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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선택받은 자들의 빵
1장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가난한 사랑노래_신경림 | 빈집_기형도 | 선운사 동백꽃_김용택 | 뒷모습_이병률 거울 속 일요일_이혜미 | 섬 주막_전윤호 |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_박준 이별의 능력_김행숙 | 반가사유_류근 |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_송찬호 2장 지금 이 시간이 내 생애에 가장 젊은 날 무인도_정숙자 | 배꽃은 배 속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_이문재 무가당 담배 클럽에서의 술고래 낚시_박정대 | 연가 9_마종기 | 머나먼 돌멩이_이덕규 온순한 뿔_장인수 | 방을 깨다_장석남 | 두부_이영광 | 이 모든 것_진은영 | 정오의 희망곡_이장욱 3장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풀_김수영 | 고아_이진명 | 고요로의 초대_조정권 | 메주_정재분 | 이사철_신동옥 봄봄봄_김형영 | 안식일_신미나 | 바람 한 줄기_이경임 | 도장골 시편―민달팽이_김신용 오늘 한 일이라곤 그저 빗속에 군자란 화분을 내놓은 것이 전부_고영민 책에서 이야기한 시들 |
張錫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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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지만 가난을 구조적으로 낳는 사회는 악이 선을 압도하는 타락한 사회다. 가난에 처한 사람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은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다는 점이다. 돈의 속성에는 애초에 행복을 만들어낼 요소가 없다. 그렇다고 가난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가난은 굶주림과 사회적 기회의 상실을 낳고, 불만족과 고통을 만들며, 우리 내면에 탐욕의 씨앗을 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이 우리를 고통과 불행으로 몰아넣는 것만은 아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시인은 노래한다. 가난한 사람끼리 서로 더운 체온을 보태며 가난을 넘어설 때 가난은 사회적 시련을 극복하는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이타적 사랑과 배려를 낳는 아름다운 신화가 될 수도 있음을. --- p.18~19
사랑은 시간이라는 질료 없이 타오를 수 없다. 사랑은 시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불가결한 필요조건이지만 거꾸로 사랑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기도 하다. 니클라스 루만--- p.Niklas Luhmann)은 『열정으로서의 사랑』에서 “시간을 요구한다는 점을 통해 사랑은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사랑은 그 상상에 날개를 달아주었던 속성들도 해소하고, 이 속성들을 친숙함으로 대체해버린다”고 말한다. --- p.54 살아 있는 사람에게 불가피한 감정이라는 측면에서 슬픔은 삶이라는 선물에 대한 대가다. 아무도 슬픔에 젖으려고 하지 않지만, 슬픔은 삶에 틈입하고 삶을 적신다. 슬픈 사람은 대개 혼자다. 그래서 슬픔과 외로움은 짝이다. --- p.77 사랑과 혁명도 그 문지방을 넘어서야 한다. 모든 진경은 문지방을 넘어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 그 문지방을 넘어서면 또 다른, 생의 긴 활주로를 하나 갖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 활주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순간과 영원 사이에서, 소멸과 영겁회귀 사이에서, 청춘을 지나 어른이 되는 것이다. 이륙한다는 것은 권태와 우울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올라 기성세대의 일원에 소속되어 버리는 것이다. --- p.143 삶은 찰나와 영원 사이에서 요동친다. 실은 찰나는 현실이고 영원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영원은 시간 개념이 아니라 찰나를 우주적 규모로 무한 확장하는 것이 아닐까? 시간을 무한 공간으로 바꿈으로써 영원은 찰나 속에서 오롯하다. --- p.208 청춘은 시간에 앞선 시간이고 현재의 현재이며, 존재의 역동이고 기쁨의 솟구침이다. 청춘이란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지복(至福)을 뭉뚱그려 집약한 다른 이름이다. 그게 순식간에 가버렸다. 청춘은 그것을 잃은 뒤 의미를 반추할 때 비로소 생동한다. 청춘은 과거가 된 뒤 비로소 행복의 부스러기들을 위한 소비재가 되고 만다. --- p.211 고요는 내적 혁명의 단초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가. 고요가 내면의 동력학에서 나오는 능동 가치이기 때문이다. 고요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 가만히 있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고요는 능동의 산물이다. --- p.2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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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신경림, 기형도, 김용택, 이병률……
