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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연동하는 현상들
1. 새로운 물질성의 층위 15 1.1. 한국 경제 구조에서의 물질론 17 1.2. 한국 사회 성격에서의 물질론 22 1.3. 한국 문학 환경에서의 물질론 27 2. 초점화하는 범주와 대상 32 2.1. 김정환과 『창작과비평』 37 2.2. 김혜순과 『문학과지성』 38 2.3. 최승호와 『세계의문학』 39 3. 신유물론의 시적 전유 44 3.1. 물질적-담론적 실천 44 3.2. 문학으로의 이접 48 3.3. 언어의 물질성 51 3.4. 방법으로서의 행위적 실재론 54 Ⅱ. 언어 유물론과 교직하는 운동성 - 김정환 시의 물질 지향 1. 판화성의 민중 구현 형상 63 1.1. 판화의 파급력 63 1.2. 시민판화 정신 67 1.3. 파라텍스트-예술 민주화의 균열 73 1.4. 시민미술학교의 운영 77 1.5. 「사랑노래」 연작의 갈래 79 2. 제3세계문학으로서의 민중신학 연작시 87 2.1. 「봄비, 밤에」 87 2.2. 『황색 예수전』 90 2.3. 장편 연작시 담론 94 2.4. 『회복기』 99 2.5. 제3세계문학론 100 2.6. 「사랑에 대해서」 106 2.7. 「입성」과 「최후의 고백」 109 2.8. 성과 속의 변증법 111 3. 노래운동성과 통일 지향의 리듬 의식 115 3.1. 노래운동 115 3.2. 노래와 접속하는 시들 118 3.3. 「모심기 노래」의 변주 양상 122 3.4. 「휴식 노래」 136 3.5. 노랫말-노래시의 의의와 한계 139 Ⅲ. 언어 신체론과 교차적 성정치 - 김혜순 시의 물질적 변용 1. 회화성과 기호 패러디의 실재 152 1.1. 메타픽션적 메커니즘 152 1.2. 여자를 구현하기 155 1.3. 여성-몸-시 159 1.4. 「李仲燮 未亡人의 목걸이」 163 1.5. 「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168 1.6. 「荒城盲人 잔칫날 孔玉振의 춤사위」 174 2. 교차적 모성성의 시적 내파 전략 179 2.1. 어머니의 목소리 179 2.2. 고정희와 최승자 시의 어머니 181 2.3. 「딸을 낳던 날의 기억-판소리 사설조로」 183 2.4. 모성성 논의의 전사와 이론 188 2.5. 상호교차성 191 2.6.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195 2.7. 「무덤에 간 아버님」 197 3. 성정치성과 축소 지향의 양태 201 3.1. 『어느 별의 지옥』 201 3.2. 「동구 밖의 민주주의」와 「불타오르면서 얼어붙는 나라」 205 3.3. 「그곳」 연작 212 Ⅳ. 언어 관찰론과 알레고리적 생태성 - 최승호 시의 사물성 1. 조각성과 자코메티적 사유 231 1.1. 『나는 숨을 쉰다』 231 1.2. 김수영과 자코메티 235 1.3. 〈수레〉와 「휠체어」 239 1.4. 〈디에고의 커다란 머리〉와 「나는 숨을 쉰다」 250 2. 공백으로서의 알레고리시 재고찰 258 2.1. 선(禪)을 향한 열도 258 2.2. 『진흙소를 타고』 263 2.3. 무인칭 266 2.4. 「자루」 연작과 「단추」 268 2.5. 북어 표상 275 2.6. 「사북, 1980년 4월」 280 3. 사물과 응시 지향의 반향 285 3.1. 모색기 285 3.2. 사물성과 생태학 290 3.3. 알레고리 너머 293 3.4. 「죽은 海馬」 298 3.5. 백색의 계엄령-「눈보라」 304 Ⅴ. 존재인식론적 전회를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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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의 물질적 조건은 1980년대에 급변하여 이전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한국 시사(詩史)의 결정적 순간으로 작용하였다. 이중 주의를 기울이고자 하는 면은 ‘상품으로서의 시집’이 대두한 사건이다. 1980년대 새로운 문학 매체로서 동인지와 무크지는 분명 각광받았다. 반면 기존 문예지의 대안으로 떠오른 동인지와 무크지가 기성 출판업체의 도움을 받아 출간·판매되던 정가가 매겨진 상품이었다는 점은 잘 부각되지 않는다.
