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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
낯선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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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우리는 자라면서 크고 작은 장애물을 함께 헤쳐 왔고 내가 가장 많은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도 바로 베스다.
--- p.34 아버지가 찰그랑 소리를 내며 열쇠를 타일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복도를 비틀비틀 지나간다. 자신이 깨어 있는지 그가 알 턱이 없는데도 그녀는 숨을 죽인 채 더 이상 잠든 척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상상한다. --- p.48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아빠를 바라본다. 앞으로 이런 미소를 볼 날이 많지 않을 것이며, 분명 내가 날려버린 시간보다 훨씬 소중한 이 순간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러나 내 눈에 보이는 건 평생 나를 속여온 사람, 환한 빛 아래 드러나 있어야 할 진실을 캄캄한 어둠 속에 감춰둔 아빠라는 사람뿐이다. --- p.91 이미 열린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닫을 수도, 알게 된 일을 억지로 잊을 수도 없다. 아니, 잊지 않을 것이다. 이미 드러나버린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설령 돌이킬 수 있다고 해도 그러고 싶지 않다. --- p.151 혹시 우리를 위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지 아빠를 이해하려 노력해본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것까지 속였다면 다른 말들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수두를 앓았을까? 내 턱에 남은 흉터가 정말 자전거에서 떨어져서 생긴 걸까? 내가 모르는 형제자매가 또 있진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인생 전체가 균형을 잃고 불안하게 흔들린다. 하늘로 끝없이 떠오르며 흘러가는 헬륨 풍선처럼 아무도 나를 잡아주지 않는다. --- pp.183-184 사랑이라는 건 배워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사랑을 보여준 적이 없다면, 나 역시 남에게 사랑을 보여주기 어렵다. --- p.234 그녀는 내가 스스로 묻기 싫어하는 중요하지만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도록 한다. 내 생각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이해하고, 내가 끝마치지 않은 말을 대신 마무리할 수도 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나보다도 먼저 안다. 내 작은 세계 속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모두 베스에게서 나온 것이다. --- p.234 일기예보를 볼 필요도 없이 매일매일 따뜻하고 화창한 곳에 산다고 상상해봐.” “금방 지루해할 것 같은데.” 내가 말한다. “끝없는 파란 하늘? 아마 가져간 속옷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우중충한 하늘이 그리워질걸. 그리고 넌 아마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도 싫어할 거야.” “황야는 그리울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말한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앉아 완벽해 보이는 삶이 실은 얼마나 결점투성이인지 생각해본다. --- p.443 이제야 집이 얼마나 낡고 지쳐 보이는지 눈에 들어온다. 아빠를 돌보고 일에 집중하느라, 특히 P 선생님이 깔끔하게 정리해주고 있을 때는 집의 허물을 보지 못했다. 어디선가 몰려온 슬픔의 파도가 나를 무너뜨린다. --- p.464 우리는 언덕을 올라 황야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나 자신도 놀랍다. 나는 억겁의 시간 동안 혼란과 회의, 의심의 소용돌이에 갇혀 있었지만, 시미언이 나타나자 새로운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비치는 듯하다. --- p.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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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내미는 법을 잊지 않는다면, 다음에 오는 것들이 행운의 들판을 가득 채울 것이다. 좋은 일은 이렇게 시작된다. -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추천
흔들리는 삶에서 길어 올린 희망과 가능성 반전과 감동의 가족 서사 〈낯선 편지〉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영국 작가 이머전 클락의 장편소설이다. 독립 출판으로 출간되어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 소설은 이후 출판사를 통해 정식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심리 묘사와 통념을 뛰어넘는 반전의 서사가 빛을 발한다. 각자 어려움을 딛고 성장하면서 어딘가 모나거나 닫혀버린 인물들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 독자들은 어느새 그들의 감정과 행동에 공감하게 된다. 또한 〈낯선 편지〉는 다각도에서 가족과 사랑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특히 카라가 가족의 비밀을 풀어가는 여정에는 가족이라 불러 마땅한 존재들이 등장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그녀가 대물림된 비극적인 가족사에 무너지지 않고 새로운 시작점에 설 수 있도록 돕는다. 어쩌면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관계,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감정들에 관하여 이 소설은 되묻는다. 그렇게 독자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도록 어두운 길의 안내자가 되어준다.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의 다락방에서 발견한 비밀 엽서 감춰져 있던 충격적인 진실에 마침내 가까워지는 순간 카라는 홀로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아버지를 돌본다. 환자들에게 익숙한 물건을 만지게 하면 기억력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 카라는 쓸 만한 물품을 챙기기 위해 다락방에 들어선다. 그 방은 아버지가 기억을 잃기 전 폭력을 행사하면서까지 들어가지 못하게 했던 장소다. 그곳에서 카라는 아빠가 남몰래 숨겨둔 엽서를 발견한다. 이 오래된 엽서 뭉치는 카라 자신과 오빠 마이클 앞으로 보내졌으나 한 번도 그들에게 당도하지 못한 것이었다. 30년 넘게 봉인되어온 비극적인 가족사의 진실을 밝혀줄 실마리가 발견된 것이다. 엽서들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이모 우르술라를 찾아간다. 그러나 누구보다 엽서의 진실에 근접해 있을 우르술라는 처음 보는 조카에게 냉담하기만 하고, 카라는 이모의 마음을 돌리지 못해 진실을 밝힐 기회를 눈앞에서 놓쳐버릴 위기에 봉착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두 사람은 다시 마주 앉는다. 우르술라는 오랜 시간 동안 카라에게 엽서를 보냈던 발신인의 정체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한다. 평생 진실이라 믿었던 모든 것들이 의심으로 바뀌면서 삶 전체가 흔들리게 된 카라는 고통스럽지만 이야기 조각들을 모아 진실을 알고자 한다. 하나의 거짓을 밝혀낼 때마다 더 커다란 거짓들이 드러난다. 그렇게 가족에 대한 사랑과 증오, 절망의 감정으로 인해 방황하는 카라의 굽은 여정은 그럼에도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어깨를 내어주는 희망과 가능성으로 서서히 물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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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대해 생각할 때면 비밀과 거짓말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낯선 편지〉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오래된 물건들을 들추면 유령이 깨어난다. 소설을 진행하는 이머전 클락의 목소리는 느리고 차분하지만, 그 안에 실린 감정의 격동은 시선을 떼기 어렵게 만든다. 기억과 망각은 어떻게 가족을 멀어지게 하고 또 구원하는가. 기억을 잃어버린 아버지, 기억되지 못했던 어머니, 어쩔 줄 몰랐던 어린아이들. 이처럼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나는 내가 된다. 망각마저도 나를 만들어간다. 앞 세대와 이별하는 법을 배운다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손을 내미는 법을 잊지 않는다면, 다음에 오는 것들이 행운의 들판을 가득 채울 것이다. 좋은 일은 이렇게 시작된다. - 이다혜 (기자,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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