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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아귀餓鬼
2장 기운氣運 3장 유메야ゆめや 4장 침입자侵入者 5장 귀환歸還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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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형체는 상조를 한참 바라보다 서서히 허리를 숙였다. 마치 자신을 오래 살피라는 듯 깊게 고개를 숙인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상조는 자리에서 꼼짝 못 한 채 숨을 죽이고 이상하리만큼 길고 정중한 인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 사람이 밭을 벗어나 마을 쪽 골목길로 사라진 뒤에야, 상조는 수상한 사람이 서 있던 곳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부러져 짓밟힌 고춧대와 쓰러진 소주병 하나가 보였다. 상조가 소주병을 들어 올리자 그 아래 타다 만 5만 원권 지폐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상조가 비에 젖은 지폐를 집어 들어 살폈다. 평범한 지폐 같았지만 눈에 익은 한자가 붉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李亨鎭 ---p.14 “수인이를 네 형이 입양했으니, 법적으로는 우리 손녀 아니냐. 그런데…. 어…, 이 땅을 삼등분해서 그 집에 준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지. 걔는 우리 핏줄도 아닌데.” 상조가 해령의 딸, 수인이에 대해 말하자 형용과 성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초혼이었고, 해령은 재혼이었다. 수인은 해령이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였으나, 해령이 형진과 재혼하면서 입양 절차를 거쳐 법적으로 형진의 딸이 되었다. --- pp.37~38 “혹시 이 땅을 매도할 계획이 있으시면 저한테 먼저 꼭 언질을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곳에서 제시하는 매매가보다 제가 훨씬 더 높게 드릴 수 있습니다.” 말을 덧붙인 필석은 짐을 챙겨 울타리를 나서더니, 주차된 차 쪽으로 향했다. 제를 올리던 수상한 남자가 높은 가격으로 땅을 매매하겠다는 말에 이상하게 형용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마치 배웅이라도 하듯 그 뒤를 따라나섰다가 형용은 트렁크를 열고 짐을 싣는 필석의 고급 세단을 흘끗 살폈다. ‘돈이 되는 땅.’ ---p.57 “아주머니 저 땅이, 무려 70년이요. 70년 넘게 주인이 아무도 쓰지 못하게 꽁꽁 묶어뒀던 땅을 왜 뒤집어 놓냐는 말이요. 여기 동네 사람들이 저 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요?” 유화는 사장의 말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형용과 자신은 땅의 소유권을 갖고 있었기에 장사를 하기 위해 공사를 하는 건 당연한 권리였다. “저희가 뭐 저기다 법에 어긋나는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잘못을 했나요?” 사장의 위협적인 태도가 불쾌했지만 최대한 부딪히지 않도록 유화는 표현을 골라 말했다. “아이고. 아저씨랑 똑같은 말 하시네. 저 땅 이전 주인 할매가 누군지 압니까?” --- pp.80~81 형용은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당황한 필석이 그를 바라보자 형용은 은행을 나오며 수없이 삼켰던 말을 마침내 쏟아냈다. “형, ‘유메야’에 1억만 투자해 줘요. 빌려줘도 금방 갚지 못해요. 그러니까 투자해 줘요. 형 말대로 그 땅의 기운이 좋으니까 잘될 거예요. 저도 믿어요. ‘유메야’는 성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저도 믿고 있다고요. 형도 확신했잖아요. ‘유메야’는 잘될 거예요. 전 믿어요…. 형이 도와주면 나쁜 기운도 다 이겨낼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필석은 잠시 얕은 숨을 내쉬며 무릎 꿇은 형용을 지켜보다, 천천히 다가가 손을 잡아 일으켰다. “난 ‘유메야’를 의심한 적 없어. ‘유메야’는 내 꿈이기도 해.” _106~107쪽 “이거 빵이 다 상했다고! 봐, 애들 배탈 나서 잘못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왜 먹는 걸로 장난을 쳐!” 유화는 형용의 말을 듣고 바닥에 떨어진 빵을 주워 냄새를 맡았다. 한 입 베어 맛을 보고는 금방 뱉어냈다. “이거 만든 지 하루도 안 된 거야. 근데 이래. 여보 나 정말 감당이 안 돼. 미쳐버릴 거 같아. 여기 너무 이상해.” 이번엔 유화가 울 것 같은 얼굴로 토로했다. ---p.213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유화는 사라진 남자를 찾아내기 위해 기를 쓰고 어둠 속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유화의 온몸에 한기가 스며들었다. “오레노 이에다(オレの家だ)!” 