---pp.27-28 1980년대 한국시의 물질성을 논하는 데 조명할 시인은 김정환·김혜순·최승호이다. 이들은 1950년대 중반 출생으로 1980년대 첫 시집을 낸 공통점이 있다. 또한 꾸준히 시작 활동을 이어오면서 한국 시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시인들로 평가된다. 이제까지 명칭은 조금씩 달랐으나 한국 시사에서 김정환은 민중시, 김혜순은 여성시, 최승호는 도시시 계열의 시인으로서 논의 되어왔다. 그러는 가운데 간과해서 안 되는 점은 이들이 1980년대 한국 시단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던 세 문학 진영.『창작과비평』(창작과비평사)·『문학과지성』(문학과지성사)·『세계의문학』(민음사)에 (무)의식적으로 속하였다는 사실이다. ---pp.35-36 시인이 당대에 쓴 시와 이를 모아 출판한 시집이 물질과 의미가 구분 불가능하게 얽힌 채, 내부-작용하는 물질적-담론적 실천으로 재구성되는 행위적 실재론의 실례에 부합하는 예술이라고 언급한 까닭이 여기 있다. 거기에 ‘행위적 절단(agential cut)’과 책임 ̄윤리의 장도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존재와 의미가 뒤얽힌 불확정적인 상태에서 주체와 대상을 부분적으로 출현시키는 행위적 절단은 관찰 장치에 의해 시행된다. 관찰 장치는 자명한 기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복합적인 물질적-담론적 현상”이다. 관찰 대상은 관찰 장치에 따라 내부-작용하여 상이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장치가 바뀌면 행위적 절단도 바뀌게 되고 각기 다른 행위적 절단은 각기 다른 현상을 낳게 된다.” ---p.53 프로 시인의 입장에서 자기 시를 아마추어 미술 작품과 같이 묶어 책을 내는 선택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환은 “예술 민주화”의 기치를 내걸고 이전에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던 아마추어 미술과의 협업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이는 개별 시편의 언어 효과라기보다, 시민판화 시선집의 물질적-담론적 실천의 파급 효과 때문이다. 1983년 김정환이 동인으로 활동한 『시와 경제』 2집에 “기능공 박노해”가 시를 발표한 이래, 노동 현장을 포함한 생활공간에서 자각한 민중의 목소리를 어떻게 포착하고 담아낼 것인가는 민중문학론의 주요 과제로 부여되었다. 이후 김정환은 시민판화 작품과 자신의 시를 결속하여, “시와 일상 삶과의 거리를 없애자”는 『시와 경제』 동인의 선언을 수행하였다. 그것은 충분히 고평할 만한 결단이다. ---p.72 제1·2세계인 서구에서 유입돼 제3세계에 뿌리내린 종교를 어떻게 전유하여 민중운동과 결합시킬까에 대한 탐색이 『황색 예수전』인 것이다. 이는 “물질적 생활의 생산 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 기계적 결정론을 벗어나, 종교라는 상부구조에 대한 물질적 생활의 개입을 통해, 그 결과를 피드백하여 다시 하부구조에 영향을 끼치겠다는 의도를 품은 김정환의 시학이다. ---p.102 시대의 환부를 묘파하는 시의 정신과 이를 확산시키는 건전한 채널로 기능하는 노래의 몸과 결합하기. 이와 같은 강령은 이상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의 틀은 시가 정신 활동만의 소산이 아닌 고유한 몸 ̄물질성을 토대로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시의 양식적 특징을 전제하더라도, 시의 물질성이 노래의 물질성으로 고스란히 전이될 수 있다는 성취되기 힘든 믿음을 갖는 것이다. ---p.140 이상의 논지를 전개하면서 김정환의 시론을 마르크스의 역사 유물론에 유비하여 언어 유물론이라 명명하였다. 그가 문학-시의 책무를 오염된 말과 싸우면서 올바른 역사의식을 함양하는 것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언어는 타인과 소통하려는 요구에서 생겨난 물질이자, 인간의 물질적 활동과 교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이념·표상·의식을 산출한다. 