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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붉은 돌도끼 / 10 버드나무 숲 / 29 하카다 / 47 아름다운 호수 / 71 조선인 다케시 / 99 암각화 / 116 유리 / 137 사막 / 152 귀향 / 175 운명 / 189 백운산 그늘의 사람들 / 219 사랑은 어디에서 오나 / 239 흐르는 물 / 2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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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무늬는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 형상 같기도 하고 무희의 춤사위 같기도 했다. 돌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좁은 면을 아래로 하고 바라보았다. 점점 어떤 형상이 떠올랐다. 보면 볼수록 형상은 구체적으로 보였다. 감은 두 눈과 오똑한 코에 입모양도 선명한 얼굴 모양이었다. 더구나 아래쪽으로 홀쭉하게 좁아진 부분은 영락없는 턱을 연상시켰다.
돌의 전체적인 모양이 사람 얼굴 형상으로 보이는데 붉은 문양을 들여다보니 흉측한 생각이 들었다. 바로 사람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핏물로 보이는 것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눈 위 이마를 도끼에 찍혀 흘러내리는 핏물로 보였다. 결코 보기 좋은 문양은 아니었다. 수석을 하는 사람들은 돌에 대해 까다롭다. 돌의 끝자락이 뒤로 돌아가거나 윗부분이 뒤로 자빠진 돌은 취하지 않는다. 기가 빠져나간다는 근거 없는 믿음 때문이다. 남한강 오석이 최고의 돌이라며 선호하는 반면 휘황찬란한 색이 들어간 돌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도 붉은 홍옥석은 별도로 취급했다. 일본인들이 악귀를 쫓아낸다는 믿음으로 붉은 돌을 선호했다고 하니 그 말에 따르는 것 같았다. 홍옥석의 붉은 색감은 일본인이 아니라 중국인이 좋아할 만한 진한 붉은색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도끼에 찍힌 이마라는 생각이 자리 잡자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선명한 도끼의 형상이 떠올랐다. 도끼와 함께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벌써 20년 전에 나와 멀어진 K였다.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가 남긴 한 마디는 내 청신경을 흔들었다. “마치 도끼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 같았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에리코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도 같았다. 내가 걱정스러운 것은 그녀가 천황폐하의 만수무강이나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도하는 것이었다. 전쟁은 필시 한쪽이 패배해야 끝나는 것인데 백인으로 오신 주님이 동양인이 승리하는 걸 용납하지 않으실 것 같았다. 나는 매번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매주 에리코를 만나는 것으로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었다. 전쟁의 결말 같은 것은 아무 관심이 없었다. 에리코는 언제부턴가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마츠오가 죽고 나서부터인지 일본으로 건너오고 나서부터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성당에는 나가지 않지만 성경을 잣대로 나를 재어보고 있었다. 제법 넓은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에 나눈 대화는 몇 마디에 불과했다. 나는 끝내 예수님은 서로를 사랑하라고 했다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했다고 말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녀가 한 말은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낙담하기는커녕 가슴 한구석에 투지 같은 걸 불사르고 있었다. -당신을 두고 가지는 않겠소- 에리코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나 자신에게 그리고 운명의 매듭을 만들고 있는 신들에게 던지는 도전장이었다.- 천전리 각석 문양은 관람자가 바라보기에 아주 좋은 거리와 각도에 위치해 있었다. 눈에 익은 문양 앞에 서자 K가 떠올랐다. 입모양이 약간 비뚤어지며 웃는 모습이 방금 전에 본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둥근 원 안에 세로로 굵직하게 새겨진 문양이 다산을 상징하는 여성의 성기를 그린 것이라고 했다. 더러 수긍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원시시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부끄럽게 남녀의 성기를 함부로 새기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남자의 성기 문양이 없는 걸 보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문화해설사에게 문제의 문양을 가리키며 의미를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전혀 모른다- 였다. 아래 부분에 있는 한문은 신라시대에 새겨진 것이라 내용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지만 고대 그림내용은 아무도 해석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못 박았다. 아무도,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반발심이 일어났다. 