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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
작가의 말 |
연여름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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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바로 옆에서 들려왔을 때 나는 도로 감겼던 눈을 반짝 떴다. 또 엉뚱한 꿈에 빠진 건 아닐까 의심하면서.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희뿌연 대기 속에서 두 개의 금빛 눈동자가 달무리처럼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내 재채기가 공교롭게도 이 애를 여기로 이끌어 준 게 분명했다. 지긋지긋하다는 말은 아무래도 취소해야 할 것 같았다.
“……강영소?” 나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드디어 그 애의 이름을 말했다. 꿈에서 소리 내 부르지 못한 바로 그 이름을. --- p.12 함께 가사를 조용히 읊조리는 사람들의 입술. 리듬을 공유하며 부드럽게 흔들리는 어깨와 손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댄 듯한 악기의 음색. 유튜브에서 여러 가수의 라이브 버전을 수없이 봤는데도 실제로 이 곡의 한가운데 있는 감각은, 내가 아는 모든 말을 총동원해도 뭐라고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현장에서 함께 호흡하는 게 재즈의 묘미라던 도경이 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음악이 흐르는 5분이 마치 5초 같기도 하고 다섯 시간 같기도 했다. --- p.59 헤마. 영소는 그게 자기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나는 어째서 네가 철분제 말고는 다른 걸 먹거나 마시는 걸 본 기억이 없는지. 여름에 손을 잡고 달려도 어떻게 피부가 조금도 따뜻해지지 않는지. 송곳니가 때때로 유난히 뾰족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지. 금빛 눈동자 색은 누구에게 물려받은 건지. 왜 한 번씩 할머니를 태인이라는 이름으로 친구처럼 부르는지. 게시판에 있는 그 어느 명단에도 왜 네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지.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 이름 속에 있었다. --- p.146 그 오지라퍼는 다시 만나도 변함없을 것이다. 이 박자에 참견하고 저 박자에 끼어들고. 도움은 필요 없다고 하는 데도 기어코 웃는 얼굴을 들이밀고. 때로는 기다린 적 없는 노크처럼 요란하고 시끄럽게. 하지만 도경이 형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말해 줄 것 같다. 노크라는 건 원래 시끄러워야 맞는 것 같다고. 내가 여기에 있다고 알려 주는 신호니까. 나를 도와 달라고, 아니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어느 쪽이든. 영소에게는 또렷이 들려올 심장박동 소리, 아니면 재채기 소리처럼. --- p.159 은수는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희망이 실망으로 서서히 변하는 과정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한풀 꺾인 내 속마음을 감추고 싶어서. 헤마는 눈물을 흘리지 않지만, 울고 싶은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나는 건 감출 수 없었다. 쿵. 그때, 소리가 들렸다. 저쪽 편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심장박동 소리가. 눈이 번쩍 뜨였다. 내 표정에서 뭔가를 읽은 은수가 기대에 부푼 얼굴로 물었다. “……들려?” 어쩌면 착각일까 싶어 뭐라고 대답하는 대신 다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쿵. 또다시 쿵. 느리지만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이 벽 바로 너머에 누군가가 있다. --- p.216 “물론 라이카의 동맹도 더없이 좋겠지만…… 지금은 내 친구들이 불러 주는 이름을 조금 더 들을래요.” 태인이 부르는 내 이름, 은수가 부르는 내 이름, 도경이 부르는 내 이름, 서아가 부르는 내 이름, 대곤이 부르는 내 이름. 뭐랄까. 수많은 가수들이 부른 「Your Sneeze」를 하나하나 아끼듯, 이 기적을 매일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헤마의 삶이 얼마나 길든, 이 시간은 결코 다시 오지 않으니까. --- pp.260-2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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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드는 모든 소음이 괴로운 274세 소녀 영소
불쑥 터져 나온 재채기로 영소의 세계를 두드린 18세 소년 은수 다정한 선의와 경청이 만들어 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이 시작된다 인간이 내는 모든 소리에 예민한 뱀파이어인 ‘낮의 헤마’ 영소에게 세상은 고통스러운 소음으로 가득한 곳이다. 그중에서도 예고 없이 터져 나오는 재채기는 영소가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소리다. 그런 영소 앞에 어느 날,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홀로 살아가는 은수가 나타난다. 할머니마저 여의고 완전히 혼자가 된 은수는 재즈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며 하루하루를 버텨 내는 학교 밖 청소년이다. 카페 ‘스캣’의 라이브 공연장에서 은수의 재채기를 계기로 스치듯 만난 두 사람은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발견하며 빠르게 가까워진다. 그러던 중 영소를 쫓는 헤마 ‘라이카’가 등장하면서 영소의 정체를 둘러싼 은수의 의문은 깊어져 간다. 