물질로서의 언어로 이상적인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는 김정환 시의 물질 지향은 판화운동·민중신학운동·노래운동과 교직함으로써 양자의 물질성을 상호 불화·결집하는 다층적 현상으로 구축하였다. ---p.145 김혜순은 박수근 화법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란, 박수근 그림의 석물적 마티에르와 평면성을 상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고 여기고, 박수근 화법을 전유한 남성적 글쓰기 “주체가 있고 대상이 있는 분명한 글쓰기, 시각적 세부 묘사로 대상을 늘 타자의 자리에 올린 다음 거창한 아포리즘을 얹는 글쓰기”를 반대로 돌려놓는다. 이는 박수근 화법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박수근 화법을 둘러싼 남성적 해석장에 김혜순이 개입하는 방식이다. 이를 간명하게 상호텍스트성으로 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타자를 배태하고 낳지만 언제나 주변에 머물러 있는 존재, 낳음으로 끝없이 중심을 해체하는 존재인 여성의 육체성”을 역설하는 김혜순 시는 그렇게 규정될 수만은 없다. 원본과 복제의 구분 불가능성을 주창하며 하나의 진리를 파훼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으로서의 상호텍스트성 요소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품어 새로운 존재를 낳는 여성의 육체성을 전제하고 쓰인 시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p.172 전면전을 취하지 않고 방향을 비틀어 김혜순은 1980년대 자신의 시 속 “모든 사상과 역사와 민족과 사건의 중심에” 남자-부자 대신, 여자-모녀를 위치시킨다. 그러나 1980년대 김혜순 시 바깥의 “모든 사상과 역사와 민족과 사건의 중심”은 여전히 남자-부자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모성성에 입각한 여자-모녀에 관한 물질적 교차성에 관련한 시를 지속적으로 써나가는 작업은 “온힘을 기울여 십자가와 같은 이승에서의 時空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도정이었다. 그러한 지난한 과정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현실은 세 번째 시집에 이르러, 이 세계의 나락이 다름 아닌 여성이라는 인식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나부끼기만 하는 허수아비와 달리, 실제 물리력을 행사한 1980년대 가부장제 군사국가의 폭력성과 결부된다. ---p.200 1980년대 시집 시리즈에 부재하던 여성시의 자리를 메우면서, 김혜순은 남성의 몸과는 대별되는 물질성의 차이를 생산하는 여성의 몸을 바탕으로 시적 활동을 개진하였다. 타자와의 얽힘 또한 이러한 몸으로 이루어지는 김혜순의 시 쓰기를 이 글은 언어 신체론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1980년대 한국의 정치와 일상을 장악한 가부장제와 충돌하여 강렬한 시적 파열음을 내었다. 김혜순 시의 언어 신체론을 성정치적 맥락에서 살펴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p.221 최승호 시에서 내부-작용하는 물질적-담론적 실천은 거기에 속한 구성 요소들의 가치를 폐색시키지 않고 얽힘의 과정에 참여하도록 이끌어, 조각과 공백과 사물이 언어와 같이 시(집)의 물질성을 생성하게 한다. 환금성을 최우선하는 1980년대의 물질만능주의를 통과하는 도정에서 최승호 시는 대극에 있는 물질들의 배치를 실험하였다. ---p.228 예컨대 국판 30절판(가로 125mm×세로 205mm) 『대설주의보』에 수록된 「생일」이 그러하다. 총 4연으로 된 시에서 4연 1행 “無는 대체”까지는 왼쪽 면(26쪽)에 인쇄되고, 4연 2행 “나이를 몇 살이나 먹었을까,”부터는 오른쪽 면(27쪽)에 인쇄되어, 행갈이가 아닌 시인이 의도치 않은 연갈이의 효과를 발생시킨다. 반면 이보다 더 큰 사이즈로서 일반적으로 사진집에 쓰이는 크라운판 형태를 취한 『나는 숨을 쉰다』에 실린 「생일」은 한 면(24쪽)에 전문이 담겨 있다. 시집 판형.물질적 틀의 변화가 시인이 의도하였던 시의 호흡을 온전히 담아내는 데 기여한 예이다. 