도대체 원시시대 사람이 새겨놓은 내용을 이 정도로 과학이 발달한 시대의 사람들이 해석을 못하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시인들이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새겨 넣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어릴 적에 흙바닥에 작대기로 그림을 그리던 생각을 해보았다. 흔히 그릴 수 있는 문양이 소유를 나타내는 둥근 원이라고 생각하면 겹으로 그린 원은 여러 겹의 방어막을 그린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나의 독립된 부족을 뜻하는 것일 수 있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림문자를 풀어가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암각화 바로 앞에 그림을 알아보기 쉽게 그려 넣은 안내판을 부분 부분으로 나누어 사진을 찍었다. 한번 그림문자 해독에 도전해 볼 생각에서였다. “이건 원시인들이 사용하던 빨래판인가요?” 농담으로 하는 말이 분명했다. 나는 암각화에 대해 연구하려면 주변 환경부터 돌아보아야 한다고 둘러댔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엉뚱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사이비고대심리학자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당시의 상황을 추리해볼 필요는 있었다. 왜 여기 바위에다 그림을 그렸는지, 바위가 아닌 나무나 동물가죽 같은 곳에도 그림을 그렸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 재질이라면 아직까지 남아 있을 수 없겠지만 작은 돌판에 새긴 그림이 있었다면 발견된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았다. 이연옥씨는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가까운 마을에서 공사 중에 다량의 공룡알이 출토되었다고 연락이 와서 달려가 보았다고 했다. 땅속에 묻힌 둥근돌이 다수 나와 있었는데 화강암 재질이더라는 것이었다. 초등학생 수준의 상식만 있어도 알아보았을 텐데 난리를 쳤었다고 했다. 나는 이연옥 씨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지금은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상식을 그때 당시에는 전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암각화를 새기던 시대 사람들도 건너편 바위바닥에 자국으로 남겨진 공룡발자국을 보았을 텐데 그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 커다란 동물의 발자국인지는 알았을 텐데 한 번도 보지 못한 커다란 동물이 어디엔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더구나 바다에 사는 커다란 고래를 보면 육지에도 고래처럼 커다란 동물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진실을 정확하게 모르면 두려움을 느낄 수 있고 종교적인 믿음이 생겨날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어느 따듯한 봄날이었다. 벚꽃이 거리마다 활짝 피어나 천지는 새 세상이 열린 듯 화사했다. 에리코와 나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일본에 처음 건너왔을 당시 에리코 아버지의 부탁으로 둘이 이야기를 나누러 갔던 바로 그 공원이었다. 3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고 나니 공원의 모습도 많이 변해 있었다. 그때 당시에 사람 키만 했던 어린 벚나무가 아름드리 고목이 되어 무성한 꽃을 달고 있었다. 에리코와 나는 벚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두 손을 맞잡은 채였다. 나는 손바닥에 전해져 오는 촉감만으로 온몸이 공중에 붕 떠있는 듯했다. 고개를 돌려 에리코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에리코도 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세월의 흔적이 남기는 했지만, 그 옛날 대곡천 백련정에서 처음 보았던 그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이제는 마츠오도 우리를 용서할까요?” “….” 나는 쉽게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용서라면 에리코와 어린 유리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왔을 때 모든 것이 덮어졌어야 하는 것이었다. 조선인 김재성을 버리고 일본인 다케시로 살기로 작정했으면 모든 건 용서되어야 했다. “당신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나요?” “여전히.” “하나님도 우리사랑을 용서하실까요?” 나는 에리코의 입에서 하나님이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아래쪽 고래를 잡는 마을을 포함해 여섯 개 마을 사람들은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이곳은 여섯 개 마을의 중심이 되는 지역이다. 주로 무더운 여름이면 여섯 개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함께 모여 더위를 피했다. 마을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규칙을 정해 바위에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바위에 기록을 새기는 것은 전적으로 미호 마을의 몫이었다. 그들은 큰 산을 모시는 하늘의 정령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큰 산은 해를 품은 산이었다. 큰 산은 해를 닮은 붉은 돌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돌로서 그 강함을 따를 수 없었다. 