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센터
작가의 말 개정판 작가의 말 심사평 |
김의경의 다른 상품
|
“무릎 꿇어도 좋은 상대는 기껏해야 바다 정도인데.”
잃어버린 자존을 되찾기 위한 우정과 사랑의 이동경로 스물다섯 동갑내기 주리, 용희, 시현, 형조, 동민은 콜센터에서 만났다. 그들은 모두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었는데,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 삼아 콜센터 상담사 일을 하고 있다. 서류 전형에서 번번이 탈락했던 회사들과 달리 콜센터는 면접 기회가 쉽게 주어졌고, 출근까지도 일사천리여서 당장 수입이 필요한 지금의 상황엔 이만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없었다. 심지어 근무 시간도 조정이 가능했으니, 잘 활용만 한다면 자투리 시간에 취업에 필요한 공부를 할 수도 있었다. 이들이 콜센터에 지원한 이유는 다른 아르바이트에 비해 몸이 덜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반만 맞는 이야기다. 사무실에 앉아 헤드셋을 착용하고 매뉴얼에 따라 응대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고객이라는 변수가 존재했다. 소리를 지르고 억지를 부리고 폭언을 남발하는 ‘진상’ 고객들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했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퇴근한 이후에도 그들의 막말이 이명처럼 귓전을 울렸다. 무시와 멸시는 기본, 심한 경우 성희롱까지 일삼았다. 하루에 수십 번씩 전화를 해 특정 상담원을 집중적으로 괴롭히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시현은 업무를 꽤 능숙하게 해내 일반상담사에서 전문상담사로 승급하게 된다. 전문상담사는 일명 ‘진상처리반’이기 때문에 일반상담사에 비해 더 높은 시급을 받을 수 있었다. 시현은 아나운서 지망생으로 언론고시를 준비 중이었고, 진상 고객에 대한 실시간 응대 또한 아나운서로서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업무라 생각했으므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베테랑 시현마저 궁지에 몰아넣은 ‘슈퍼 진상’이 등장한다. 자신이 대기업 부장이라며 갖은 막말을 일삼았는데, 시현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직장인이라면 한창 일할 시간인 오후 1시에서 6시 사이에, 그것도 하루에 몇 시간씩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대기업 부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생각만 할 수 있을 뿐, 시현이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들어주고 매뉴얼에 맞춘 응대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대기업 부장’은 포기도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시현을 괴롭혔고, 그즈음 집안 사정으로 아나운서 아카데미에 더는 다닐 수 없게 된 시현이 결국 폭발하고 만다. 부산 해운대에 살고 있다는 그 ‘대기업 부장’을 찾아내 복수하겠다고 다짐한다. 부산으로 가겠다는 시현을, 그녀를 짝사랑하는 동민이 따라나선다. 처음에는 만류하던 주리와 용희, 형조도 이내 시현 일행에 합류한다. 말도 없이 출근하지 않은 그들의 핸드폰이 연신 울리지만 다섯 친구는 묵묵히 부산으로 향하는데……. “시현은 하루 종일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저녁을 먹은 뒤 옥상에서 용희의 푸념을 들어주면서도 이제 정말 그만둬버릴까 생각했다. 이제 그만 ‘포기’해버릴까. 하지만 시현은 포기할 용기조차 없었다. 그것을 포기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떠올리며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49쪽) “용희는 두려웠다. 평생 불안한 일자리를 전전해야 하는 것이. 취업하지 못하고 결혼도 못한 채로 세상에 내던져지는 것이.”(87쪽) 감정 노동의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뜻밖의 상호 접속과 위로의 순간 막말과 폭언, 부당한 대우를 매일 견디면서도 친구들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우정과 사랑을 좇고, 서로에게서 희망을 찾아낸다. 복수를 작심하고 비장하게 올라탄 부산행 기차 안에서도 실없이 웃을 수 있는 건 이 시간을 함께 버틸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김의경의 소설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동료=친구’라는 등식은, 누적된 감정 노동으로 녹초가 되고 꿈과 현실의 기로 앞에 수시로 무릎을 꿇는 그들의 페이소스에 유쾌함과 경쾌함을 부여한다. 소설가 강영숙은 “이 해프닝 같은 여행이 그들에게는 저항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짚으며 “이처럼 절망하지 않으려 애쓰는 스물다섯 살 청년들은 생활 속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 있는 주체”라고 명명한다. 이는 노동을 주제로 한 소설을 주로 써온 김의경 작가가 자신의 소설 속 인물과 독자에게 건네는 일종의 ‘인생 매뉴얼’일 것이다. “어서 가자. 진상 찾아 삼만 리!” 시현이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키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출발.” 시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차가 움직였다. 문영 실장으로부터 전화와 문자가 쏟아졌지만 경쾌한 음악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창문이 닫히고 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119~12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