남자는 어느새 ‘유메야’ 내부 홀 중앙에 서 있었다. 유화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의 몸에서 여전히 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던 유화가 눈을 감았다 뜨자 이제는 남자의 머리만 공중에 둥둥 뜬 채 유화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데테이케!” ---p.219 以借生而遺死 삶을 빌려 목숨을 이으니, 죽음을 남겨 어둠에 바치노라. 아귀는 탐하고, 혼은 흩어지고, 산 자의 탐욕은 죽은 자의 제물이 되어 굶주림에 묶인 자를 스스로 입멸에 이르게 하노라. 유화가 손가락으로 봉투 위를 짚었다. 이전에 형용도 본 적 있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글귀였다. “삶을 빌려 죽음을 남긴다는 이 말…. 이게 뭘 뜻하는지 모르겠어?” “이게 뭔데?” “산 사람은 제물이 될 거야. 죽은 자들을 위한!” ---p.2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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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을 지키려는 자
땅을 되찾으려는 자 귀신을 부려 성공하고 싶은 자 이곳에서 부를 얻는 순간, 당신은 ‘제물’이 된다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저주와 공포에 대하여 『여기서 나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의 저택 터에서 시작해 현재 부안 농촌 마을과 군산 청사동 적산가옥 터를 관통하는 유례없는 K-오컬트 호러다.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김진영은 이번 작품에서 ‘집’보다 더 근본적인 단위인 ‘땅’에 주목한다. 땅을 사고, 물려주고, 나누고, 빼앗으려는 행위 속에 얼마나 많은 욕망, 차별, 폭력이 내재되어 있는지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갑자기 장남을 잃고 ‘핏줄이 아닌 며느리와 손녀’에게 재산을 조금도 물려주기 싫어하는 상조, 구조조정 이후 어떻게든 ‘성공’해 보이고 싶은 40대 형용, 무의식중에 탈서울은 실패한 삶과 같다고 여기는 유화, 아들이 아니라서, 장남이 아니라서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성희, 일제강점기부터 청사동 터에 얽힌 역사적 폭력을 외면한 채 부를 쌓아온 사람들까지. 자신에게 무엇이 결필되어 있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욕망이 집착으로, 그 집착이 광기로 변해가는 과정을 무섭도록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이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무엇이 진짜 공포인가?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나가』는 귀신이 먼저가 아니라, 은폐된 역사와 산 자의 탐욕이 먼저라는 점을 환기하며 “결국 우리를 집어삼키는 건 귀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아니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터는 돈을 끌어들이는 기운이 있어” 강렬한 캐릭터, 촘촘한 서사, 불길한 묘사에 이은 서늘한 반전까지 한달음에 읽게 만드는 페이지터너 호러 소설 『여기서 나가』는 폭우 속 밭 한가운데 서 있는 검은 형체로부터 시작한다. 이 의문의 인물이 남기고 간, 붉은 글씨가 새겨진 5만 원 지폐, 언덕 위 폐허로 남은 적산가옥, 밭에서 불쑥 솟아오른 수많은 손, 유화가 보는 ‘하얀 얼굴의 남자’ 환영 등 영화감독이기도 한 작가의 장점이 고스란히 담긴 이 작품은 시각적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며 한편의 잘 짜인 영화를 본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생생한 묘사에 더해 ‘누구에게 상속할 것인가’를 두고 가족이 서로를 의심하는 심리, ‘내 피가 아니다’라는 말로 정당화되는 배제와 차별, 부동산과 상속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집단적 강박, 세대가 바뀌어도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토지 신앙까지, 『여기서 나가』는 공포의 장르적 재미를 충분히 제공하면서도 읽는 내내 우리가 밟고 서 있는 ‘땅’과 ‘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귀신이 주는 두려움, 인간의 욕망과 집착과 저주가 던지는 서늘함에 더해 독자는 페이지를 덮는 순간, 정교하게 쌓아 올린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정확히 맞물리며 완성도 높은 서사만이 줄 수 있는 쾌감에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경험까지 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