바위에 기록을 새기는 것도 큰 산의 붉은 돌이라야 가능했다. 미호 마을의 촌장은 마을의 상징으로 붉은 돌도끼를 들고 다녔다. 신령스런 붉은 돌도끼의 권위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미호 마을 사람들은 성품이 온순하고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러니 모든 마을 사람들이 성심을 다해 따랐다. 각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마을 간의 규칙에 대해 의논하고 그 내용을 바위 면에 기록으로 남겼다. 바위 면에 기록을 새기는 것은 전적으로 미호 마을 장정의 몫이었다. 작업을 할 때는 마을의 상징인 붉은 도끼를 항상 옆에 세워두었다. 미호 마을 사내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바위그림을 읽고 새기는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호 마을에서 바위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붉은 돌 때문이었다. 붉은 돌은 유일하게 미호 마을에서만 나왔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하천에서 흔하게 굴러다니는 푸른색 옥석을 갈아 사용했는데 붉은 돌과는 야물기를 견줄 수 없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고래잡이 마을 사람들이 큰 고래를 잡는데 미호 마을의 붉은 돌이 유효하게 쓰였다. 집채만큼 큰 고기를 자르는 데는 무엇보다 커다랗고 날이 잘 드는 돌칼이 필요했다. 미호 마을에서 나오는 커다란 붉은 돌칼이 아니면 큰 고래를 자르는 일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소리는 유촌 마을 김인후의 집에서 밤중에 들었던 것과 똑같았다. 나는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 잠깐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뜨니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동물가죽을 걸친 원시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유촌 마을 물속에서 보았던 환영이 다시 떠오른 것이었다. 나는 영화촬영이라는 생각보다는 빨려들어가서는 안 되는 컴컴한 어둠이 내 앞에 다가와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 잡혔다. 얼른 아내를 불렀다. 원시인 복장으로 분장을 한 아내가 무리에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내가 내 앞으로 다가오자 원시인 복장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목이 말라. 물을 좀.” 내 말을 듣고 다시 김은경 시인이 물병을 들고 앞으로 다가왔다. 아내가 물병을 받아 뚜껑을 열고 나에게 건네주었다. 물을 마시고 사람들을 바라보자 모두가 제 모습대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빈 물병을 건네주고 암각화 벽면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내가 가리켜야 하는 문양은 바로 ‘아픈 사랑’이었다. 유리 여사의 그림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바로 문제의 문양이었다. 내가 문양에 손을 대는 순간 머릿속에서 수많은 아픈 사랑들이 거품처럼 떠올랐다. 마치 병 속에 들어 있던 비누방울들이 한꺼번에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듯했다. 오천 년 전 사흘이라는 남자의 사랑이, 75년 전 김재성의 사랑이, 가깝게는 20년 동안이나 허공을 헤매던 내 사랑이, 거품 속에 섞여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암각화 문양에서 손을 떼고 뒤돌아보았다. 아내가 걱정스런 눈길로 나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 방금 남편의 자연장을 치르고 온 김동휘가 아내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20년 동안 내 가슴을 들끓게 했던 백옥처럼 하얀 얼굴빛에 움푹 팬 볼우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나는 바닥에 놓인 붉은 돌도끼를 집어 들었다. 왼손으로 돌도끼를 들고 오른손으로 암각화 속 아픈 사랑을 짚었다. 그 순간 고속열차가 땅을 흔들며 지나갔다. K의 목소리가 열차소리에 묻혀 아스라이 들려왔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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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고래그림은 그림문자이다. 세밀한 그림으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천전리 암각화는 기호문자이다. 아직 해독을 할 수 없어 안타깝기는 하지만 머잖아 완벽한 해독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황하에서 탄생시킨 갑골문자가 반구천 암각화 이후에 만들어진 것은 확실하다. 갑골문자를 우리 한민족이 만들었다는 모 소설가의 주장이 있었다. 그 당시 황하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 한민족이었다는 주장이었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정확히 증명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교류상황으로 보아서 한반도의 그림문자, 기호문자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반박할 수는 없다. 소설 『붉은도끼』는 반구천 상류 미호천에서 나오는 붉은 홍옥석을 소재로 사용한 소설이다. 치정사건을 다루었지만 흥미를 위한 것이고 읽다보면 반구천 암각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