이는 2011년 출판사 문학동네가 새 시인선을 출범하면서 시도한 시집 판형 혁신을 통해 언론의 관심을 받았던 현상의 전범이라고 할 만하다. --- pp.233-234 그것은 시 자체에 천착하는 내재적 독법에 의거한 해석이 아니다. 「휠체어」와 〈수레〉의 물질성들이 얽힌 결과, 물질적-담론적 실천 과정에서 이끌려 나오는 분석이다. 3연 1행 “그러나 無知가 열어 놓는 신비로운 곳”도 2행 및 3행을 고려해 보면, 존재의 탄생 이전 우리가 알 수 없는(無知) 세계의 불가사의함을 일깨우는 비의적인 전언처럼 들릴 여지가 있다. 그런데 이를 평소 자코메티가 표방하던 작업 태도와 연결 지으면 이 시구에 좀 더 간명한 접근을 할 수 있다. 자코메티 평전을 쓴 로드는 자코메티의 모델이 되었던 경험을 담은 기록도 남겼다. 1964년 9월부터 18일 동안 진행된 작업 기간 내내 자코메티가 제일 많이 한 말은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작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무지의 한탄이었다. --- pp.247-248 『진흙소를 타고』에 내재한 허공의 정치성은 갑작스럽게 등장하지 않았다. 『대설주의보』를 쓴 사북에서 시작된 “갇힘과 벗어남”의 메커니즘을 구현한 구멍의 물질성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이것은 불교에서 설파하는 진흙탕 같은 사바세계를 “진흙을 뒤집어쓰고 허물어져 가도 자유롭게” 건너려는 최승호의 시적 전유-진흙소가 지향하는 허공의 정치성과 맞닿는다. ---p.284 최승호 시에서 내부-작용하는 물질적-담론적 실천은 여기에 참여하는 구성 요소들의 형태와 속성을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놓아둔다. 조각성과 공백과 사물을 전유하기보다 보존하여 언어와 함께 시(집)의 물질성을 구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 유물론과 호응하는 언어 유물론이 전개하는 현실 변혁, 여성(성)과 연동하는 언어 신체론이 개진하는 세계 내파와는 구분되는 언어 관찰론에 의하여 추동력을 얻는다. 최승호 시의 언어 관찰론은 비가시화된 남루하고 비천한 것을 투시한다. ---p.313 위에 정리한 김정환·김혜순·최승호 시 연구를 통하여, 이 글은 쇠퇴한 정신세계와 비등한 물질주의라는 1980년대의 이분법적 물질 정신구도를 새롭게 재편할 수 있는 동력을 생성하고자 하였다. 이는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비화된 유물론적 실천 이론들의 대립을 언어 유물론의 자장에서 연대하고 길항하는 물질들의 시로 가로질러 시도되었다. 다음으로는 물질 자연에 대한 인간 정신의 지배가 낳은 자유의 박탈과 이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을 언어 신체론과 잇닿는 여성시의 기획으로 재고함으로써 도달하였고, 마지막으로는 언어 관찰론에 기반을 둔 비인간적 생태성의 상상력을 검토하는 것으로 경주하였다. ---p.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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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1985년 새해를 한 달 앞두고 태어난 나에게 1980년대의 기억-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살았으나 살아본 적 없던 시대, 지나왔으나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없던 것을 언젠가부터 나는 은밀히 되새기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나를 기억하고 있는 듯한 전도된 감각-무의식이 1980년대로 나를 끌어당긴 것일까.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조건이 맞물리면서 문학이 폭발적인 운동성을 가지는 시기. 한국에서는 1980년대 시가 그랬다. 그래서 이때는 ‘시의 시대’로 불린다. 유력 매체에 시가 실렸고, 광장에서 시가 울려 퍼졌으며, 출판사는 앞다투어 시집을 내놓았다. 