에도 있지만, 그 행보가 ‘부재함’보다는 ‘존재함’으로 ‘사라짐’보다는 ‘드러남’ 쪽으로 향하기를 바라며 쓴 글이다. 현재 우리의 모습을 조금씩 거울에 비춰보기도 하면서. 하지만 햄릿이라는 이름이 그저 낯설게 들린다 해도, 이 소설의 동행이 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소중한 손길을 더해주신 분들이 많다. 긴 여정의 다정하고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신 윤소진 편집자님과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 팀, 초고를 작업하는 동안 꼭 필요한 조언과 응원을 보내주신 이선 작가님, 긴 작업 중에도 묵묵히 시간을 양보하고 나누어준 가족들과 첫번째 독자 다니엘에게 큰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페이지를 읽고 계신 당신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덕분에 또 써나갈 용기를 얻는다. 2025년 가을 연여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