여러 곡절 끝에 맞이한 오늘을 노래하는 시인 30인의 시와 해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중에서 가난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지만 사랑을 억압하는 가난은 당사자에게 그 무엇보다 사악하다. 가난한 사람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점이지만 자본을 권하는 우리 사회에서 돈을 빼고 행복을, 그 중심에 있는 사랑을 논하기는 사실상 힘들다. 가난 때문에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자의 슬픔은 우리가 처절한 결핍에 허덕여보지 않았을지라도 현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가슴에 뜨거운 무엇을 울컥하게 한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사랑을 묶어두고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들은 도태되고 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며 이는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가 낳은 원초적인 문제다. 본래 사랑에는 시작과 끝이 있지만 제3의 힘으로 사랑을 잃은 자에게 남은 것은 자신을 잃을 만큼의 처절한 고통이다. 시인이 이처럼 가난한 사랑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경험을 차치하자면 시인이란 본질적으로 약자의 편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랑이 자리했던 삶의 음지가 시인을 통해 공감의 양지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 김용택, 「선운사 동백꽃」 중에서 꽃 피는 봄, 연인들은 계절의 도래를 의심하지 않듯 시간 앞에서도 변치 않을 사랑을 약속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음 봄을 맞이하기 전 그 약속은 깨질지도 모른다. 시간은 사랑을 타오르게 하는 질료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사랑을 집어삼켜버리는 익숙함이란 본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사랑이란 “우연을 영원에다 기록하고 고정시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현실에서의 사랑은 영원한 행복을 가장한 우연한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을 잃은 자에게 남은 것은 슬픔을 방출하는 자기 연민의 눈물뿐이다. 홀로 남겨져 다시는 사랑 때문에 울지 말자고 되뇌어보지 않은 자가 어디 있으랴. 이별 뒤의 처절한 슬픔이 시를 통해 보편적 감정의 경지로 오르는 순간, 우리는 시가 지닌 치유의 속성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이 시간이 내 생애에 가장 젊은 날 아껴아껴 살아도 금세 타 내릴 우리는 가녀린 촛불 ― 정숙자, 「무인도」 중에서 청춘, 그 단어가 지닌 파릇한 기운과 달리 이 땅의 청춘들은 세상에 시달려 시들시들하다.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는 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때라며 세상은 수많은 청춘들을 독려하지만 사실 청춘이란 도전의 기회를 차별받는 세상, 누군가의 발을 거는 세상을 깨닫는 때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꿈꾸던 이 땅의 많은 청춘은 어느 순간 새로운 것에 대해 더 이상 감탄할 줄 모르는 어른이 되고 만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삶은 여전히 불안하고 확실하지 않다. 날카롭게 각을 세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모난 사람이 되어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청춘이란 우리 인생의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뭉뚱그려놓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만, 이미 기성세대가 된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청춘이 남긴 행복의 부스러기들로 허기를 채우는 것뿐이다. 청춘을 노래하는 시가 그토록 많은 이유는 시인이야말로 잊고 있던 행복의 부스러기들을 찾아 우리의 목구멍에 털어 넣어주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한 묶음의 언어 수신 확인조차 되지 않는 손 편지에 제 마음 대신하는 시 한 편 베껴 전달하고, 공중전화 박스 속 동전 떨어지는 소리에 못다 전한 말 있을까 심장도 함께 내려앉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추억 속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이미 빠른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과거의 삶이란 추억하고는 싶지만 돌아가기에는 두려운 지점이다. 기다림이 주는 설렘은 속도가 주는 즉각적인 해소 앞에 잊혀진 지 오래다. 그러나 여기 세상의 속도에 비켜서 우리의 삶을 꾸준히도 그려내는 사람들이 있다. 시인들은 세계가 만든 가난을 횡단하면서도 이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 삶의 모양들을 문자로 기록한다. 여기에는 가난이 사랑에게 건네는 사과와 청춘이 남긴 행복의 부스러기, 그리고 약동하는 우리의 오늘이 담겨 있다. 시는 우리가 무심코 잊고 있을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고 현재 속에 과거의 자리를 무단히도 파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