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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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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and Bart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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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형식은 이제 모든 대상이 지닌 공백에 결부된 실존적인 감정들을, 예를 들면 낯섦의 감각과 익숙함, 혐오, 자기만족, 관습, 살의를 유발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지난 백 년 동안 모든 글쓰기는 작가가 자신의 길 위에서 숙명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대상-형식 앞에서 이를 길들이거나 거부하는 일종의 훈련이 되었다. 그는 그 형식을 바라보고 맞서고 감당해야 하며, 그것을 파괴하려면 반드시 작가로서의 자신을 파괴해야 했다. 형식은 시선 앞에 하나의 대상처럼 매달려 있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의 스캔들이다. 그것은 찬란하면 구식처럼 보이고, 무질서하면 반사회적으로 보이며, 시간이나 인간에 비해 특별하면 무슨 수를 써도 고독이 된다.
--- 「서문」 중에서 소설은 죽음이다. 그것은 삶을 운명으로, 기억을 유용한 행위로, 지속을 방향성과 의미를 띠는 시간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변형은 오직 사회의 시선을 받을 때에만 성립될 수 있다. 소설, 즉 하나의 기호 복합체를 초월로서, 그리고 어떤 지속의 역사로서 강요하는 것은 바로 사회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술의 장중함을 통해 작가를 사회에 연결시키는 계약을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소설적 기호들의 명료성 속에서 포착되는 그 의도의 명백함에 의해서다. 소설의 단순과거 시제와 3인칭은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는 작가의 바로 그 치명적인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 「소설의 글쓰기」 중에서 만약 글쓰기가 정말로 중립적이라면, 그리고 만약 언어가 더는 거추장스럽고 길들일 수 없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공허함을 마주한 대수학만큼 얇고 순수한 방정식의 상태에 이른다면, 바로 그때 문학은 정복되고 인간의 문제는 아무런 색채 없이 드러나 전달되며 작가는 이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는 진실한 한 인간이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백색의 글쓰기보다 더 배신하기 쉬운 글쓰기도 없다. 원래 자유의 자리였던 바로 그곳에 자동화된 규칙들이 형성되고, 단단해진 형식의 그물은 담화의 최초의 신선함을 점점 더 옥죄며, 정의되지 않았던 언어 대신에 하나의 글쓰기가 다시 태어나게 된다. --- 「글쓰기와 침묵」 중에서 바로 이 지점에서 프루스트의 이름 이론에는 비록 언어학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기호학에 속하는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 곧 기호의 동기성이라는 문제가 등장한다. 물론 이 문제는 다소 인위적으로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새로우면서도 “정확한” 고유명사를 만들어 낼 자유가 있는 (또 의무도 있는) 소설가에게만 실제로 제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화자와 소설가는 같은 길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전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들 속에서 기표와 기의 사이, 이를테면 파르마의 모음이 띠는 색채와 그 내용이 띠는 보랏빛 사이의 일종의 자연적 친연성을 읽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반대로 후자는 노르망디풍을 내면서도 고딕적이고 바람이 부는 장소를 고안해야 하므로, 보통의 음소 배열 속에서 이러한 기의들의 조합과 어울리는 소리를 찾아내야 한다. 한 사람은 암호를 풀고 다른 사람은 암호를 만들어 내지만, 이들은 결국 같은 체계에 속한다. --- 「프루스트와 이름들」 중에서 결국 (이 글에서 그랬듯이) 우리가 의미의 일정한 응축에서부터 출발할 권리를 우리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이유는, 분석의 운동이 그 가느다랗게 얽힌 무한한 흐름 속에서 텍스트를, 의미의 첫 타래를, 내용의 첫 이미지를 파열시키기 때문이다. 구조적 분석의 목적은 텍스트의 진실이 아니라 그 복수성이다. 따라서 분석은 형식에서 출발해 거기에서부터 내용을 식별하거나 설명하고 진술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만약 그럴 목적이라면 굳이 구조주의적 방법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목적은 오히려 정반대로, 처음 드러난 의미들을 형식적 과학의 작용 아래에서 해체하고 물러나게 한 뒤 증식시키고 해산시키는 것이다. ---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