그러나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기왕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 1980년대 시가 시대를 아프게 앓음으로써 무언가를 증언하는 언어였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일까? 정치적 메시지를 선명하게 담아내서가 아니라, 시를 둘러싼 내외부의 물질적 특성이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물음을 나는 오래 붙들고 있었다. 그러다 신유물론과 조우했다. 신유물론은 물질 개념을 재고하면서 존재와 인식의 좌표를 다시 설정한다. 주체와 대상이 서로를 가로질러 엉키고, 끊임없이 변주되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주장. 그러니까 세계와 인간, 사물과 언어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상호 의존적으로 함께 갈마든다는 사고. 이것은 내가 1980년대 시에 접근할 수 있는, 낯설지만 의미 있는 길을 제시해 주었다. 기왕의 1980년대 시 연구는 대체로 민중문학적 관점, 해체적 언어 실험이라는 해석 틀 안에서 논의되고 있었으니까. 공고한 그 틀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에 신유물론을 방법론으로 삼아, 1980년대 한국시의 물질성을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을 썼고, 이를 다듬어 이번에 『얽힘의 사건-신유물론과 시의 시대』로 출간하게 되었다. 나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세 시인(김정환·김혜순·최승호)의 작품을 중심으로, 시가 어떻게 물질적 존재로 얽혀 작동하는지를 들여다보았다. 전술했지만 여기에서 얽힘이란 단순한 연결이 아니다. 새로운 생성을 빚어내는 과정으로서의 사건 그 자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1980년대와 긴밀하게 얽히는 느낌에 내내 사로잡혔다. 어떤가 하면 1980년대를 한 번 더 살아낸 기분이었다. 지나간 것은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지지 않고 현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이다. 그런데 그 역도 실은 성립했던 것이 아닐까. 과거가 재구성되면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을 불러내는 힘. 그렇다고 긍정하는 나의 입장에서, 시의 시대는 끝났지만 완전히 종결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 시절은 오늘을 사는 우리와 접속하여 또 다른 관계망을 형성한다. 응답이란 이를 무시하지 않고 섬세하게 살피는 일이다. 응답의 기록으로서 이 책을 엮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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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른바 ‘시의 시대’라고 불리는 80년대의 한국 시를 다시 읽고 싶게끔 한다. 당시의 시를 종이 위에 얹힌 얌전한 텍스트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혹은 어떤 사상이나 이론의 결과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온갖 물질적-담론적 실천의 장으로서 시와 시집을 재음미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읽어나가다 보면 마치 80년대 한국 시단의 내부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시와 시집, 시인과 시단, 그를 둘러싼 온갖 사회적 환경이 한데 얽힌 자장 안에서 함께 호흡하듯이 시적 사건을 묘파하는 시선이 흥미롭다. 그만큼 현장감이 차고 넘친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이기 이전에 내부에서 함께 겪는 사건으로서의 문학을 몸소 실천하는 연구서를 오랜만에 만났다. - 김언 (시인·서울예술대학교 문예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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