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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기억한다는 것 그에 대해 안다는 건 진실일까 숨겨진 것들 주사위 던지기 드러나는 것들 남아 있는 것들 에필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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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말처럼 크리스티안을 시간 속에 묻어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랬다면 나도 미련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살아 있는 채로 내 곁을 떠났다. 나는 바로 그 점이 내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자기 뜻이 아니라는 메시지. 그가 남긴 말을 독해할 수 있는 존재는 나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그가 머물던 곳에 내가 직접 와보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었으니까.
--- p.24 “어디에도 내 고향은 없다는 느낌이야. 스위스 이곳저곳에서, 파리에서,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도.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인이 아니잖아. 반쯤 한국말을 하고, 또 불어나 영어로 말할 줄 알아.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완벽히 하지 못하잖아. 안 그래?” --- p.41 “크리스티안 말고, 나 명주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얼마나 깊은 곳에서 출발했는지.” --- p.42 ―당신과 닮은 사람이 과거에 회사에 있었죠.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말이에요. --- p.56 나는 크리스티안이라는 과녁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어쩐지 영원히 그곳에 닿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크리스티안이 남긴 흔적은 나만 비껴가 있는 것 같다. 그 흔적을 끝까지 찾아가는 건 가능할까. 한국에 있는 크리스티안에게 나는 되려, 외지인에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까. --- p.63 내가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크리스티안의 행적을 따르다 보면 알게 되는 것들과 누추해지는 나의 마음이었다. 크리스티안은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면들은 철저히 숨긴 걸까. 왜 이제야 나는 크리스티안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걸까. 내가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정말 그래서가 아니라 믿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 p.91 때로는 그리움이 통증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이네스도 알아가고 있는 걸까. --- p.147 크리스티안. 나는 지금 그에게 묻고 있다. 우리에게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는지. 상대방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할 말을 가리거나 숨긴 채, 자신이 생각한 방향으로 줄기차게 인생의 배를 저어 가는 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 pp.189-190 ―그나저나 레아도 문제예요. ―왜요? ―아무하고도 어울릴 수 없는 아이라서요. --- p.1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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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삶.
외로웠던 남편의 시간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해외 입양자라는 정체성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동시에, 정교한 미스터리 서사로 독자를 끌고 가는 채기성의 신작 장편소설 『크리스티안 볼란텐』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스위스로 입양되어 살아온 레아가 남편 크리스티안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마침내 한국인이 되고자 했던 남자 크리스티안.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뒤로한 채, 한국의 회사에서 자살한 상태로 발견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석연치 않다. 남편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레아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가 다니던 회사에 입사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그녀를 점점 더 위험하고 깊은 진실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한 미스터리를 넘어, 해외 입양인이라는 정체성의 균열을 섬세하게 그려낸다는 점에 있다. 크리스티안은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에 왔지만, 끝내 완전한 한국인이 될 수 없다는 현실과 마주한다. 반면 레아는 자신을 버린 나라이기에 한국을 거부하며 스스로를 철저히 외부인으로 규정해 왔다. 같은 배경을 지녔지만 정반대의 방향을 향하는 두 인물의 대비는 ‘정체성’이 출생이나 국적이 아니라 경험과 선택, 그리고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또한 작품은 외국인을 우대하는 회사 구조 속에서 소외되는 한국인의 모습, 내부고발과 권력 다툼이 얽힌 조직의 민낯 등을 통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비춘다. 개인의 정체성 문제와 사회 구조적 모순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이야기는 한층 더 깊은 층위를 획득한다. 『크리스티안 볼란텐』은 레아와 크리스티안,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의 다양한 관계를 통해 사랑과 연대의 의미 또한 놓치지 않는다. 부부의 사랑, 일방적이거나 뒤틀린 사랑, 그리고 위기 속에서 형성되는 연대까지 각기 다른 감정들이 입체적으로 교차하며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탄탄한 플롯과 빠른 전개, 점층적으로 고조되는 긴장감은 미스터리 장르로서의 재미를 충실히 제공한다. 동시에 정체성, 소속감,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단순한 장르소설을 넘어서 묵직한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속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결코 특정한 누군가만의 것이 아니다. 『크리스티안 볼란텐』은 그 보편적인 물음을, 가장 개인적이고도 극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며 독자에게 조용하지만 깊은 파문을 남긴다. 읽고 난 뒤, 우리는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묻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 누구인가?’ |