마침내 영소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던 날, 하늘에서 운석우가 쏟아지고 건물이 무너지면서 운경시 전체가 잿빛 어둠에 잠긴다. 영소는 자신의 능력으로 은수를 구해 낸 뒤 실종자 구조에 동참하고, 은수에게 오랫동안 감춰 온 비밀을 털어놓는다. 어둠을 틈타 날뛰는 ‘밤의 헤마’들과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지키기 위한 ‘그림자 계약’을 맺고 무너진 도시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특별한 감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하려는 영소와 기꺼이 그 손을 맞잡은 은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소중한 이들을 지켜 낼 수 있을까? 괴로운 ‘소음’이 생명을 구하는 ‘신호’가 되는 순간 서로의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혼자가 아니게 된다 『페퍼』는 ‘소리’라는 소재를 재난 상황과 매끄럽게 결합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팽팽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영소에게 자극이자 고통이었던 타인의 심장박동 소리와 재채기 소리는 폐허가 된 도시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얻는다. 잔해 아래 갇힌 생존자를 찾아내는 결정적인 단서이자, 누군가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는 ‘생명의 신호’가 되는 것이다. 판타지적 설정의 중심에는 ‘음악’을 매개로 한 이해와 연대가 자리한다. 274세 뱀파이어 영소, 18세 외톨이 소년 은수, 오랜 비밀을 간직한 60세 밴드 보컬 태인, 해맑은 오지랖으로 주변을 환히 밝히는 19세 도경과 47세 카페 사장 대곤까지. 나이도, 성별도, 살아온 환경도 다른 이들이 음악 아래 하나의 공동체로 엮여 가는 모습은 타인에게 귀 기울일 여유가 사라진 세상에 다정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무엇보다 『페퍼』는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듣는다’는 행위의 의미를 섬세하게 확장한다. 영소에게 타인의 소리는 피하고 싶은 소음일 뿐이었지만, 재난을 겪으며 자신 역시 그 소란 속에 섞여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상대방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페퍼』는 그 작은 행위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곁을 내어 주며 마음을 포개는 일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 소란스러움과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 나도 기꺼이 소리의 일부가 되어서.” 독보적인 스토리텔러 연여름이 그려 낸 눈부신 성장 서사 섬세한 문장과 탄탄한 서사 구축 능력으로 주목받아 온 연여름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그만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특히 274년을 살아온 영소의 신비로운 시선과 홀로 삶을 버텨 온 은수의 곧은 시선을 번갈아 배치해 두 주인공의 내면과 관계의 변화를 입체적으로 담아내면서 독자로 하여금 인물들을 깊이 사랑하고 응원하게 만든다. 영소에게 세상은 소음으로 가득한 곳이었고, 은수 역시 마음의 문을 닫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삶에 익숙했다. 그러나 서로를 만난 뒤 두 사람은 조금씩 달라진다.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상대의 아픔을 바라보며, 위기의 순간에는 먼저 손을 내민다. 각기 다른 이유로 세상의 바깥에 서 있던 두 사람이 서로를 통해 세상 안으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가는 변화야말로 『페퍼』가 그려 내는 가장 눈부신 성장이다. 나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느끼는 이들에게 따뜻한 응원을 건네고, 여러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청소년들에게 한 걸음 내디딜 용기를 쥐여 주는 소설 『페퍼』. 잿더미를 뚫고 울려 퍼지는 두 친구의 아름다운 하모니에 귀 기울여 보길 권한다. “누군가를 만나 인연을 맺고, 사랑에 빠지고, 아니면 위기의 순간에 서로를 구하는 일은 모두 다름 아닌 경청으로부터 시작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의 작디작은 숨소리 또한 세상 누군가는 귀 기울여 듣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요. 그걸 들어 주는 존재로 인해 오늘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요.” _ ‘작가의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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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는 어른이 되기 싫은 청소년과 영원히 청소년인 두 사람이 서로를 통해 자신을 알아 가는 이야기다. 운석우로 무너진 도시에서 사람을 구조하고 뱀파이어인 ‘밤의 헤마’의 공격에서 살아남으면서 두 사람은 결국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에 대한 답을 찾아낸다. 그 과정을 함께하는 동안, 끝과 끝에 있으면서도 어딘가 닮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솔직해지길, 용기 내길, 손을 내밀길, 손을 잡길 바라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작품 속에만 존재하는 「Your Sneeze」라는 재즈곡이 마음속에 들릴지도 모르겠다. 만약 들린다면, 그 곡에는 경청과 친절, 다정과 사랑이 가득할 것이다. 그 마음이 흘러넘쳐 다른 사람에게도 들려주고 싶을 정도로. - 김청귤 (『재와 물거품』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